장편소설 ‘젖빛 그리움’, 놀라운 필연
‘아니, 이럴 수가!’
딱 그 말이 입안에 뱅그르르 돌았다.
2020년 1월 2일 목요일 오전 9시 제주공항 터미널에서의 일이었다.
지난 2019년 12월 23일 월요일부터 2020년 올 들어 첫날인 1월 1일 수요일까지 열흘에 걸쳐, 1,000리 제주 올레길 트레킹과 해발 1,950m의 한라산에 올라 2010년 새해 첫 날의 일출을 맞는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그 터미널을 들렀었다.
나름의 여유시간이 있어, 터미널 곳곳을 둘러보던 중에, 내 눈에 특별히 띄는 풍경이 하나 있었다.
KAC한국공항공사에서 설치해놓은 ‘문학자판기’라는 시설물이었다.
그 시설물에는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걸려 있었다.
‘공항에서 감성을 충전하다’
버튼을 누르면, ‘긴 글’과 ‘짧은 글’이 제공된다고 안내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었으니, 아껴둘 이유가 없겠다싶었다.
버튼을 눌러, 우선 부담 없겠다싶은 짧은 글을 하나 뽑았다.
그 제목이 이랬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다음은 정강명의 글에서 인용했다는 그 대목 전문이다.
“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요. 영원히 당신 곁에 있겠어요. 그이를 살려주시기만 한다면.”
사랑의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 뽑혀져 나온 글은 이슬아의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라는 글이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불안하지 않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자연스레 드나들기까지 그간 많은 언어가 필요했다. 언어가 잘 만나졌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말을 하지 않을 영기를. 어느 순간 아무 말 안하고도 우리는 너무 괜찮을 수 있다.’
우리들 일상에서 숱하게 경험했으면서도, 어물쩍 그냥 넘기고 했던 상황을, 그 작가는 글로써 명쾌하게 정리해놓고 있었다.
딱 마음의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성에 안 찼다.
다시 한 번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긴 글’ 버튼이었다.
그래서 뽑아져 나온 글을 보면서, 내 ‘아니, 이럴 수가!’라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뽑혀져 나온 글은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의 한 대목이었다.
다음은 그 글 전문이다.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제 모양과 같이 뭉툭한 철필 끝으로 꾹꾹 눌러 쓴 글발은 굵다란 획마다 전기가 통해서 꿈틀거리는 듯, 피봉을 뜯는 여신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주신 글월을 반가이 받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실례한 것은 이 사람이었소이다. 남자끼리였으면 하룻밤을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영신 씨의 사정을 보느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러한 의미 깊은 모임에 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오는 토요일에는 교우회의 책임 맡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토요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법전’과 축구시합이 있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시합이 끝나면 시간이 늦더라도 백선생 댁으로 가겠으니, 그때 반가이 뵙겠습니다.
하는 사연이었다. 영신은 그 편지를 백씨에게까지 가지고 가서 보이고, 침상머리의 일력을 하루에 몇 번씩 쳐다보면서 그 다음 토요일이 달음박질로 동아로기만 고대하였다.
시합하는 날, 동혁은 연습할 때와는 딴판으로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신문사 같은 데서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도 늦더위가 대단해서 그런지 넓은 운동장에 구경꾼은 반쯤밖에 아니 찼다. 중학교끼리 대항을 하는 야구와도 달라서 응원도 매우 조용하게 진행이 되었다. 전반까지는 골키퍼인 동혁이가, 적군이 몰고 들어와서 쏜살같이 들여 지르는 볼을 서너 번이나 번갯불처럼 집어 던지고 그 큰 몸뚱이를 방패삼아서 막아 내고 한 덕으로 승부가 없다가, 후반에 가서는 선수 중에 두 사람이나 부상자가 생긴 데 기운이 꺾여서 ‘고농’이 세 끗이나 졌다.//
내가 놀란 것은 ‘동혁’이라는 주인공의 이름 때문이었다.
제주 트레킹 내내, 내 나름으로 ‘젖빛 그리움’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한 편 장편소설을 창작해볼 요량에서, 줄거리 구상을 쭉 해왔었고, 그 줄거리를 SNS에서의 내 글쓰기 공간인 우리들 ‘재경문경시산악회’ BAND와 페이스북에 그때그때 게시를 했었는데, 그 습작의 소설에 내가 주인공으로 내 세운 인물이 바로 그와 같은 이름인 ‘동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놀라운 필연이었다.
습작으로 쓴 소설의 줄거리가 모두 50편이었는데, 그 끝 편을 다 쓰고 난 뒤에, ‘상록수’의 주인공인 ‘동혁’과 만나게 되는 그 순간은, 내 창작의 의지에 불쏘시개가 되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장편소설 ‘젖빛 그리움’의 그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