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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이육사, 정지용, 윤동주, 백석, 김영랑, 한용운, 이상, 이상화, 임화, 이용악, 김동환
알렉산드르 야신
Aleksandr Yasin
Event Horizon II
2024
Acrylic, Canvas
Painting, 60 x 70 cm
□ 김소월(1902~1934) 시인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곽산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한시와 민요를 접하며 시적 감성을 키웠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시인 김억을 만나 영향을 받았다. 1920년 『창조』에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이후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진달래꽃」 등 서정시를 통해 민족의 한과 이별의 정서를 노래했다. 그의 시는 전통적 민요의 리듬과 서구 시형의 감각을 결합해 한국적 서정시의 전형을 세웠다. 1925년 출간된 시집 『진달래꽃』은 그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시집으로, 단아하고 절제된 언어로 민족적 슬픔과 사랑을 표현했다. 도쿄상업대학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후 생활고에 시달렸고, 1934년 12월 24일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소월시초』가 발간되며, 그는 오늘날 ‘한국 서정시의 상징적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알라딘 작가파일, 김소월.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먼 후일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안 잊었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든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초혼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맞이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나.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접동새
김소월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가며 슬프 웁니다
금잔디
김소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못 잊어
김소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편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김소월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나가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이육사(1904~1944) 시인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이가호와 허길 사이에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의 형제 중 다섯째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월북 이후 1950년대 초 숙청당한 이원조다. 어릴 때 조부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19년에 신학문을 접한 보문의숙을 졸업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상과에 입학해 7개월간 다녔다.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었다. 일본 경찰이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해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었다.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 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35년 정인보 댁에서 시인 신석초를 만나 친교를 나눴다. 같은 해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1940년 4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퉁(東廠胡同) 1호에서 옥사했다.
알라딘 작가파일, 이육사.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편집자주:
많은 사람이 흔히 쓰는 '넓을 광(廣)' 자를 생각하여 廣野로 오해하곤 하지만,
원문과 최초 발표본에 기록된 실제 한자는 '빌 광(曠)' 자를 쓴 曠野가 맞습니다.
曠野 (맞는 표기): 빌 광(曠) + 들 야(野)
'해가 넓게 비추어 아득하게 멀고 텅 비어 있는 벌판'을 뜻합니다.
이육사 시인은 단순한 물리적 넓이보다,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아무것도 없던
'아득하고 신성하며 텅 빈 공간'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 글자를 선택했습니다.
廣野 (틀린 표기): 넓을 광(廣) + 들 야(野)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면적이 넓은 들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원문 확인하기>
이 시는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에 의해 유고로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발표된 원문 제목 역시 曠野(遺稿)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육사의 시를 지칭할 때는 廣野가 아닌 曠野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껴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많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복판 용소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교목(喬木)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편집자주:
교목(喬木)은 식물학에서 줄기가 곧고 굵으며 높이가 크게 자라는
'큰키나무'를 의미합니다.
높을 교(喬) 자와 나무 목(木) 자를 사용하여
'높이 자라는 나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교목은 모진 바람과 세월을 견디며 우뚝 서 있는 나무로,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시인의 강인한 의지와 절대적인 저항 정신을 상징합니다.
파초
이육사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축여 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지막 날엔
기약 없이 흩어진 두 날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들의 잡아 못 논 소매 끝엔
고운 소금조차 아직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 번 눈 위에 그렸느뇨
차라리 천년 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빗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 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디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어지세
소년에게
이육사
차디찬 아침이슬
진주가 빛나는 못가
연꽃 하나 다복이 피고
소년아 네가 낳다니
맑은 넋에 깃들여
박꽃처럼 자랐어라
큰 강 목 놓아 흘러
여울은 흰 돌 쪽마다
소리 석양을 새기고
너는 준마(駿馬) 달리며
죽도(竹刀) 저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다녀도
분수(噴水) 있는 풍경 속에
동상답게 서 봐도 좋다
서풍 뺨을 스치고
하늘 한가 구름 뜨는 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노래 가락은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황혼(黃昏)
이육사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로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十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은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나의 뮤즈
이육사
아주 헐벗은 나의 뮤즈는
한 번도 기야 싶은 날이 없어
사뭇 밤만을 왕자처럼 누려 왔소
아무것도 없는 주제였만도
모든 것이 제 것인 듯 뻗대는 멋이야
그냥 인드라의 영토를 날아도 다닌다오
고향은 어디라 물어도 말은 않지만
처음은 정녕 북해안 매운 바람 속에 자라
대곤(大鯤)을 타고 나녔단 것이 일생의 자랑이죠
계집을 사랑커든 수염이 너무 주체스럽대도
취하면 행랑 뒷골목을 돌아서 다니며
보(褓)보다 크고 흰 귀를 자주 망토로 가리오
그러나 나와는 몇 천겁 동안이나
바로 비취가 녹아나는 듯한 돌샘 가에
향연(饗宴)이 벌어지면 부르는 노래란 목청이 외골수요
밤도 시진하고 닭소리 들릴 때면
그만 그는 별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고
나는 촛불도 꺼져 백합꽃밭에 옷깃이 젖도록 잤소
해후(邂逅)
이육사
모든 별들이 비취계단을 나리고 풍악 소리 바로 조수처럼 부풀어 오르던 그 밤 우리는 바다의 전당을 떠났다
가을꽃을 하직하는 나비 모양 떨어져선 다시 가까이 되돌아보곤 또 멀어지던 흰 날개 우엔 볕살도 따갑더라
머나먼 기억은 끝없는 나그네의 시름 속에 자라나는 너를 간직하고 너도 나를 아껴 항상 단조한 물결에 익었다
그러나 물결은 흔들려 끝끝내 보이지 않고 나조차 계절풍의 넋이 같이 휩쓸려 정치 못 일곱 바다에 미렸거늘
너는 무슨 일로 사막의 공주(公主) 같아 연지 찍은 붉은 입술을 내 근심에 표백된 돛대에 거느뇨 오 ㅡ 안타가운 신월(新月)
때론 너를 불러 꿈마다 눈 덮인 내 섬 속 투명한 영락(玲珞)으로 세운 집안에 머리 푼 알몸을 황금 정쇄족쇄(頂鎖足鎖)로 매어 두고
귓밤에 우는 구슬과 사슬 끊는 소리 들으며 나는 이름도 모를 꽃밭에 물을 뿌리며 머 ㅡ ㄴ 다음날을 빌었더니
꽃들이 피면 향기에 취한 나는 잠든 틈을 타 너는 온갖 화변(花瓣)을 따서 날개를 붙이고 그만 어디로 날아갔더냐
지금 놀이 나려 선창(船窓)이 고향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世紀)의 상장(喪章) 같애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운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의 분수령에 앞날의 깃발을 걸고 너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 정지용(1903~?) 시인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 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유학 시절에는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일본에서 귀국 후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했다. 1930년에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서 활동했고, 1939년에는 《문장》의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라딘 작가파일, 정지용.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ㅡ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ㅡ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ㅡ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 도란거리는 곳,
ㅡ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백록담
정지용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국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국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나만(爛漫)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白樺)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白樺)처럼 휠 것이 숭업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ㅡ 움매ㅡ 울었다. 마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ㅡ 솨ㅡ 솔고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넝쿨 기어간 흰돌배기 꼬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범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 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국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카페 · 프란스
정지용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 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 간다.
"오오 패롤(앵무) 서방! 굿 이브닝!"
"굿 이브닝!" (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도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 ㅡ 턴 밑에서 조시는구려!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휘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빰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경사(更紗) 커튼:
시에 등장하는 [경사(更紗)]는 화려한 무늬가 프린트된 서양식 '사라사 천'을 의미합니다.
작품 속에서는 이국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사용됩니다.
유리창 1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불사조
정지용
비애! 너는 모양할 수도 없도다.
너는 나의 가장 안에서 살었도다.
너는 박힌 화살, 날지 않는 새,
나는 너의 슬픈 울음과 아픈 몸짓을 지니노라.
너를 돌려보낼 아모 이웃도 찾지 못하였노라.
은밀히 이르노니 ㅡ (행복)이 너를 아조 싫어하더라.
너는 짐짓 나의 심장을 차지하였더뇨?
비애! 오오 나의 신부! 너를 위하야 나의 창과 웃음을 닫었노라.
이제 나의 청춘이 다한 어느 날 너는 죽었도다.
그러나 너를 묻은 아모 석문도 보지 못하였노라.
스사로 불탄 자리에서 나래를 펴는
오오 비애! 너의 불사조 나의 눈물이여!
나무
정지용
얼굴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우러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
아담의 슬픈 유산도 그대로 받었노라.
나의 적은 연륜으로 이스라엘의 이천년을 헤였노라.
나의 존재는 우주의 한낱 초조한 오점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어 입을 잠그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못 박히신 발의 성혈에 이마를 적시며 ㅡ
오오! 신약의 태양을 한아름 안다.
은혜
정지용
회한도 또한
거룩한 은혜.
깁실인 듯 가느른 봄볕이
골에 굳은 얼음을 쪼기고,
바늘 같이 쓰라림에
솟아 동그는 눈물!
귀밑에 아른거리는
요염한 지옥불을 끄다.
간곡한 한숨이 누게로 사모치느뇨?
질식한 영혼에 다시 사랑이 이실나리도다.
회한에 나의 해골을 잠그고져.
아아 아프고져!
별
정지용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 ㅡ 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실로 잇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 듯, 솟아나 듯,
불리울 듯, 맞어들일 듯,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한에 피어오른다.
흰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위에 손을 여미다.
소곡
정지용
물새도 잠들어 깃을 사리는
이 아닌 밤에,
명수대(明水臺) 바위틈 진달래꽃
어찌면 타는 듯 붉으뇨.
오는 물, 가는 물,
내쳐 보내고, 헤어질 물
바람이사 애초 못 믿을 손,
입맞추곤 이내 옮겨가네.
해마다 제철이면
한 등걸에 핀다기소니,
들새도 날러와
애닯다 눈물짓는 아침엔,
어울어 하롱하롱 지는 꽃잎,
설지 않으랴 푸른 물에 실려 가기,
아깝고야 아기자기
한창인 이 봄밤을,
촛불 켜들고 밝히소,
아니 붉고 어찌뇨.
□ 윤동주(1917~1945) 시인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 시절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제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알라딘 작가파일, 윤동주.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 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ㅡ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ㅡ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 ㅡ 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못 자는 밤
윤동주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산울림
윤동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애기의 새벽
윤동주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햇빛 · 바람
윤동주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반딧불
윤동주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디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 백석(1912~?) 시인
백석(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알라딘 작가피일, 백석
가즈랑집
백석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山)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山)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령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막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山)나물을 하는 그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 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초동일(初冬日)
백석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
돌절구에 천상수(川上水)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러갔다
하답(夏畓)
백석
짝새(뱁새)가 발뿌리에서 날은 논두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개구멍을 쑤시다 물큰하고 배암을 잡은 늪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석류
백석
남방토(南方土) 풀 안 돋은 양지귀가 본이다
햇비 멎은 저녁의 노을 먹고 산다
태고(太古)에 나서
선인도(仙人圖)가 꿈이다
고산정토에 산약(山藥) 캐다 오다
달빛은 이향(異鄕)
눈은 정기 속에 어우러진 싸움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우난곬족(族)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배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이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섦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차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부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비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고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늦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질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은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위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모닥불
백석
새끼 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미명계(未明界)
백석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鰍湯)집의 부엌은 뜨수할 것 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초롱이 히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별 사이에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행길에는 선장 대여 가는 장꾼들의 종이등(燈)에 나귀 눈이 빛났다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木鐸) 뚜드리는 집이 있다
정주성(定州城)
백석
산(山)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城)터
반디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김영랑(1903~1950) 시인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알라딘 작가파일,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젖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젓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언덕에 바로 누워
김영랑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 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이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이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대 감기었대
뉘 눈결에 쏘이었소
김영랑
뉘 눈결에 쏘이었소
온통 수줍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이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 구름 피워 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영랑
"오ㅡ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러와
누이는 놀란 듯이 쳐다보며
"오ㅡ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다리니
바람이 잦아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ㅡ매 단풍 들것네"
함박눈
김영랑
"바람이 부는 대로 찾아가오리"
흘린 듯 기약하신 님이시기로
행여나! 행여나! 귀를 종금이
어리석다 하심은 너무로구려
문풍지 설움에 몸이 저리어
내리는 함박눈 가슴 해어져
헛보람! 헛보람! 몰랐으료만
날더러 어리석단 너무로구료
눈물에 실려 가면
김영랑
눈물에 실려 가면 산길로 칠십 리
돌아보니 찬바람 무덤에 몰리네
서울이 천리로다 멀기도 하련만
눈물에 실려 가면 한 걸음 한 걸음
뱃장 위에 부은 발 쉬일까 보다
달빛으로 눈물을 말리까 보다
고요한 바다 위로 노래가 떠간다
서름도 부끄러워 노래가 노래가
쓸쓸한 뫼 앞에
김영랑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 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오월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만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 한용운(1879~1944) 시인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이다. 속명은 정옥, 법명은 용운, 호는 만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한문과 경전을 통달했고, 14세에 조혼했으나 집을 나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 등에서 불교를 공부하며 출가했다. 일본을 방문해 신문물을 접한 뒤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독립선언서 수정과 공약삼장 작성에 기여했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20년대에는 『유심』지를 창간하고, 1925년 시집 『님의 침묵』을 집필해 상징적 언어로 독립정신을 노래했다.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참여해 사회운동을 이끌었으며, 불교를 통한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1944년 영양실조로 입적했다. 그의 삶은 수행자이자 저항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이었다.
알라딘 작가파일, 한용운.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마차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저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별은 미(美)의 창조(創造)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系)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탐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는 잊고서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야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야 보았습니다
잊으라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야요
그태여 잊으라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야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나의 길
한용운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들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내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 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야는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름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예술가
한용운
나는 서투른 화가(畵家)여요. 잠 아니 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새암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적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의 가르쳐 주시든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合唱)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抒情詩人)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
해당화(海棠花)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를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이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꺼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찬송
한용운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서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에 봄바람이여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이상(1910~1937) 시인
1910년 9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명학교와 동광학교·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소설 「12월 12일」의 발표를 시작으로 이후 일문시 「이상한 가역반응」·「조감도」 등을 발표하는 등 본격적인 창작에 나서게 된다. 1933년 각혈로 배천온천에 요양을 가서 금홍을 만났으며, 서울에 돌아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녀와의 삶을 바탕으로 「지주회시」·「날개」·「봉별기」를 썼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발표하였으나 독자들의 거센 반발로 15편 연재로 그만두게 된다. 1935년에는 성천을 기행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산촌여정」과 「권태」를 내놓게 된다. 1936년에 『시와 소설』을 편집하였고, 「날개」를 발표하여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위독」·「동해」·「종생기」 등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10월에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실화」·「동경」 등을 창작하였다. 1937년 2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었으며,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알라딘 작가파일, 이상.
오감도(烏瞰圖)
이상
시 제1호
십삼인의 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이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사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오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육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칠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팔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구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십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십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십이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십삼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십삼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일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이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이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일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십삼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시 제2호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시 제3호
싸움하는사람은즉사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사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거울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ㅡ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꽃나무
이상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히생각하는것처럼열심히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소영위제(素英爲題)
이상
1
달빛속에있는네얼굴앞에서내얼굴은한장얇은피부가되어너를칭찬하는내말씀이발음하지아니하고미닫이를간지르는한숨처럼동백꽃밭내음새지니고있는네머리털속으로기어들어가면서모심듯이내설움을하나하나심어가네나
2
진흙밭헤매일적에네구두뒤축이눌러놓는자국에비내려가득괴었으니이는온갖네거짓말네농담에한없이고단한이설움을곡으로울기전에따에놓아하늘에부어놓는내억울한술잔네발자국이진흙밭을헤매이며헤뜨려놓음이냐
3
달빛이내등에묻은거적자국에앉으면내그림자에실고추같은피가아물거리고대신혈관에는달빛에놀래인냉수가방울방울젖기로니너는내벽돌을씹어삼킨원통하게배고파이지러진헝겊심장을들여다보면서어항이라하느냐
지비(紙碑)
이상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적어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내바라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부부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무사한세상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이끝끝내있다
이런 시(詩)
이상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카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 내어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 인가 본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 이상화(1901~1943) 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01년 4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그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5년 경성부의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에 학교를 중퇴하였고, 자퇴 직후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강렬하고 낭만적인 시를 노래하던 이상화는 1919년 3.1 운동 시위 행사를 준비 하면서 식민치하의 민족적 비애를 본격적으로 표현한다. 1937년 독립투사인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기 위해 북경을 향하던 중 일본 관헌에게 구금되어 고초를 겪는다. 1943년 초 갑자기 쓰러졌다가 그해 3월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 투병 중에 대구 자택에서 위암과 폐결핵,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43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교보문고 작가파일,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마음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난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이 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나의 침실로
이상화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노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두운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ㅡ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가시야,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 ㅡ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메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ㅡ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ㅡ
내 몸에 피란 피 ㅡ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ㅡ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임화(1908~1953) 시인
임화(본명 임인식, 1908~1953)는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월북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서울 낙산에서 태어나 십대 시절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경성 거리를 방황하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다. 20세 무렵 영화 [유랑]과 [혼가]의 주연 배우로 활동하며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렸다. 1929년 일본으로 유학해 연기와 문학을 공부한 뒤 1932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지도자가 되어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에 매진했다. 1938년 첫 시집 《현해탄》을, 1940년 평론집 《문학의 논리》를 출간하며 문학적 입지를 굳혔다. 해방 후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며 박헌영을 열렬히 추종했고, 1947년 월북했다. 한국전쟁 중 남한에 잠시 들어왔다가 인민군 퇴각 후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으며, 1953년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전복 음모와 미국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임화는 예술적 재능과 정치적 열정, 그리고 비극적 삶이 맞물린 대표적 근대 문인으로 평가된다.
교보문고 작가파일, 임화.
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의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었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권연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과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ㅡ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ㅡ 오빠의 강철 가슴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ㅡ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ㅡ 그래도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투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러을 내쫓겨 봉투 꽁무늬를 뭅니다.
지금 ㅡ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ㅡ 그러니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에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섧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밤을 새어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ㅡ 누이동생.
네 거리의 순이(順伊)
임화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현해탄(玄海灘)
임화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람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대마도를 지나면
한 가닥 수평선 밖엔 티끌 한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해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
몬푸랑보다 더 높은 파도,
비와 바람과 안개와 구름과 번개와,
아세아의 하늘엔 별빛마저 흐르고,
가끔 반도엔 붉은 신호등이 내어 걸린다.
아무거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첫 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
둘째 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느티나무 아래 전설과,
그윽한 시골 냇가 자장가 속에,
장다리 오르듯 자라났다.
그러나 인제
낯선 물과 바람과 빗발에
흰 얼굴은 찌들고,
무거운 임무는
곧은 잔등을 농군처럼 굽혔다.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가여운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敗北)에 울었다.
ㅡ 그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오로지
바다보다 모진
대륙의 삭풍 가운데
한결 같이 사내다웁던
모든 청년들의 명예와 더불어
이 바다를 노래하고 싶다.
비록 청춘의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 다 땅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상장을 내린 일은 없었다.
오늘도 또한 나 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삼등 선실 밑 깊은 속
찌든 침상에도 어머니들 눈물이 배였고,
흐린 불빛에도 아버지들 한숨이 어리었다.
어버이를 잃은 어린 아이들의
아프고 쓰린 울음에
대체 어떤 죄가 있었는가?
나는 울음소리를 무찌른
외방 말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오오! 현해탄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청년들아!
그대들은 조약돌보다 가볍게
현해의 큰 물결을 걷어찼다.
그러나 관문 해협 저쪽
이른 봄바람은
과연 반도의 북풍보다 따스로웠는가?
정다운 부산 부두 위
대륙의 물결은,
정녕 현해탄보다도 알았는가?
오오!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1890년대의
1920년대의
1930년대의
1940년대의
19XX년대의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별이 그대의 이름을 비칠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쫓던 실내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도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3월 1일이 온다
임화
언 살결에
한층
바람이 차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 오는 날
봄보다도
먼저
3월 1일이
온다
불행한
동포의
머리 위에
자유 대신
'남조선 민주의원'의
깃발이 늘어진
외국 관서의
지붕 위
조국의 하늘이
각각으로
내려 있는
서울
우리는
흘린 피의
더운 느낌과
가득하였던
만세 소리의
기억과 더불어
인민의 자유와
민주 조선의 깃발을
가슴에 품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 오는 날
봄보다도
일찍 오는
3월 2일 앞에
섰다.
깃발을 내리자
임화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商館)의
늙은 종들이
광목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廢) 왕궁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 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 이용악(1914~?) 시인
1914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에서 태어났다. 1932년에 도일하였고 1935년 3월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7년 도쿄 산분샤三文社에서 첫 시집 『분수령』을 발표하고 1938년에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다. 1939년에 귀국하여 다수의 잡지,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1943년에 모종의 사건으로 칩거에 들어갔다. 해방 후 1947년 아문각에서 『오랑캐꽃』, 1949년 동지사에서 『이용악집』을 발간했다. 1950년에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과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의 서울 점령에 의해 풀려나 월북한다. 1955년에 민주청년사에서 산문집 『보람찬 청춘』을, 1957년에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리용악 시선집』을 발간했다. 1963년에는 공역으로 『풍요선집』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에서 발표했다. 1971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알라딘 작가파일, 이용악.
오랑캐꽃
이용악
ㅡ 긴 세월을 오랑캐와 싸흠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보면 너의 뒤ㅅ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뒤ㅅ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안악도 우두머리도 돌볼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처 드러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혀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니어 흘러 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방울 받지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몰으는 오랑캐꽃
두 팔로 해ㅅ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보렴 오랑캐꽃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이용악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려할 뿐
잠들지 마라 우리의 강아
오늘 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 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 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재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우렀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운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이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 속을 기어간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 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하늘만 곱구나
이용악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두 손 오그려 흑흑 입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 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마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잖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때 강을 건널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앗겼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가 갸 거 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꼬리를 씹으며 꺼무테테한 아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추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는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그리움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것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김동환(1901~?) 시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경성보통학교와 중동중학교를 마친 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함북 나남의 북조선일일보(北鮮日日報),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1924년 『금성』 3호에 「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북청물장수」, 「옛날의 터전」등을 발표하고, 1925년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표하면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같은 해에 또 다른 장편서사시집인 『승천하는 청춘』을 발간해서 서사시적 전통이 미약한 우리 근대시문학에 호흡이 긴 서사시의 바탕을 마련했다. 1925년 8월 조선프로예맹 설립에 가담했고, 1926년 12월 조선프로예맹 임시 총회에도 참가했다. 1927년 2월 사회주의 연극운동 단체 불개미 극단의 창립 위원이 되었고, 5월 중앙청년회관에서 문예시대사 주최 강연회에 김기진, 최서해 이익상 등과 함께 참가했다. 1928년 4월 카프 개성 지부에서 애국문학을 주창한 김동환의 비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비판하고 그 징계를 요구함으로써 조선프로예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29년에는 이광수(李光洙), 주요한(朱耀翰)과 함께 합동시집인『시가집』을 냈고, 1942년에는 시집『해당화』를 펴냈다. 한편 1929년 종합월간지『삼천리』와 문학잡지 『삼천리문학』을 창간해서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친일 경력이 문제가 되어 이광수,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반민법에 회부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교보문고 작가파일, 김동환.
국경의 밤
김동환
제1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巡査)가
왔다 ㅡ 갔다 ㅡ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ㅡ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處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ㅡ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재실이 벌부(筏夫) 떼 소리언만.
3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 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處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달을 쓸어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ㅡ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끊는 소리언만.
4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 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을 부르면서.
5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깜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벌에는
외아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處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 놓으면서.
북청(北靑) 물장수
김동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사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출처] 한국인이 좋아는 대표 시인의 대표시 모음 / 김소월, 이육사, 정지용, 윤동주, 백석, 김영랑, 한용운, 이상, 이상화, 임화, 이용악, 김동환|작성자 나는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