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3월 17일
제 3제국이라 일컫어 지는 도이칠란트는 소련과 함께 모자이스크 앞에서 피터저라 공방전을 벌이고 인디아 전선에선 일본이 연합군과 임팔을 두고 수십번씩 주인이 바뀌는 싸움을 하고있을때.. 조선군은 다시 히로시마를 노리고 있었다. (허나 승산없는 공격이었다.)
1943년 3월 20일
조선제국 수도 한성부
"저.... 폐하?"
환관이 황제를 불렀다. 여담으로 환관들은 요즘엔 거세를 안한다고 한다. (사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담배를 재떨이에 지지고는 환관이 다시 말했다.
"저, 외무대신께서 오셨습니다... 주 핀란드 대사도 오셨구요....."
"들라 하게, 어서 오게나? 도데체 무슨 소식이길래 외무대신도 온겐가?"
"저...... 핀란드와의 평화조약이 깨졌습니다..."
"괜찮네... 그럴수 있는게지. 그럼 돌아가게"
하긴 소련만 움직이지 않으면 핀란드 따위 문제 없다. 그리고 소련도 모자이스크가 뚫리면 모스크바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는 못하리라...
1943년 3월 29일
육군의 진보형 사단들중 하나인 제 20 군단이 우창으로 소환됬다. 곧 제남 공격이 시작될것이다. 그때 이 군단들은 최선봉에 서게 될것이다.
1943년 3월 29일
조선군은 배치되자마자 제남공격을 시작했다. 일 연방 (앞으로 일본과 그 허수아비 정부들은 일 연방이라 칭함) 군은 3배나 되는 조선군에게 무너젔다. 일본군은 지연전을 펼치며 조선군의 사기를 꺾고 꺾어 제풀에 지치게 할려고 했지만 한사람당 세명씩 죽여야 하는 -게임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 망할 상황에서 일본군은 지연전의 의미를 잋고 있었다.
1943년 4월 2일
조선제국 령 후쿠오카
조선제국군 열도 원정 사령부
"애애애애앵----"
"피유우웅----"
"쾅! 쾅!"
일본군의 공세가 시작됬다. 조선군은 수적 열세에 이곳의 지형지물을 잘 아는 일본군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었다. 어느 병사들은 빨래하던 중 일본군 해병의 장갑차가 들이 닥쳤다며 열도 원정군은 가고시마로 물러갔다. 여기서 패배하면 적들의 바다에서 죽을것이다.
1943년 4월 6일
중원전선, 제남 - 우창 국경
"부우우웅---"
"저벅 저벅......"
조선군 초병들은 순간 자기가 헛것을 보는것이라 생각했다. 조선군 최강 신예부대 제 20군단 병력들이 너덜너덜해진 군복을 걸치며 - 패배로 인하여 옷이 찟겨졌다 - 어떤 녀석은 반쪽밖에 없는 군단기를 들고 어떤놈들은 뒤에서 트럭을 밀면서 돌아오는 것이다. 장도영 장군 역시 처음 타고나간 지프는 온데간데 없이 힘없는 걸음걸이로 기지까지 돌아갔다.
(△ 조선군의 대대적인 재 배치가 시작됬다. 해외 - 페르시아 - 에 파견됬던 제 1 해병군단도 귀환하고 있다. 무엇보다 산악지방 타이위안 공격을 위해 해안 수비를 하던 산악군단도 총 소집되어 다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943년 4월 11일
제남은 중국의 임팔 이었다. 거듭된 공격에 어느 언덕이 평지로 변하고 어디는 땅굴이 만들어 졌다. 그통에 죽어나간건 가난하지만 부족함 없이 살아가던 제남의 민간인 이었다. 그들이 군을 바라보는 시선은 항상 '나쁨' 이었다. 그와중에 조선군 병사 하나가 그냥 소년이 쓴 일기를 발견했다.
'오늘은 일본군이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선군이 있었다. 두 나라는 왜 싸우는걸까? 어린 나도 친구랑 안싸우는데 어른들은 왜 싸우는걸까?'
1943년 4월 18일
제 7차 민의원 선거, 이쯤되면 민주당이 어디까지 차지하나를 보는 '쇼' 에 불과했다. 민주당은 부정투표 의혹 속에서도 기어코 7선에 성공했다.
1943년 4월 19일
지구 반대편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옛 노르웨이 지역, 트론헤임은 비행장과 해안요새 덕에 올래순과 로도스의 영국군이 합공을 하게 만들었다.
1943년 4월 26일
지금 부터 우리 조선제국의 협조인들을 이용하여 해외의 전선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유럽 서부전선 - 캉 폭격
이곳은 김 씨 (25) 가 파견되어 도이칠란트 내의 민주세력과 함께 수집한 자료다.
'현재 옛 프랑스 영토인 캉에는 미국군 육군항공대의 폭격기가 매일매일 도이칠란트 영토를 두들겨 대고 있다합니다. 폭격이 끝나고 현장에 가보니 시신이 널브러저 있었습니다. 이곳은 물도, 음식도, 희망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러시아 전선 - 모스크바 일대의 전선고착
이곳은 외국계 인사 이 씨(23) 가 투입되어 소련군인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들었다.
'현재 모자이스크 를 중심으로 연일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반 코제트스키 병장 (30) 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그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독일 자식들, 우리 러시아를 얕보다 큰코 다쳤다."'
공식 자료 - 인디아 전선
해외공관 제공
'현재 임팔은 지옥입니다. 현재 임팔은 지옥이라구요. '
1943년 5월 4일
일본군이 허를 찔렀다. 주력군이 산동 쪽으로 간걸 알고 기습을 했다! 간신히 얻은 제남땅을, 피흘려 얻은 제남땅을 일본에게 넘겨줘야했다. 조선군 인생이 왜 이리 험하단 말인가?
1943년 5월 7일
중화민국 타이위안
"오... 여기가 타이위안이군, 여자는 별로 없는것 같아."
"야, 작작해라. 남경 대학살때 니가 제일 많이 했거든?"
"사돈 남말하시네, 넌 어떻고?"
"뭐! 으억!"
조선군의 기습이 시작됬다. 기갑사단의 전차들은 일찌감치 언덕 오르기를 포기하고 포사격만 해댔다. 보병은 그 지옥같은 산들을 기어올랐고 말이다. 게다가 다른 사단들도 같은 사정인지라 일본군은 혼비백산이었다. 크리거 후작이 오랬만에 공을 세웠다며 한마디 던졌다.
"황하만 넘자! 그러면 탄탄대로다!!!!!!!"
1943년 5월 9일
조선제국령 우창
"젠장! 장군님! 적군입니다! 수치상으로 5배입니다!"
"뭐? 도데체 그 장군이 누구래냐? 뉘집애래?"
"히가시..쿠니라는 놈입니다!"
".... 우선 버텨! 아군 사단들이 제남에서 말라버릴수는 없잖나?"
"네!!"
1943년 5월 28일
연안을 빼앗겼다. 현재 전선 옆구리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1943년 5월 28일
조선군의 공격은 주야를 가리지 앉았다. 옌타이 일본군을 섬멸하는 공격이 개시됬다.
(△ 조선, 이제는 전자계산기 강국이다.)
1943년 6월 13일
일본제국 령 제남
"아..아.. 모든 황군은 개봉,쉬주,롄원강,칭다오로 철수하라"
"네?"
".... 자네, 현재 조선군이 몰려온다네.... 튀어야 산다네!"
"그래서..."
"전군을 철수시켜야지, 내 지프가져와, 아님 군용을 뺏어도 뭐라 앉겠네."
1943년 6월 14일
일본제국령 칭다오
"쉿! 포병이다... 전 중대 원진으로 포위!"
"와아아!!!!"
"탕-탕- 타다다다"
조선군은 이날 전 사단들이 일본군을 포위하여 사기를 땅바닥으로 떨어트려놨다.
1943년 6월 15일 연안 탈환전이 시작되었다. 대장 도조 히데키는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연안에서 빠져나갔다는 소문 탓에 일본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1943년 6월 17일
제남 탈환전이 개시됬다. 적장은 히가시쿠니, 비록 패배가 많은 장군이나 뛰어난 전술가였다. 황하에서 일본군은 거세게 싸웠다.
1943년 6월 18일
조선군 총 참모부가 긴급히 회군은 시작했다. 일본군의 공격이었다. 25개 사단의 인생을 여기서 망칠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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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일본 동북부 와 관동 대지진 으로 발생한 사망자 분들께 명복을 빕니다...
여담으로 히가시쿠니는 레알 명장이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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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쿠니가 진짜 명장임 ㅍㅠㅠ
대체 가고시마에는 병력을 왜 두는거져?.........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걍 일본 본토에서 빼고 2주 후에 공격하는게 더 쉬워질듯..
음.... 그것이 일본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좀 근심.... 이 많은 편이 걸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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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파워씨 쳐서
정답입네다
가고시마에는 3개 사단 정도만 두고, 후쿠오카에 10개 사단쯤 두면 뭐가 와도 안 뚫릴 겁니다. 잠수함 좀 돌리면 건너오다가 끊기고.
마찬가지로 육군으로 히로시마를 치는 것 또한 적함에 해로가 끊겨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 차라리 본토에 상륙 한번 날리시는게..
오.... 근데 현재 운용가능한 수송함이 없습니다. 뽑는중....
ㅎ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