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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는 나그네 모습
♣ 옛날 거리측정단위 보(步) ♣
진시황이 전국을 평정한후 통일한 것 중 하나가 길이.넓이,부피,무게 등의 단위인 도량형(度量衡) 이지요
만약 도량형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지역마다 정보의 편차가 심하고 이는 전국을 통치하는데
혼란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도량형의 통일은 이런 정치적 목적에서 시작 되었지만 이로인해 가장 혜택을 받은 사람은
전국을 상대로 장사를하는 상인들이라 하는군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이 길이 였는데 길이를 알아야 영토 넓이를 알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통일적인 도량형을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중앙에서는 전국 표준의 자(尺)인
기준척(基準尺)을 마련하여 늘 보관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 기준척은 왕조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았으며 그래서 전쟁이나 반란등으로 수도가 함락될때
빠뜨리지 않고 챙겨가야할 중요한 품목중 하나였어요
물론 이 중요한 기준척이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거리를 측량할때의 단위, 신발을 재는단위, 옷을 재단할때 재는단위 등 분야에 따라 다른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조선시대 때에도 건물을 지을때 사용하던 영조척(營造尺), 포목과 의복 등에 적용되던 포백척(布帛尺)
제사용의 제기와 관련된 조례기척(造禮器尺), 그리고 거리나 면적등을 잴때 사용하던 주척(周尺)등 다양했지요
그래서 그 여파가 지금까지 밀려와 건물을 말할때는 평으로 옷을 잴때는 인치로 그릇을 말할때는 미리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은 말하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지도에 사용되던 주척이 가장 중요했는데 이 주척(周尺)의 이름은
옛날 주(周)나라에서 사용했다 하여 주척이라 불렀다 하네요
그런데 이 주척의 단위는 즉 1자(尺)라는 의미인데 현대로 말하면 23.1cm이지요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길이의 단위로 촌(寸)-척(尺)-보(步)
-장(丈)-리(里)-식(息)으로 되어 있어요
촌(寸)은 “손의마디”라는 뜻으로 10촌이 1척이니까 2,31cm 이지요
보(步)는 “한걸음”이란 뜻으로 6척(1.386m)이고 1장은 10척(2,31m)이 되지요
그리고 180장이 1리(415,8m)이고 30리가 1식(12,474km) 이지요
그런데 왜 이런 길이의 단위가 나왔는지 이해하려면 1식(息)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이해 해야할 필요가 있어요
식(息)이란 “쉰다”는 뜻으로 거리 단위에서는 한번 쉬어가는 거리란 의미이지요
그러면 이런 1식의 거리를 어떻게 측정하였는지 알아보기로해요
경국대전에 1식이 30리로 되어있고 1리가 180장으로 나오니까 1장(2,31m)단위로 쟀을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1장 단위의 줄자라도 갖고 다녔다는 이야기인데 일부지역 이라면 모르겠지만
전국에 그물망처럼 퍼져있는 수많은 길의 거리를 그렇게 쟀을리가 만무 하지요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지혜로워 1장이 10척이기 때문에 1리는 1,800척이 되고
1보가 6척이니까 1리는 300보로 딱 떨어 지고 있어요
1식이 한번 쉬어가는 거리인데 이때 가는 것은 말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가는 거리 이지요
그리고 거리의 단위안에 보(步) 즉 걸음걸이라는 것이 들어 있어요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것일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때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걸음걸이가 길이를 재는 단위가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수 있어요
그렇다고 무턱대고 걸으면서 거리를 재는것은 아니었지요
6척이 1보라는 기준이 있었으며 거리를 잴때면 그 기준에 맞는 걸음걸이를 했던 것이지요
물론 아무리 편차를 줄이려 해도 걸음걸이로 거리를 측정하면 오차가 날수밖게 없고
이는 근대식 측량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아닐수 없지요
허지만 조선시대에는 100%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거리측량이 별로 의미가 없던 사회였어요
얼마를 가서 점심을 먹고 얼마를 가서 하루를 묵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대였지요
이는 국가에서나 민간에서나 마찬 가지였지요
앞에서 6척인 1보를 현대적인 단위로 보면 1,386m가 된다고 했어요
그럼 1,386m를 줄자로 잰후 직접 걸어보는 실험을 해보면 가랑이를 쫙 펴야만 1보의 길이와 비슷해 지지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현대 사람들보다 키도 아주 작았고 왜소했는데 어찌하여
보폭이 찢어질 듯 벌여야 되는 걸음을 1보라 했는지 알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의문점을 옛문헌에서 찾을수 있었지요
예부터 우리나라 1보의 거리는 왼발-오른발 이나 오른발 –왼발이 아니라
왼발-오른발-왼발이나 오른발-왼발-오른발의 길이였던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1보=1,386m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지요
다시말해 거리를 재는 단위로서의 1보는 산책하거나 금강산 구경할 때 걷는 걸음이 아니라
산넘고 물건너 구불구불 난길을 급히 과거시험보러 갈때의 보폭이었지요
또 특이하게 크거나 작은 사람의 보폭이 아니라 평균적인 사람이 걷는 보폭을 기준으로 하였지요
그래서 걸음걸이 측정의 편차가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네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리나무"가 있어요
‘십리 절반 오리나무’라는 옛 노래말 가사처럼 오리나무는 옛날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로 삼아
오리(五里) 2km 마다 심었다는 지표목이었지요
그래서 나무이름이 "오리나무"가 되었다 하네요
오리나무는 술을 물이 되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하지요
옛날에 술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 산에 땔감을 하러 갈때도 꼭 술병을 가지고 다녔는데
어느날 술병 마개를 잃어 버려 길 옆에 있는 오리나무 잎을 뜯어 술병마개로 썼다가
나중에 술을 마셔보니 술이 물이 되어 버렸다는 일화가 있어요
이처럼 오리나무는 술을 해독시키는 작용을 하지요
술은 화기(火氣)를 많이 품고 있는 반면에 오리나무는 화기를 진정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술이 만취된 사람이 오리나무 밑에서 잠을 자면 술이 쉽게 깬다 하네요
그래서 옛조상들은 행여 길을 가던 나그네가 술이 취했을때
한잠자고 술깨고 가라고 오리(2km)마다 "오리나무"를 심었는지도 몰라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