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왕국 이스라엘은 예후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Jehoahaz)가 이스라엘의 제11대 왕이 되었습니다(1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예후가 오므리 왕조의 아합과 이세벨이 행했던 극악함에서는 조금 벗어나게 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도 그러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호보암이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율법과는 조금 다르게 바꾸어 절기를 지키고, 레위 자손이 아닌 자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하는 악을 행했었는데, 이러한 여호보암의 행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조가 바뀌어도 여전히 이스라엘에 잔존(殘存)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도록 한 것입니다(2절). 그런 의미에서 첫 단추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그 다음 단추들은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잡으려면 모든 단추를 풀고 다시 꿰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긋남이 고쳐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람 왕 하사엘(Hazael과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Ben-Hadad)에 손에 붙이셨습니다(3절).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다는 의미는 아람에 의해 이스라엘에 점령된 것은 아니지만 깊은 간섭과 종속적(從屬的)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람에 의해 괴롭힘을 받은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람에 의해 학대받는 것을 보시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4절). 그래서 구원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이 아람 족속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5절). 5절에 나오는 구원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것은 명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앗수르의 아다드 니라리 3세(Adad-nirari Ⅲ)가 이스라엘을 도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구원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람에게 학대받는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역사(役事)하셔서 이스라엘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아하스가 그나마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는 것이 희망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아람 족속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대로 두고 섬기는 죄악을 행하였습니다(6절).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 나는 부분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었는데,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나자 곧바로 이전의 죄악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보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치게 하여 이스라엘에는 최소한의 병력(兵力)만 남게되었고, 아람 족속을 섬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7절).
여호아하스가 죽고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Joash)가 이스라엘의 제12대 왕이 됩니다(9절, 10절). 이스라엘의 요아스는 남왕국 유다의 왕인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요아스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이 행했던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11절). 요아스에 관한 기록은 오늘 본문에 이어서 더 기록되고 있지만, 요아스도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죄악 속에 남아있었습니다. 도무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였어도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셔서 돌아보십니다. 그때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위기와 문제에서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돌이키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겐 응징(膺懲)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잠깐 고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죄악의 길에서 완전히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지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