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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07월 19일 년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
인류최대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미국은 우방국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의외로 일부 이탈하는 우방이 생겼다. 우선 영국 정부는 미국의 보이코트에 적극 동참하려 하였지만, 영국올림픽위원회가 반기를 들었고 결국 참가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호주 등이 선수단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입장 때 자국의 국기를 들지 않고 입장하는 방식으로 항의의 표시를 하였으며 그 수는 16개국에 이르렀다. 또한 중소국경분쟁으로 중공도 불참했다.
소련의 모스크바와 미국의 로스엔젤레스가 주최신청을 해온 가운데 1974년 10월,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제22회 올림픽 개최지를 소련의 모스크바로 정했다. 8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옛 도시로 널리 알려진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인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되고 있다.
미국은 우방국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의외로 일부 이탈하는 우방이 생겼다. 우선 영국 정부는 미국의 보이코트에 적극 동참하려 하였지만, 영국올림픽위원회가 반기를 들었고 결국 참가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호주 등이 선수단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입장 때 자국의 국기를 들지 않고 입장하는 방식으로 항의의 표시를 하였으며 그 수는 16개국에 이르렀다. 또한 중소국경분쟁으로 중공도 불참했다.
소련의 모스크바와 미국의 로스엔젤레스가 주최신청을 해온 가운데 1974년 10월,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제22회 올림픽 개최지를 소련의 모스크바로 정했다. 8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옛 도시로 널리 알려진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인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되고 있다.
소련은 1975년 3월부터 올림픽 준비위원회를 세워 올림픽을 위한 적극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대형 체육장은 50여 개로부터 70여 개로 증가됐고 수영장도 30개에서 60여 개로, 체육관 역시 300여 개나 증가되는 등 경기장 건설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건축과 교통운수업도 뒤질세라 발전을 다그쳤으며, 올림픽대회를 주최하기 위해 소련은 90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며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듯 소련은 최고 최대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모스크바올림픽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회원국 147개국 중 81개국 선수 5326명만이 출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총 5615명의 기자가 모인 모스크바올림픽 역시 선수보다는 기자가 많았던 한차례의 올림픽으로 기록됐다.
1949년 7월 19일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1947년 7월 19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암살되었습니다.
👉🏿 해방당시 국내 정국을 주도했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여운형 선생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에서 한지근에 의해 피살됐다. 향년 61세였다.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여운형은 식민지시대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서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29세 때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에 수학했으며 김규식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당수로 일했다.
1919년 11월에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동경제국호텔에서 일본 지도자에게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했으며 그 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 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 출옥 후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장 등의 일을 맡으면서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어 인민당 당수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2009년독일 아우토반 259중 추돌사고 발생
👉🏿 2009년 7월 19일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인 독일 아우토반에서 259대의 자동차가 연쇄 추돌하는 사상 최대 사고가 발생했다.
19일 오후 하노버에서 페이테 구간의 아우토반에서 259중 추돌 사고가 발생해 10명이 중상(重傷)을 입고 66명이 다쳤으며 중상을 입은 10명은 위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사고는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들이 폭우에 미끄러지면서 발생했다. 날도 어두워 운전자들이 앞서 추돌한 차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속도를 유지해 대형 사고가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백대의 자동차가 엉켜있는 사고 현장에는 300여대의 구급차와 소방차가 출동해 밤새 구조작업을 벌였다.‘고속 운전자들의 최후 피난처’로 불리는 독일 아우토반의 너비는 18.5~20m이며,총연장1만2000㎞에 이른다.
▶2001년 헌법재판소, 전국구 선출방식 위헌 결정
👉🏿 헌법재판소(헌재)가 2001년 7월 19일 선거법의 비례대표(전국구) 의석 배분 방식(189조 1∼7항)과 기탁금 납부조항(56조 1항 등) 등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현행의 비례대표제가 유지되는 한, `1인 1표제`도 위헌이라는 한정(限定) 위헌 결정도 함께 내렸다. 따라서 일정 득표를 못하면 기탁금을 국고에 귀속하도록 한 조항(57조 1항 등)과 지역구 득표비율에 따라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토록 한 조항 등도 자동적으로 효력을 잃게 됐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조순형 의원 등은 이 같은 선거법 조항이 위헌이라며 2000년 2월 헌법소원을 냈었다. 헌재의 위헌 결정에 따라 앞으로 비례대표제를 유지하려면 지역구 의원과 정당에 대한 투표권을 함께 주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인 `1인 2표제`로 하거나, `1인 1표제`를 유지하려면 비례대표제를 없애는 방향으로 선거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헌재가 현행 비례대표제 방식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이같은 방식이 유권자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때문이다. 유권자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자가 엇갈릴 경우, 어느 쪽을 기준해서 투표하든 절반의 선택권은 뺏길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국회는 10월 4일 본회의를 열어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국회의원 지역구 후보자 등록 때 2000만원을 기탁하도록 한 조항`을 완화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기탁금을 현행 2000만원에서 1500만원으로 낮추고, 기탁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요건도 유효투표 총수의 100분의 20에서 100분의 15이상 득표한 경우로 완화하는 개정안이 통과되자 군소정당과 시민단체는 헌재의 위헌 취지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발,
다시 헌재에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1999년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 발표`(그룹해체 시작)
👉🏿 정주호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장병주 대우 사장이 1999년 7월 19일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을 발표해 이른바 대우그룹사태가 시작됐다. 발표는 대우그룹 해체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발표의 주요 골자는 1.김우중 회장은 그룹 구조조정을 조기 완결하고 자동차 부문을 정상화한 후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2.대우그룹은 자동차 중심의 전문그룹으로 재편하고 3.대우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 8조8천억원어치와 김우중 회장의 교보생명 지분 150만주 등 김회장 개인재산 1조3천억원어치를 합한 총10조원 규모의 추가담보를 채권단에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우그룹 채권단은 이날 채권단회의를 열어 대우그룹에 4조원의 신규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기업어음과 회사채 등 11조여원의 단기여신 만기를 6개월간 연장해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채권단은 8월 16일 다시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을 체결해 대우그룹은 본격적인 그룹해체 단계에 들어갔다.
25개 계열사, 8만여명의 종업원을 둔 제2의 재벌이 전망이 불투명한 자동차 소그룹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워크아웃 대상 계열사 사장단 14명과 함께 11월 1일 공식 사퇴했다.
▶1992년김달현 북한 부총리, 판문점 경유 서울도착
▶1989년야루젤스키, 폴란드 대통령에 선출
▶1988년납북-월북작가 1백여명의 해방전 문학작품 출판 허용(해금)
▶1985년부산 지하철 1호선 개통 (동래구 청룡동∼부산진구 범7동 광장간)
▶1982년한국-자메이카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킹스턴)
▶1981년김환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1년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전 우승
▶1980년은행-보험-증권기관 임직원 431명 숙정
▶1980년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
▶1979년김진호(女),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60m 더블라운드 세계신기록 수립
👉🏿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언론도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 "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서향순, 1988년 김수녕, 1992년 조윤정, 19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1977년등소평 복권
▶1967년김도연 박사 별세
▶1965년이승만 전 대통령 하와이서 별세
👉🏿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 간부로 활약했다.
1910년 일본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귀국해 이상재 등과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기독교 학원과 독립 군관 학교를 세웠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초대 대통령에 추대됐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됐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조항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됐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 마우나라니병원에서 요양 중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이승만 명예훼손’ 다큐 ‘백년전쟁’ 제작진, 2심도 무죄 판결
https://m.seoul.co.kr/news/newsView.php?cp=seoul&id=20190627500114&wlog_tag3=naver
▶1962년미국 나이키제우스 미사일, 가상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요격 성공
▶1962년美 건물 13층 높이의 `맘모스`기구 발사에 성공
▶1957년미국 네바다서 원자로케트탄 첫 실험
▶1956년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한국 등의 유엔가입 촉구에 관해 언급
▶1952년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1951년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5명에 사형 판결 (8월13일 집행)
▶1950년미국 국무성, 한국사태에 미국정책(한국백서) 발표
▶1949년프랑스, 라오스 독립 승인
▶1947년여운형 피살
▶1938년최초의 우리말 사전(문세영) 발간
▶1933년계초 방응모,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24년조선일보, 편집방침을 변경(1면에 뉴스를 게재)
▶1920년코민테른 제2회 세계대회 개최
▶1907년고종 강제퇴위(양위조칙 발표)
▶1870년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1864년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의 함락으로 태평천국의 난 종식
▶1859년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한 언더우드 선교사 출생
▶1848년美 뉴욕주 세니카폴스서 `여성권리대회` 개막
▶1846년최초의 광도성표인 하버드 광도측정법을 확립한 미국의 물리학자 피커링 출생
▶1840년칠레의 대통령(1889-91) 발마세다 출생
▶1834년프랑스 화가 드가 출생
▶1455년세조, 단종 폐위하고 즉위
https://youtu.be/9tW56iK2P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