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 전재용 선장과 보트피플 -
옛 수영비행장이 지금의 김해로 옮겨간 후 공항자리는 상당기간 허허로운 벌판으로 방치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임시목적의 가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어지럽게 들어섰다. 그때 수영강에 가까운 재송동 그 자리에 오갈 데 없는 보트피플들의 임시수용소가 마련되었다. 공산화된 베트남을 배로 탈출한 난민들을 인접한 국가들은 입국을 거부했고 지금의 탈북자들이 중국 땅에서 잡혀 북으로 끌려가듯 강제소환 등으로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1993년인가 사무실 직원 10여명은 인보활동으로 가까이 있는 부산의 보트피플을 찾아보기로 했다. 옷가지들은 집에서 입지 않는 것들을 각자 가지고 오기로 했고 자유시장에서 박스 떼기로 파는 신발과 라면도 몇 박스 회사의 봉사차량에 실었다. 그날 현장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그곳 근무자들로부터 의외의 얘길 들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예비역 중령이 책임자로 봉사하고 있었고 여자 통역사도 있었다.
난민들이 하나같이 게으르고 낭비벽이 심해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했다. 전기는 켤 줄만 알았지 끌줄을 전혀 모르고 수도꼭지도 잠글 줄을 모른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온정이 많아서였던지 그땐 금품이 많이 답지한다는 보도는 우리도 접하고 있었다. 국제시장에 나가 전기스토브도 사다가는 전기를 흥청망청 써서 근무자들이 열 받은 걸 방문객인 우리를 잡고 하소연했다. 우린 그 당시 크게 실망했고 방문대상을 잘못 정한 내가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껴야 했었다.
그러고 공산화된 베트남도 개방을 해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직접 베트남을 찾아가 만났던 그들의 근면성은 결코 우리에게 뒤지지 않음을 본 후론 난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세월호엔 온 국민들이 원망하며 저주까지 퍼붓는 이준석 선장이 있었다면 참치잡이 원양어선 ‘광명87호’엔 국민들의 눈가를 촉촉이 젖게 만드는 전재용 선장이 있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눈물겨운 감동스토리 영상을 원하시면 카톡으로 별도로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