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판단과 분별 마태복음 7장 6절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우리 주는 비판하지 말라는 가장 엄숙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게 되리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며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혹평[가혹하게 비평함]하지 말라고 권면하시는 한편 분별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우리 자신을 심판자로 세우고 그 사람들에게 선언의 말을 하는 경향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의미로 판단하는 위험을 너무 피하려는 나머지 어떤 판단에 대해서든 분별을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권징과 같은 것이 없어질 것이며 기독교 생활은 혼란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이단을 들어내고 이것과 관련된 판단(비판)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단을 판단하는 일을 너무 두려워하는 나머지 이단에 대해 눈을 감아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오류가 이전보다 교회에 더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분별력을 구사하는 것 이것은 성경의 권장을 받고 있습니다.
분별력과 비판을 구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영들을 증명하고 시험해' 볼 수 있으며 뒤에 가서 권면하신 대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형제의 눈 속의 티를 제거하는 일을 돕는 문제를 다루어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올바르게 이 일을 하고 싶다면, 분별의 영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티와 들보를 알아보고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다루고, 취급하고, 분별하는 문제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가르켜 말씀함이 분명합니다.
진리는 거룩하며 진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이 거룩한 것, 이 진주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메시지, 천국의 메시지.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까? 기독교 진리를 불신자에게 제시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개와 돼지는 어떤 사람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까?
개는 마을의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이요,
바로 이 말은 치욕을 의미했고 우리가 기르는 애완동물의 뜻이 없었으며 사납고 위험한, 반 야생동물이었습니다.
한편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불결하고 울타리밖에 있는 모든 것을 표상했습니다.
이 두 용어는 '개' '돼지'에게 속하는 자로 서술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 복음서를 읽으시면 주께서 어느 두 사람이 똑같이 다르시지 않은 것을 아실 것입니다.
주께서 다루신 방법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나 표면적으로는 다릅니다.
나다니엘과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다루신 방법을 예로 들어봅시다. 어떤 차이가 있음을 즉각 보실 것입니다.
자기 의적인, 교만하고 독선적인 바리새인과 죄 중에 붙잡힌 여인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다른 것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23장에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주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어야 했던 헤롯, 병적이며 불건전한 호기심과 표적과 기사를 찾고 있던 헤롯의 질문을 받을 때, 주님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고 아예 말도 아니하려 하셨습니다(3절과 9절을 보십시오).
그런 다음 사도들의 실천을 보면 그들이 주와 꼭같이 행하여, 여기 이 명령을 수행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6절을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며 유대인들의 질시와 시기와 반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을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는 더 전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이것을 그들에게 계속해서 제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에서도 그의 행동이 정확히 같은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8:6절입니다. '저희가 대적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그들은 개와 돼지들처럼 거듭 등을 돌리고 반대를 하고 신성모독을 말하고 진리를 밟아 버렸습니다.
사도의 반응은, 그들로부터 돌아서 다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반대하며 진리를 바로 평가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등을 돌리고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여 이방인의 대사도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우선 본문은, 우리가 사람에게도 여러 유형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분별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함에 있어 기계적 방법처럼 비극적이며 비성서적인 것은 없습니다.
증거를 하고 증언을 하긴 해도 이것을 철저히 기계적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권면을 실현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증거가 아예 소용이 없다는 것과 그들이 성취하는 유일한 것은 일대 자기의 감정이라는 사실 말고도 이것은 철저할 정도로 비성서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보다 더 높은 특권은 없습니다.
요즈음 세일즈맨이 되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판매 심리학의 훈련과정을 이수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품을 팔려면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무언가 좀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판매원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며, 같은 물건이라도 사람이 다른 때에는 경우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할지 아니할지 판단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신약성경은 준비의 필요성을 항상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판단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리고 단순히 우리 자신의 증거와 증언을 하는 일에만 애쓰지 않는다면
분별과 이해가 중요함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더불어 우리는 모두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이방인들에게는 내가 이방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첫째 원칙은, 진리를 제시하는 방법을 매우 조심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제시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슬리지 않는 것이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스르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에 대해서든 불쾌하게 하는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항상 사랑 가운데서 전해야 합니다.
설사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거치는것'이 되어야 하겠고 설교자에게 불쾌하고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원칙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어떤 특정면이 어느 경우에서 적절한가를 배워 알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비신자는 다른 교리들을 토의하려 애쓸 때가 허다하겠지만 이것을 허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요한복음 4장의 주와 사마리아 여인과 대답의 기록은 이 점의 완벽한 실례가 됩니다.
그 여인은 여려가지 다른 문제들,
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어디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구별하는 여러 가지 차이점들을 토론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일을 허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녀 자신을 살피게 하셨습니다.
곧 그녀의 죄 많은 생활과, 그녀에게 구원이 필요함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선택과 예정과 기타 교리들과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불신자와 토론하는 일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인들에게 자기는 그들에게 고기를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고기를 갖고 있으나 그들이 아직 유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고기가 맞지 않기 때문에 젖으로 길러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고전 2: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완전한 지혜를 영적 깨달음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방향에서 분별력을 사용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진정코 진리의 증인과 제시자들이 되어야 할진대 이런 일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