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맨영영사전(LONGMAN Dictionary of American English)

영영사전은 좀 과장하자면 영국에서 롱맨 사전이 나오기 전과 후로 가를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로 세계의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확실히 넘어간 것처럼 영어의 패권도 영국 영어에서 미국 영어로 확실히 넘어갔다. 영어사전의 표준도 당연히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영한사전도 영일사전도 50년대까지도 영국 영어를 표기 기준으로 삼았지만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 영어를 기준으로 삼았다.
영어사전에서 미국은 영국보다 당연히 후발주자였지만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이고 아니고를 떠나 일본과 한국에게는 미국에서 나온 영어사전이 도움이 되는 면이 사실 많았다. 전통적으로 영국에서 영어사전 하면 언어사전이었다. 말의 뜻을 풀이한 사전이었다. 사물의 뜻을 풀이한 백과사전은 별도로 만들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되는 미국의 일반 가정들은 언어사전 따로 백과사전 따로 구비할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언어사전과 백과사전 겸용으로 영어사전을 만들었다. 19세기 초에 미국에서 노아 웹스터가 처음 내놓은 웹스터 영어사전이 바로 그런 사전의 전통을 세웠다.
동아시아에서 영어로 된 두말사전의 전통을 제일 먼저 세운 나라는 일본이었는데 일본은 처음에는 영국에서 나온 영어사전을 전범으로 삼았지만 얼마 안 가서 웹스터 사전에 크게 기댔다. 번역을 많이 해야 하는 일본의 처지에서는 백과사전답게 별에 별 시시콜콜한 어휘까지 다 나오는 웹스터 영어사전이 번역을 하고 영일사전을 만드는 데에 요긴했다. 2차 대전 뒤 표기 기준을 미국식으로 바꾸기 전부터 이미 영일사전의 체제는 웹스터 같은 미국 영어사전을 많이 본 땄다. 영일사전을 본 딴 영한사전도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런데 미국 출판사들이 투자는 게을리 하고 인수 합병으로 덩치불리기에만 신경 쓰는 사이 1980년대부터 영국 사전이 질에서 미국 사전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먼저 치고 나간 사전이 롱맨이었다. 롱맨은 방송, 신문, 책에서 실제로 쓰이는 영어 자료를 꼼꼼히 수집하고 통계 분석을 해서 정말로 쓰이는 어휘를, 사용 빈도 순서로 정리해서 사전을 만들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중요한 뜻이 웹스터 사전에서는 맨 뒤로 밀려나서 그 뜻을 찾느라 시간 낭비가 심했는데 롱맨 사전은 그런 불편함을 덜어주었다.
롱맨 영영사전이 각광을 받자 영국에서는 콜린스, 옥스포드, 케임브리지도 과감한 투자로 양질의 사전을 잇따라 내놓았다. 그러나 영국의 좋은 영영사전들이 일본의 영일사전과 한국의 영한사전에 영향을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영일사전은 틀 자체가 웹스터 체제로 짜여져 있었고 영일사전의 번역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한사전도 당연히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영일사전은 영어 원어와 직접 상대하여 만든 사전이므로 그 나름의 절실함이 사전 곳곳에 배어 있지만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을 베낀 것이므로 영어 원어를 한국어로 정확하게 담아내기 위한 치열함이 모자라다.
가령 지자체에서 시민에게 분양하는 텃밭을 뜻하는 영어 an allotment를 대부분의 영한사전에서는 '시민농장'으로 풀이한다. 이것은 영일사전에 나온 市民農園(시민농원)을 한국어로 적당히 위장한 말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주말농장'이라는 안정된 한국어 어휘를 떠올렸을 법도 하련만 그러지를 못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이 든 관을 얹어서 옮기는 데에 쓰는 받침대를 뜻하는 bier도 영일사전의 棺架, 棺台를 한글로 바꿔서 '관가, 관대'라고 영한사전에서는 옮겼다. '상여'라는 전통어가 있는데도 말이다. 영어 bier와 한국어 '상여'가 정확히 똑같지는 않다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적어도 '관가, 관대'와 함께 '상여'라는 전통어를 넣어주었어야 옳았다.
한국의 영한사전 편찬자들이 이렇게 자국어 현실에 어두운 까닭은 간절함이 없어서 그렇다. 19세기 말에 일본의 영일사전 편찬자들은 아무리 구석구석 뒤져도 낯선 서양어 어휘에 들어맞는 자국어가 없을 때에는 아예 스스로 말을 만들어냈다. 어떻게든 서양어 문헌을 일본어로 옮겨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영한사전 편찬자들은 그런 간절함이 없었기에 이미 있는 자국어도 제대로 발굴하지 못했다. 자력으로 영어 어휘 하나하나와 치열하게 맞붙은 경험이 없었다. 일본의 사전편찬자들에게 더부살이를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롱맨영영사전의 한국어판인 롱맨영한사전이 나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국의 영한사전은 롱맨사전이 나오기 전과 후로 갈라진다. 능률영한사전도 allotment와 bier를 '시민농원'과 '관대'로 풀이하긴 했다. 그러나 능률영한사전은 기존의 영한사전과 달리 일본어라는 중간상에 기대지 않고 영어와 직거래하여 만든 사전임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기존의 영한사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영어 어휘의 핵심을 꿰뚫는 풀이가 많다.
가령 dryly를 기존의 영한사전은 '냉정하게, 차갑게, 무미건조하게'처럼 영일사전에 나온 일본어 풀이를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차원에 그쳤지만 능률은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처럼 살아 있는 한국어 안에 담아낸다. gasp는 그냥 '숨이 막히다'가 아니라 '숨이 턱 막히다'로 받아친다. pig를 기존의 영한사전에서는 영일사전을 베껴서 '경멸어'라고만 표시하고 경찰관이나 순경으로 풀이하지만 능률은 '짭새'로 짚어낸다. 영어 seminal을 '혁명에 가까운'으로 풀이한 것은 혁명에 가까운 풀이가 아니라 가히 '혁명적' 풀이다. 어떤 영일사전도 적어도 seminal에 관한 한 이렇게 영어 원어의 핵심을 찌르는 풀이어를 제시하지 못했다.
롱맨영한사전은 영어를 한국어로 독해하고 번역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전이지만 한국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가령 '그는 제인이라는 아가씨와 약혼했다'를 영어로 표현할 때 He got engaged to a girl called Jane이라고 해야지 engaged with으로 쓰면 안 된다며 한국인의 약점을 족집게처럼 짚어낸다.
이렇게 훌륭한 롱맨영한사전이지만 불행히도 한국에서 그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영일사전을 생각없이 베껴온 "관록 있는" 영한사전들을 아직도 추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간절한 마음으로 영어와 한국어를 이으려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첫댓글 롱맨영어사전에 대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웹스터영어사전에 비해 유명하지는 않지만 실용사전으로 적당해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중서림 영한사전, 영영한사전이 유명한데, 그 밖에 좋은 사전이 많은데 영일사전을 옮겼다고 하는데 개정판이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어공부를 좋아하는 친구가 영영사전을 사용했는데, 그 이유를 오랜 시간이 되어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