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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4일 화요일 [(홍) 성 막스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꿀처럼 입에 단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이스라엘 집안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신다(복음). <그 두루마리를 내 입에 넣어 주시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8─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9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10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3,1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2 그래서 내가 입을 벌리자 그분께서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3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과 길 잃은 양의 비유는 겉보기에 연관성이 없어 보이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 곧 하느님 공동체에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 라삐 학파들 안에서 자주 발생한 논쟁을 반영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혹스러웠고 그들을 실망에 빠뜨렸습니다. 그분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따르면,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하늘 나라 공동체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자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린이처럼 되는 것과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어린이 같은 언행을 격려하시려고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이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어른 공동체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겸손한 존재입니다. 어린이는 가난한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다른 이들에게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있는 인간의 처지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늘 나라를 그저 받아들이는 태도와 단순함 그리고 겸손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됩니다! 올봄 강의차 사이판에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강의 후 본당 신자들께서 친절하게 섬을 한 바퀴 안내해 주셨습니다. 사이판은 태평양전쟁 당시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자, 일본군의 최후 방어기지였던 관계로, 여기 저기 전쟁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더군요.
가장 가슴 아픈 장소는 전쟁 말기 대대적인 미군의 폭격 앞에,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일본군들은, 80미터 높이의 절벽위에서 단체로 뛰어내렸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틈에 우리 한국 청년들도 끼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는 그 절벽은 오늘날 ‘만세절벽’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생각만해도 분노로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희생된 우리 청년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입대한 청년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아니고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그들의 군복을 입고,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그리도 슬프게 죽어간 것입니다. 더 슬픈 것은 그들은 바로 우리들의 할아버지들이요 아버지들인데, 우리는 그들의 그런 기구한 삶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1947년 일본 대장성 문서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소속 한국인은 363,500명, 해외징용자 1,390,000명, 국내 강제근로동원인력이 약 600만 명에 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가슴아픈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일본군에게 끌려간 우리 꽃같은 소녀들의 숫자는, 워낙 닥치는 대로 끌고 갔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소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16세, 17세였습니다. 그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물설고 낯선 이국땅으로 끌고 갔고, 그렇게 그들의 꽃다운 청춘은 무참히도 짓밟혔습니다.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한 나라, 오랜 세월 동안 그 끔찍한 상처를 외면해온 나라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27년전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님(1924~1997)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처음으로 수면위로 떠올랐으며, 그들의 잔혹함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죽음과도 같은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마음에 품고 삭이면서 살아오신 할머님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참으로 이 나라가 부끄럽고, 제 자신도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우리들의 할머님들이 당하신 그 억울한 사연, 그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고, 가해자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 합당한 보상을 받아내는 것, 자녀요 후손으로서 수행해야할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존경하는 할머님들께서 한분 한분 우리 곁을 떠나가고 계십니다.단 한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그분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내려갈 수 있도록 우리 후손들이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말끔히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 평화롭게 사는 나라에 무기를 앞세워 침략한 것, 수탈한 것, 우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리따운 소녀들과 청년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넣은 것, 그것을 피해 당사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합당한 배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대일 졸속 외교의 극치를 보여준 몰지각한 정치인들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2015년 12월 28일 그 잘난 돈 몇푼 받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국내외에 공표했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아직도‘폭행이나 협박으로 소녀들을 납치했다는 사실은 증거로 입증된 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를 가진 증언은 없다'고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앞에 우리 천주교회도 열심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한일 합의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천주교전국행동’을 결성하였습니다. 천주교전국행동에는 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여러 천주교 시민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전국행동은 8월 14일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 일시: 2018년 8월 14일(화) 오후 4시 30분 장소: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층 성당 주례: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주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전국행동’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하느님 앞에 서면 겸손해진다>
며칠 전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작은 짐승이 튀어나와 급정거를 했지만 결국 그것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로드킬이라 기분도 좋지 않았지만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였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를 뒤로 빼서 가만히 살펴보니 고라니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부스럼이 났고 털이 다 빠진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불쌍해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차에게 더 밟히는 일이 없도록 길가에 던져주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혐오감을 주는 것들은 없애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뱀 일가족 3마리를 몰살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물론 그래야 용감하게 보였기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갇혀 있는 뱀을 죽이기보다는 다시 산에 풀어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벌레들도 잘 죽이지 않습니다. 혐오스런 다리가 많이 달린 소위 돈벌레나 나방 같은 것들이 방으로 들어와도 잘 잡아서 창문 밖으로 던져줍니다. 내가 그 생명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음을 반성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살이 하나도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날파리나 인간이나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어린이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와 과부는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부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어린이와 같이 낮아진다는 말은 어린이와 같이 낮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과 같음을 말씀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낮은 이들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물을 받아들이는 곳은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계곡입니다.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 마리의 가치가 구십구 분의 일이 아니라 나머지 구십구 마리만큼이나 소중하단 뜻입니다.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기고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겸손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초보 강도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는 집 주인에게 “꼼짝 마, 손들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강도가 “왜 손을 안 들어. 죽고 싶어?”라고 협박했더니 그 사람은 “제가 오십견이어서 손을 들 수가 없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집 주인의 말을 들은 강도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 오십견이세요? 저도 오십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오십견에 대한 정보를 주고는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아파봐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내가 작아져 봐야 작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처지입니다. 그런 처지이니 아이들은 자신처럼 불쌍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게 되면 자신처럼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은 게으르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판단합니다.
그러면 다시 어린이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린이가 어린이인 것을 알 때는 부모 앞에서입니다. 모든 것을 대 해주시는 부모 앞에서 비로소 작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없으면 부모 없는 어린이와 같은 운명입니다. 주님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아이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우려면 부모 없이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기도 안에서 하느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가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는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이는 요한 묵시록의 요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모시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는 엎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 앞에 서야만 우리가 아무런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린이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사는 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포용할 능력을 지닌 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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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y Kolbe)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연도 : 1894-1941년
같은이름 : 꼴베,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Zdunska Wola)에서 태어난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Maximilianus-Maria Kolbe, 또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라이문두스(Raimund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910년 9월 4일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누스라는 수도명을 택하였다. 이곳에서는 그는 중등 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 5일 첫서원을 했으며, 1912년 12월 로마(Roma)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로마의 프란치스코회 국제 신학원에 머물면서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23세였던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는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신학원장 신부의 허락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1917년 10월 16일).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일종의 신심 단체이다.
1914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하고,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는 1919년에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Krakow)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동료 수사들은 물론 대학생들과 군종신부들 안에서 기사회 조직을 만들었다.
1922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je)라는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이 잡지는 초기에 그로드노(Grodno)에서 발행되다가, 1927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Miepokalanow)이라는 수도생활 공동체에서 발행하였다.
이 마을은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신부가 바르샤바(Warszawa)에서 40km 떨어진 방대한 지역에 설립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193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중국, 한국, 인도에도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으나 외부적인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폴란드 내에서 유명해진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신부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에 거주토록 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 그를 체포하여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2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과 처벌을 받으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하였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자 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신부는 자원해서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결국 그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혀 아사형에 처해졌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굶어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그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했고, 이로써 그는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옥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1948년 그에 대한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마침내 1971년 10월 17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와 함께 그를 시성하였다.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