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릴케의 편지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의 2월 24일 자 편지에 겨우 오늘에야 인사드리게 된 것을 용서하십시오. 줄곧 몸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병을 앓는 것은 아닙니다만 인플루엔자에 걸린 것처럼 나른한 기가 빠지지 않아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마침내 이 남국의 해안으로 온 것입니다. 전에도 한번 이곳에 와서 좋아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몸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기가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짧은 편지를 실은 더 긴 것으로 여기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당신의 편지는 언제나 기꺼이 받아 봅니다. 이 점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다만 답장에 있어서는 당신이 곧잘 허탕을 칠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쪼록 관대하게 보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결국에 있어서 그리고 바로 가장 깊고 가장 중요한 일에 있어서 그야말로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충고를 한다거나, 나아가 돕거나 할 수 있으려면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또한 많은 것이 성공해야 하고 사물의 완전한 질서 체계가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일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에 지배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비창조적인 순간에는, 창조적인 순간에는오히려 삶을 파악하는 수단의 하나로 그것을 이용해보십시오. 순수하게 쓴다면 아이러니 또한 순수합니다. 결코 이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러니에 너무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면, 아이러니와 친밀도가 깊어지는 것이 두려워진다면 그때에는 아이러니가 그 앞에 서면 보잘 것 없고, 듬직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릴 그런 위대하고 진지한 대상으로 눈을 돌리십시오. 사물의 깊이를 추구하십시오. 아이러니는 결코 거기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위대함의 가장자리까지 갔을 때 이 파악의 방법이 당신 본질의 필연성에서 나오는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진지한 사물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아이러니는(그것이 우연적인 것일 때) 당신에게 이탈하든가, 아니면(그것이 진실로 당신의 천성적인 것이라면) 한층 진지한 도구로 강화되어 당신의 예술을 형성하는데 없어서 안 될 갖가지 수단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당신에게 말씀드리고자 한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책 중에서 제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은 극히 소수입니다. 그리고 제가 어디에 있든 제 짐 속에 있는 것은 두 권 뿐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도 바로 제 곁에 있는데 한권은 성서이고 다른 한 권은 덴미크의 위대한 시인 엔스 페테르 야콥센의 책입니다. 당신은 그의 작품을 알고 계시는지요.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 일부가 레클람 문고 가운데 매우 매우 좋은 번역으로 나와 있습니다.
J. P. 야콥슨의 ‘여섯 단편’이라는 얇은 책자와 그의 장편소설 ‘닐스 튀네’를 구해서, 첫 번 째 책 처음에 나오는 ‘모젠스’라는 단편부터 읽기 시작하십시오. 한 세계의 행복이, 부가, 이해하기 어려운 위대함이 당신을 감쌀 것입니다. 잠시 동안 이 책속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에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책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랑은 몇천 배가 되어서 당신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설령 당신의 일생이 어떻게 되든, 그 사랑은 당신의 갖가지 경험이나 환멸, 기쁨 등의 모든 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실이 되어 당신 생성의 직물 사이를 꿰뚫어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창작의 본질에 대해서, 그 깊이나 영원성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은 누구의 덕인가. 그이름을 들라고 한다면 제가 말할 수 있는 이름은 오직 둘 뿐입니다. 위대한, 위대한 시인 야콥선과 현존하는 예술가 가운데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당신의 앞길에 모든 성공이 있기를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 1903년 4월 5일에 이탈리아 피사 근교의 비아레조에서 쓴 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