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월25일 목요일★
어느덧
한달이 훗딱인듯 싶다
왜! 혼자 만 그리 느끼냐고 ....?
오늘이 벌써 !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연금이 여기저기서 통장으로....
나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 연배는 국가에서...
(좋은시대에 살고있다고 해야되나!)
요양보호사인 동생에게
가끔 그 대상자들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어느 아는이 이야기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풍경인듯...
해서다
70대 후반의 지인이 지난해
늦여름 넘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졌다.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그곳에선 장기간 입원을 할 수 없어
서울 강남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다 두 계절을 보내고
며칠 전 퇴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입원기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병문안도 제한돼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거나 가끔
먹거리를 보내드릴 뿐이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지인은
병상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인에 따르면 70∼90대의
노인들이 모인 요양병원에서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박사건 무학이건,
전문직이건 무직이건,
재산이 많건 적건 상관이 없단다.
누구나 똑같이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있는 그곳에서는
안부전화가 자주 걸려오고
간식이나 필요한 용품들을
많이 받는 이가 ‘상류층’이란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받은
간식과 생필품을 의료진이나
같은 병실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병실 계급은
그렇게 좌우된단다.
“옆자리의 할머니는 밖에서
교장 선생이었고
아들도 고위 공무원이라는데,
사과 몇알은 커녕 전화도
거의 안 오더라.
그래서인지
내가 받은 과일이나
간식을 나눠주면
너무 감사하다면서도
민망한 표정을 지었어한다
내가 그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야단이라도 치고 싶었다니까.
몇달 아파서
요양병원에서 지내보니
왕년의 직함이나 과거사는
다 부질없더라고.”
지인의 말을 듣고 나도
깨달은 바가 컸다.
과거에 연연하거나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에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오늘에 충실하면 된다.
그런데 그 ‘오늘’은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내 주변인,아는이 들,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친구나 친척들에게 안부전화나
문자를 보내는 일,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
말년을 풍성하고
풍요롭게 보내는 보험이다.
그 보험은 전략이나 잔머리로
채워지지 않는다.
진심과 성의라는 보험료를
차곡차곡 모아야만
행복한 말년이라는 보험금이
내게 돌아온다.
반대로 자녀에게 공부나
성공만을 강요한 부모,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눈곱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늘 따지기만 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고독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모두가 100세까지 행복하게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랑하는이 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삶을 마감할 가능성은 오히려
매우 낮다.
대부분은 병상에서,
혹은
양로원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심지어 홀몸으로 쓸쓸히
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노후에 내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눠줄 이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노후의 행복이다.
결국
노후의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관계’ 다.
순간순간
기뻐하고 감사하자
그 순간 순간이 모여서
인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