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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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루가 19,41-44)
As Jesus drew near Jerusalem, he saw the city and wept over it, saying, “If this day you only knew what makes for peace? but now it is hidden from your eyes.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께서는 다시 당신 백성 안에 머무르시고 많은 민족을 위한 도구로 쓰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가족이란 혈육으로 맺어진 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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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왜 성모님을 공경해야 할까요? 많은 이가 예수님을 잉태하시어 낳으시고 기르신 어머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오늘 복음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실행하신 분이십니다. 전승에 따르면, 세 살이 되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당신의 삶을 봉헌하셨습니다. 또한 처녀인 몸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시어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우리는 성모님을 혈육을 뛰어넘어 신앙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로 공경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 카나의 혼인 잔치입니다(요한 2,1-11 참조). 그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아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이를 알려 주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십니다. 이때 성모님께서 보이신 모습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더 이상 강요하지도 않으시고, 상황을 길게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곧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이끄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을 공경할수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더욱 깊어집니다. 성모님께서 몸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시고,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공경해야 할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김수만 신부-
이제 며칠 지나면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라고 할 수 있는 대림 시기가 다가옵니다. 시간이 유수 같음을 새삼 느끼면서 ‘나는 그동안 사제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반성하고 다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정말 바쁜 사람은 바쁘다고 하지 않는 법인데, 실제로는 제 부족함과 나태함 때문에 하느님의 일로 정말 바쁘게 살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이런 저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생각하니 그 부끄러움 더해져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 다시 방향을 돌리는 회개를 위해, 그렇게 좋은 말씀과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변화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정반대로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상황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백성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연민의 눈물에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내모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습관이 필요합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도 계속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똑같은 되풀이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방식, 내 틀, 내 습관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분명 예수님은 그 옛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어려움과 갈등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의 많은 잘못된 방식과 욕심, 습관을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의 편이십니다. 제1독서의 ‘마타티아스’처럼 우리도 항구한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 굳건한 믿음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청해야겠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눈물을 우리가 닦아드릴 차례입니다. 오늘은 그 누군가에게 눈물이 아닌, 기쁨으로 다가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구세사의 정점
-안문기 신부-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곳입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기록된 모든 것들을 완성하신 곳이지요. 이 구원의 역사를 위해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러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환영하는 인파를 보시면서도 곧 그들이 당신을 박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이룩한 이스라엘의 영원한 도읍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평화의 도시를 하느님의 구원이 약속된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두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죽음과 부활과 승천, 즉 그리스도의 영광이며, 둘째 단계는 교회의 시작, 즉 성령강림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세상의 복음화 기간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신앙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와 연결됩니다. 우리가 지상의 예루살렘에 살면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곳은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세사의 정점에 와 있습니다.
눈물
-김찬선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며 하신 탄식입니다. 루카 복음에 따르면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첫 복음 선포를 하신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전도 여행을 하십니다. 말하자면 저 땅 끝 해남에서 전도 여행을 시작하여 전국을 돌고 돌아 서울을 향해 가시는데, 지금은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태령에 와 계신 것입니다.
저는 자주 밤 등산을 합니다. 안산을 가든 북한산을 가든 꼭대기를 오르면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데 그 화려함이 눈부셔 감탄이 나옵니다. 어제도 저녁을 먹고 북악의 팔각정을 올랐습니다. 구름도 없고 찬 공기 덕분에 공해도 없어서 야경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일찍 연말 기분을 내는 조명들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묵상을 하면서 올랐기 때문인지 그 화려함 뒤에 있는 서울의 어두움이 떠올랐습니다. 30여 곳에 이르는 뉴타운 개발로 거리로 내몰리는 가난한 사람들. 그 대표적인 희생자들인 용산의 희생자들과 그 남은 가족들. 얼마 전 용산의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 갔을 때 본 그들의 눈물과 그들의 저주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이들의 눈물에 대한 눈물이요,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이들에 대한 눈물입니다. 예수님께는 눈물을 흘리는 이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나 똑같이 안타깝고 애처롭고 그래서 그들 모두에 대해 우십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은 내용이 다릅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에 대한 눈물은 그들의 고통에 대한 눈물이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들에 대한 눈물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눈물입니다. 죄지은 사람과 그의 악에 대해서까지 우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사람도 죄인도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죄악에 대해서도 분노할 수 없고 죄인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눈물을 흘리는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진복 선언이 얘기하듯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웃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의 눈물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눈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보는 눈이 가린 예루살렘이 너무 안타깝다 하십니다. 없는 자를 악이 바치게 만드는 가진 자의 죄악도 문제지만 악이 바쳐 악에 대해 악으로 되갚는 없는 자의 저주도 문젭니다. 사랑이 없을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나 다 평화의 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 평화의 길을 모르건 분노에 눈이 가려 평화의 길을 모르건 그들은 모두 평화의 길을 모르고 결국 서로를 파멸하는 길을 갈 것입니다.
이 아침, 저는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다른 사람을 악 바치게 하고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오늘 이 아침, 희망합니다. 이런 저에 대해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제가 되기를. 모든 이가 평화를 이루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기를.
마음의 평화 얻는 길
-전삼용신부-
성당을 찾는 대부분의 예비신자들은 성당을 찾는 첫 번째 이유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살면서 무언가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이 분들은 믿음만이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분들 마음에 그런 의지를 심어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는 성령님의 열매, 즉 하느님의 선물이지 자기 스스로 얻어 누릴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며 아말렉을 멸하고 어떤 살아있는 것들도 남겨놓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말씀을 어기고 왕도 살려두고 살진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지고 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주님이 계속 그 안에 머물러 계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그에게서 나가니 악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사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1사무 16, 14).
왕이란 모든 권력을 지닌 사람의 상징으로서 아무 두려움 없는 당당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악령이 들어오니 불안함에 떨게 되고 사실 왕권은 이제 다윗에게 넘어갑니다. 사무엘은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미래의 왕으로 점지합니다.
진리란 아주 단순합니다. 죄를 지으면 성령이 그에게서 빠져나가고 그러면 성령의 열매들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인데 이런 모든 것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왕적 당당함과 평화’까지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으면서 왕직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데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는 사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게서 그 힘을 빼앗고 다시 그 맘에 불안과 두려움만을 남겨놓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안녕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평화를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모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가 아닌 스스로 평화를 구하는 사람은 그 평화를 잃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사제직, 왕직을 부여하시는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최후는 불안과 멸망뿐입니다. 사울과 같이 똑같은 전철을 뒤밟는 것이고 우리 개인 모두도 그리스도를 잃고는 어떤 평화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봤는지, 혹은 누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시장에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온갖 안 좋은 상상을 하며 동네를 다 뒤졌는데 바로 처음 잃어버렸던 곳에 태연이 쪼그려 앉아서 흙으로 장난을 치고 있더랍니다.
보통은 부모가 보이지 않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날 텐데, 그래서 어쩌면 찾기가 더 어려워질 텐데, 그 아이는 ‘여기 있으면 당연히 찾으러 오겠지!’ 하며 태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삼일 동안 태연하게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셉과 마리아는 피가 마르는 고통으로 아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어머니,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느님을 왕으로 둔 아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도 하느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와 마음의 평화를 주십사 매우 오래 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으로 ‘나는 주님의 자녀다. 그분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다.’해도 좀처럼 그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고 기도를 해도 그 때 뿐이었습니다. 이런 극도의 불안함은 한 3년 정도 지속된 것 같습니다. 신학교 들어와서 믿음이 더 강해졌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이런 불안함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땐 머리론 하느님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굳은 신뢰입니다. 그런 믿음이 생기자 다음부터는 그런 고통스러운 불안함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면서 항상 대범하고 평화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통해서 더 평화를 절실히 원하게 될 수 있고 조금씩 믿음을 증가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이렇게 인사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인사말은 당신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싹수가 노란 싸가지 없는 아이>
-양승국신부-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된 한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먼저 떠난 남편이 야속하기 그지없었지만, 끔찍이도 남편을 사랑했던 그녀이기에 재가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철부지 아들 하나를 끌어 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싹수가 노랗다"는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 물건에 슬슬 손을 대기 시작하던 아이는 점점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조직의 일원이 되어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친척들은 "아들 하나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재가나 하라"고 충고했지만, 어머니는 결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사고를 친다고 해서 결코 버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사건 뒷수습을 위해 밥먹듯이 파출소와 경찰서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소년원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이튿날 보따리를 싸서 소년원 근처에 방을 얻었고,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교도소를 갔을 때, 어머니는 또 다시 짐을 꾸려 교도소 근처에 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면회를 갔습니다. 물론 아이의 옥바라지를 위해 어머니는 해보지 않은 궂은 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몹시 추웠던 그 날도 어머니는 가장 일찍 교도소에 도착해서 면회를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수감번호가 방송을 통해 들려오자 익숙하게 면회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애야 오늘 날씨가 많이 추운데, 혹시 감기 걸리지는 않았니?" 하고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감기 기운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져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던 아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철창 안에서 아들이 바라다본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추운 겨울날 감기가 들려 콜록대면서까지 자신을 찾아오신 어머니, 오랜 옥바라지로 인해 나이에 비해 훨씬 늙고 초라해진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진 아들은 갑자기 대성통곡을 터뜨렸습니다.
그 눈물을 계기로 아들은 조금씩 어둠의 생활을 청산해나갔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거듭했지만, 지금은 운전기사로 있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새 출발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끊임없는 방황과 타락 앞에 눈물밖에 흘릴 수 없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죽음으로 향해 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아마도 그 어머니의 마음과도 흡사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갖은 고통이나 끝없는 방황이 너무도 안타까워 찢어질 듯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배신과 떠나감이 너무도 아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게된다면 그때 우리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는 예수님,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파악하게될 때, 우리는 위에 소개해드린 아들처럼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의 날들이 고통스럽고 비참할지라도 낙담치 않고 다시금 새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의 가장 핵심은 우리를 향한 자비입니다.
회심의 첫걸음은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식음전폐>
-양승국신부-
요즘 한 몇 일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계속 전화가 걸려오고 있습니다. 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거의 식음을 전폐한 채, 벌써 몇 일째 나가던 일도 못나가며 애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저 역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저희 역시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지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끼"인 방랑벽이나 역마살을 차마 버리지 못해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 그간 험한 세상을 헤쳐오느라 어쩔 수 없이 쌓아온 생계수단인 "주특기"를 과감하게 끊지 못하는 아이들, 그렇게 붙잡고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떠나가는 아이들, 죽기살기로 "자유"를 고집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저희의 마음 역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홀가분한 자유", "떠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체험 상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는 저희들이기에 너무도 안타까워 눈물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단 하루나 이틀 후의 결과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할 것인지가 눈에 선하게 예견되기에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 마음은 저희들보다 더 찢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아이들이야 아무리 갈 때까지 간다고 하더라고 "검찰 송치", "가중처벌" 정도이겠지만 예수님께서 걱정하셨던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는 예루살렘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살육, 남김 없는 폐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당신과 동고동락하던 가족 친지들, 사랑하는 동족들이 이방인들로부터 끔찍하게 살육 당하고 당신이 애지중지하시던 고향마을이 이방인들의 발아래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예견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그야말로 까맣게 타들어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동족의 미래에 대해 아무리 처절하게 부르짖어도 그럴수록 더 귀를 막는 동족들과 지도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너무도 안타까웠던 나머지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십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회개의 길을 시작하라는 요청입니다.
회개는 그저 좋은 말씀 한번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 그래, 맞아. 정말 저렇게 살아야지" 하면서 생각으로만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심오하고 인격적이며 속속들이 변화되어야 하는 과정을 내포합니다.
단순한 변화,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내적인 변화,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가 회개의 여정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과 복음정신과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굳은 결심뿐만 아니라 철저한 자기변화를 요구합니다.
복음이 일러주는 대로 우리의 마음가짐과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의사 표시가 참된 회개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의 빛에 오롯이 순종하겠다는 각오가 회개입니다.
박해로 인해 더욱 굳어진 마따디아의 믿음 - 경규봉 신부-
안티오코스 왕은 유대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부하들을 모데인 시로 보냈다. 그 도시에는 마따디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느님께 충실한 사제였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으며, 하느님과의 계약과 율법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율법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훌륭하고 힘 있는 지도자였다.
그 도시에서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의 지시에 따라 배교를 하고 우상을 숭배했지만, 마따디아와 그 가족 및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왕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왕의 부하들은 마따디아에게 왕명에 복종하여 우상을 섬긴다면 왕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마따디아는 그러한 설득과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충실히 지켰다. 이런 와중에 어떤 유대인이 왕명에 따라 우상의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치려고 하자 마따디아는 율법에 대한 열성이 북받쳐 올라 그를 죽여 버렸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기라고 말하는 왕의 부하까지도 죽이고 우상의 제단을 헐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성과 계약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을 불러 모은 후, 모든 재산을 버려둔 채, 산으로 피해 갔다. 정의와 율법에 따라 살려는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 또한 도시를 떠나 정착할 곳을 찾아갔다.
캄캄한 밤일수록 작은 별빛도 더욱 밝게 빛나듯이 악 가운데에 있을 때에 선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병고는 없어져야할 악이지만 병고를 통해서 병을 찾고 치료할 수 있다. 박해는 없어야 할 악이지만, 박해를 통해서 참된 신앙은 드러나고 널리 전파되며, 순교성인이 탄생한다. 하느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끌어내시며 당신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신다.
안티오코스 왕의 박해로 인하여 마따디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신앙은 더욱 굳세어졌다. 그들은 산중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겠지만, 하느님의 군사로서 우상을 타파하며 율법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들로 인하여 배교자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것이고, 신앙이 약한 자들이 더욱 굳은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도시의 우상과 이교 제단이 제거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정화될 것이다.
우리가 때로 고통을 당하고, 여러 가지 악으로 인하여 신음할 때, 이러한 것들이 우리 자신의 문제를 찾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됨을 생각하자. 고통과 악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굳세어지며 우리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됨을 생각하자...............◆
예수님의 눈물, 나의 눈물
-상지종신부-
오늘 새벽 미사 중에 복음을 읽으면서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마치도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며 한탄하시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2000년 후에 멀리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시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마수가 우리를 할퀴고간 것이 엊그제, 이제 조금 나아졌나 싶더니 이제는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성마저, 인간적인 정마저 송두리째 제물로 바치라고 달려드는 형국입니다. 함께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너 혼자만이라도 살아나라고 유혹합니다. 조그마한 사각 링안에 힘없는 사람들을 집어넣고 죽음의 경기를 부축이며 이를 즐기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를 넘어 인간적인 측은함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결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아름답고 소중한 인간으로 남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원수들과 타협하며 오히려 자신의 백성을 볼모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정부 당국자들과 자본가들의 몸부림이 안쓰럽게 다가옵니다.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고,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사랑담긴 애절한 외침을 외면하고 죽음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일부터 사상 초유의 한국전력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최대의 국가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산업의 민영화를 반대하는 노동조합과 전력산업의 효율성 저하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에게 전력산업을 제물로 상납하려는 정부 당국과 회사 측과의 한판 대결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만약 대결이 벌어진다면 그 다음 어떤 과정이 이어질지 불보듯 뻔합니다. 불상사를 막아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합니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타까운 현실 앞에서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길, 공존의 길을 걷기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공멸의 길을 걸으려는 가진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드러내 놓고 평화를, 정의를, 생명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자책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미약한 힘이나마 내어 놓았더라면, 우리 신앙인들이 조금만 더 복음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이 사회를 복음화시키기 위하여 헌신했다면 지금의 이러한 최악의 상황은 어느정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이 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한탄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을 거두시고 예루살렘 한 가운데를 향하여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비록 이 길이 죽음의 길이지만 곧 부활의 길, 참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의 외침을 쏟아내시는 예수님의 절규를 나의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나 몰라라 외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외쳐야 하겠습니다. 이 외침의 반향이 아주 미미하다 할 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닿는데까지 외쳐야 하겠습니다.
어제 아침 어디선가 오징어 굽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 냄새의 진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지요. ‘이상하다’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는데 잠시 뒤, 아주 우연히 그 진원지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냄새의 진원지는 바로 저한테 있었습니다. 그것도 오른손에……. 아마 아침에 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는데, 라면 잘 익으라고 휘휘 저을 때 전자레인지 불에 털이 끄슬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왼손에 나 있는 털은 꽤 많은데 반해서, 오른손에 나 있는 털은 사라져 있지요.
털이 타고 있는 지도 깨닫지 못했던 우둔한 저였지요. 그리고 그 오징어 냄새의 원인이 바로 저한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나는 것이냐고 찾고 있었던 어리석은 저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 안에서 이렇게 우둔하고 어리석은 모습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이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바라보고 단죄를 서슴지 않았을 때가 꽤 많았습니다. 또한 내가 바뀌는 것이 먼저인데도 다른 사람의 변화만을 먼저 요구했던 우리였습니다. 그리고 자신한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남한테는 너무나도 엄격했던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러한 자세에서 주님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 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일 리가 없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큰 죄인일 따름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그 화려한 성전이 무너져 버린다는 생각보다는, 이 성전 안에서 희생될 사람들의 아픔을 보셨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저항을 하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계신 집인 성전인 만큼 이 안에서 패배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패배하여 성전은 무너졌고 사람들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죽어 없어질 삶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헛된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이제는 환하게 웃는 예수님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고 그럼으로 인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 정반대로 가는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짓는 죄, 나도 모르게 상처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샬롬, 그리스도의 평화
-김종섭 신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 그러나 긴장과 분쟁이 끝이 없는 곳, 그러기에 평화를 더욱 갈망하는 예루살렘입니다. 지난해 예루살렘에서 4개월 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평화’를 묵상하도록 허락된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봉쇄하는 장벽은 높아만가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 한길에서는 어린이들이 전쟁놀이에 한창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평화는 불투명하고 요원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다인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의 어린이들은 한 교실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 문화를 배우며 함께 사는 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분명 평화의 길을 걷는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공원에서 조그마한 한 어린이가 비둘기에게 빵을 떼어서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늘 세계 평화만 생각하는 아저씨가 그 광경을 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지요. “얘야, 지금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그런데, 너는 사람들도 못 먹는 빵을 새한테 던져주고 있구나.” 그러나 그 어린이는 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저는 그렇게 먼 데까지는 빵을 던질 수가 없는 걸요.”
눈물 -김찬선신부-
기뻐서 우는 울음. 슬퍼서 우는 울음. 불쌍해서 우는 울음. 감동해서 우는 울음. 또 어떤 울음이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울음에는 여러 가지 울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울음은 여러 가지이지만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감정이 존재를 압도할 때에야 나오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울음은 순수하고 존재를 정화하는 힘이 있으며 그래서 심지어는 참회이고 사랑입니다.
이성의 건조함으로 열정을 끄지 않고 의지의 억압으로 존재가 위축되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건 남에 대해서건 감성이 눈물을 따라 해야 할 참회와 사랑을 다 하는 것입니다.
죄 지은 자신에 대해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진실한 참회요 어린 자녀를 홀로 남겨두고 죽는 어미와 그 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복음서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곳 한 곳 뿐입니다. 닥쳐올 재난과 예루살렘의 운명이 안타까워 눈물 흘리시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마냥 태평스러운, 그래서 회개와 평화의 기회를 놓치는 예루살렘이 더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시는 것일 것입니다.
경쟁보다는 협력
- 임영인 신부-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한 것들이 환경의 장애를 넘어서 살아가는 것을 두고 다윈이 그렇게 말했답니다. 사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식량과 땅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인간을 경쟁자로 또는 적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있는 힘을 다해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윈의 주장처럼 우리 시대는 그렇게 싸워 살아남는 자들만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윈 비평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다른 이야기를 하더군요. 크로포트킨은 “인간은 한정된 세상에서 제한된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거친 환경과 싸우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연자원이 거의 없고 인구가 밀집된 영국에 살았던 다윈으로서는 삶을 ‘적자생존’의 원리를 통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 크로포트킨은 대지가 광활하고 인구가 드문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협력’의 교훈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윈의 말처럼 ‘적자생존’의 원리를 통해 살아간다면 살아남기야 하겠지만 얼마나 외롭고 불안한 삶이 되겠습니까?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웃과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며 서로를 보호하고 도움을 주는 데 참여할 줄 아는 사람이지 약자 위에 힘을 행사하는 강한 사람이나 겨우내 도와줄 이웃도 없이 혼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상호협력은 경쟁보다 더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진정한 평화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닐까요?
울지 마라
-장재봉신부-
오늘 예루살렘 도성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울었습니다.
일깨우고 가르쳐도 소용없는 세상
알려주고 소리쳐도 받아들이지 않는 예루살렘의 종말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날,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뵈었던 사도 요한도
슬피 울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바라본 세상이 암울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도 우울합니다.
신문을 읽어도
뉴스를 들어도 속 시원한 소식을 듣기 어렵습니다.
울고 싶다하고
울 수밖에 없다하며
한숨을 내쉬고
희망이 사라졌다는 경고음만 요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역행하고
세상 때문에 울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어려울 때 위로를 얻고
힘이 들 때에도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이 평안을 알았더라면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안다면
세상은 한탄하며 허덕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둡습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 심어진 복음의 빛으로 녹일 때입니다.
캄캄합니다.
때문에 복음의 빛을 비출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외롭고 괴로운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 줄 시기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이
참으로 기쁠 수 있도록 사랑의 웃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게 물음표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평화로운지’를 묻도록 해야 하니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느낌표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은 저렇게 행복한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작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되어
‘울지 마라’고 달래는 마음이 되고
‘함께 가자’고 내미는 손길이 될 때,
우리 예수님 울음이
‘뚝’ 그칠 것을 믿습니다. 아멘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양승국신부-
<어떻게 쌓아올린 사랑인데>
“어떻게 맺어진 인연인데, 어떻게 쌓아올린 사랑인데, 그 사랑이 변할 수 있니?” 라고 부르짖는 사람에게 “인간은 늘 흔들리는 갈대니까” “인간은 본성상 한 사람에게만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던데”라며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간의 과정이나 이유야 어떠하든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대상이 떠나갈 때 남겨진 사람이 느끼는 슬픔, 허전함, 안타까움, 배신감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안쓰러워서, 너무나 가엾어서, 너무나 측은해서 더 많은 사랑을 주었던 아이,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챙겨주었던 아이, 그래서 기대감도 컸던 아이가 또 다시 배신을 때릴 때, 와 닿는 배신감은 다른 배신감과는 격이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떠나가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에 눈물까지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연인(戀人)이었던 예루살렘은 극진한 예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너무나 사랑이 컸던 나머지 울면서,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돌아와 줄 것을 당부하지만 예루살렘은 끝내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돌아섰습니다.
언젠가 잠시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가 기억납니다. 머리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고색창연한 도시, 견고한 성곽 안에 자리한 그 자태가 남다르게 사랑스럽던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시였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도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던 도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말씀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하느님으로 부
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도 예루살렘은 당신 신앙의 본향인 도시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늘 동경해왔던 거룩한 도읍이었습니다. 선조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자리,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스런 도시 예루살렘의 멸망을 당신 입으로 친히 예언하십니다. 머지않아 일어날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를, 그 비극의 현장을 미리 내다보십니다. 동족들이 끔찍하게도 살육되고, 성전은 벽돌 한 장 성한 것 없이 남김없이 유린되는 그 현장을 바라보니 예수님의 눈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인 예루살렘의 끔찍한 최후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프셨겠습니다. 상심의 정도가 얼마나 컸으면 한탄까지 하시고 눈물을 철철 흘리셨습니다.
끝까지 당신 사랑을 몰라주는 예루살렘,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해도 정신 못 차리는 예루살렘, 죽음의 길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희희낙락거리며 엉뚱한 길을 걸어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눈물, 그 한탄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의 눈물, 한탄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이토록 변덕스럽고 밥 먹듯이 배신을 거듭하지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늘 한결같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우리가 떠나가도 늘 그 자리에 서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우리의 돌아섬을 기다리는 분이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깨어나라고 외치며 걸었던 길의 종착점인 예루살렘에 흘린 눈물 -정강엽 신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e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속한 사회는 철저히 개개인들의 권력관계에 근거해서 서 있다. 이 권력의 구조망에 이미 얽혀 있는 개인들은 철저히 순종적인 개체들로 양육된다. 그리고 권력 구조는 바로 이 개체들에 의해 그 맹목적 순종이 확대된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어떤 사회의 부정의나 환각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도자보다는 오히려 그 사회의 대중들이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회의 어떤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일종의 방관일 수도 있고 체념일 수도 있겠다.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점으로 가득찬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의 문제점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깨어있도록 해서 그 문제점을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의 생애는 바로 무지몽매한 우리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삶이었던 것이고 그 깨우침의 근본은 하느님을 우리 삶안에 제대로 세우는 것이었기에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깨어나라고 외치며 걸었던 길의 종착점인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수가 본 것은 여전히 ‘무지’로 가득찬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그들의 집단환각 상태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 너무나 기가 막힌 현실에 아마 입이 열리지 않았던 것같다.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너무 기가 막힘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현대에 서울이나 워싱톤에 예수가 다시 오셨다고 했을 때 우리의 삶의 양상을 보시면 과연 예수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예루살렘보다 더 심각한 실어증에 걸리시지 않았을까?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무지를 위해서 기도하실 수 있으셨다: “아버지…. 사실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루가 23:34).
과연 지금 서울에서 워싱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실어증을 풀어드릴 수 있는 깨어남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예루살렘의 언덕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그분의 눈물어린 마음을 염두에 둘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던지실 수 있을 것이다..............◆
새벽을 열며
이제 며칠이 지나면 교회력으로는 새해라고 할 수 있는 대림시기입니다. 엊그제 간석4동 성당으로 발령을 받아서 온 것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과 함께 어제 새벽 묵상 글의 마지막에 썼던 루시우스 세네카의 말이 다시금 떠올려 집니다.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 말이 떠올려 지면서, 내년에 어떤 일을 해야 할 지를 계획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해 어떤 일을 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 같았지요. 교회일지를 한 장씩 넘기면서 올 한 해 어떤 일을 했는지 보았습니다. 사실 나름대로 바쁘게 살았다고 자부했고, 또한 다른 분들도 제게 “신부님, 그렇게 일을 많이 해서 어떻게 해요.”라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거든요. 그래서 저는 간석4동 성당에서 참 많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일지에 나타난 실제로 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사랑에 비해서, 제가 1년 동안 해 온 일은 너무나도 부족하고 미미한 일이었습니다. 즉, 입으로는 늘 “바쁘다 바빠.”를 달고 살 뿐, 실제로 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이러한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착각,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다는 착각, 나는 누구보다도 올바르다는 착각, 그런데도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착각,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는 착각……. 이러한 착각의 홍수 속에서 주님과 내 이웃을 얼마나 많이 원망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눈물을 흘리실까요? 하느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도성 자체에만 만족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이 도성이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무너져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처럼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내게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만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에 주님께서는 오늘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 눈물을 거둘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 눈물이 아니라, 웃음을 선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이 말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못합니다.
빠다킹신부
참된 사람의 길
-서현승 신부-
‘사람’이셨던 예수님의 성격을 이따금 상상해보곤 합니다. 적어도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을 통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성품이나 성격은 참으로 자유롭게 사셨던 분임을 금방 알 수 있을 듯싶습니다. 특히,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던, 똑 부러지는성격이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너무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악의 세력에는 단호히 저주를 퍼부으면서까지 거부하셨던 모습들을 봅니다. 성전에서의 장사치들을 쫓아내는 장면이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노라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악’을 싫어하셨는지 잘 드러납니다. 또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운명을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과 단죄의 말씀에 가깝습니다만,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듯 예루살렘의 운명을 너무도 안타까워하신 당신의 심경을 드러낸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하느님이시지만 참된 사람이기도 하셨던 예수님을 예루살렘은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 이름이 의미하는 ‘평화의 길’을 가지 못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오늘, 알았더라면···
-정애경 수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신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는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이 장차 당하게 될 재난을 예고하신다. 우리는 왜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그것은 아마도 좀 더 편안하게 잘살고 싶은 욕심으로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는 이 사회는 현재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린다.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킬까? 내년에 경기는 좀 풀릴까? 월급은 얼마나 오를까? 앞으로 닥쳐올 세상살이를 걱정하느라 지금 이 시간에 주어진 구원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과거를 후회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예전에 이렇게 했더라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진작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건강에 좀 더 신경 썼더라면 등등 세상의 것을 후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빼앗겨 현재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오늘 하루를 주님의 뜻대로 잘 살아야지.’ 하면서도 잠재되어 있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의 후회는 결국 내 발목을 붙잡아 오늘을 잘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 시간에 찾아오신 주님을 외면하면서 ‘언젠가는 오늘보다 나아지겠지.’ 하며 자신을 위로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진 것은 오늘이란 현재뿐이다. 내일 이 시간에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야고 4,14ㄱ)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오늘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히브 3,7-8)고 하셨다. 그동안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바꾸고,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되도록 하고,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지금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 된다. 오늘 나를 찾아오신 주님과 함께 지낸다면, 오늘 하루를 주님의 마음으로 열심히 산다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 나의 일생이 행복해지고, 마침내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고집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입시다. -김원석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 어느 것을 선택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을 포기하거나 거들 떠 보지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급한 일을 잘 해결해 놓았을 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모두 잃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급하다는 이유 때문에 정작 중요한 신앙은 뒷전으로 물러난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수능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 혹은 학교 내신 성적 때문에 주일학교에 혹은 아예 주일미사를 포함한 아침기도나 저녁기도와 같은 기본적인 신앙생활조차 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대학가서 해도 늦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러는 모습이 점점 늘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으면 뭐합니까? 그러다보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이미 하느님으로부터의 기쁨 보다는 세상이 주는 만족에만 길들어지고 급한 것만 쫓아다니게 된다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정작 중요한 시기에는 후회를 해도 늦게 됩니다. 참다운 지혜가 여러분에 충만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러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보시고는 한탄을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어떤 도시에 상인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가게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항상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어느날 천사를 한쪽 상인에게 보내셨습니다. 천사는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천사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대가 무엇을 원하던 저쪽 상인은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금화 10개를 원하면 저쪽은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천사가 미소 지으며, "그러니 이제는 화해하시오. 하느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대에게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라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크게 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 천사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참으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서 은총과 평화를 주고자하신 하느님의 사랑 보다는 자신의 고집스러운 마음 때문에 은총과 평화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이 바로 방금 말씀드린 어리석은 상인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자신이 틀렸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고집스러움 때문에 끝까지 자신을 내세우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특히 가부장적인 사회 안에서 그 위치가 높은 경우에는 더욱 더 고집스러움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틀렸기보다는 자신들의 틀림을 고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권위주의를 털어버리기 보다는 자신들의 위치를 보장해주는 권위에 상처를 준 것을 참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멸망이라는 벌을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한 하느님의 나라에서 제외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멸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입시다.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일상의 편안함에 젖어 이웃의 아픔에 눈감고 살아가는 우리
-최금자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개최되었던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의 ‘생명과 평화의 아시아’ 코너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여러 편을 소개했습니다. 그 중에서 ‘작은 새’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이라크 전쟁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작품은 미국의 무차별 폭격으로 이라크의 선량한 시민들이, 특히 어린이들이 폭격으로 또는 불발탄을 가지고 놀다가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세 아이를 잃고 절규하는 아버지, 불발탄인지 모르고 만졌다가 한쪽 팔을 잃은 아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파편이 눈동자에 박혀 실명 위기에 놓여 있는 딸의 수술을 기다리는 아버지, 자식의 고통을 대신 겪는 것이 낫다고 절규하는 부모들. 이라크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전쟁으로 신음해야 하는지, 평화로운 시절이 다시 올 수는 있는지’라며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난한 백성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예루살렘이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될 것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평화의 길을 멀리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삼는 이 시대의 강대국들에게, 또한 일상의 편안함에 젖어 이웃의 아픔에 눈감고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바로 오늘
-백광현 신부-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오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늘뿐이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도 오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이라는 현재를 쾌락을 향유하는 유일한 시간으로 이해하라는 뜻의 쾌락주의와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오늘이라는 현재는 구원을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이기기 위한 메시아의 유일한 무기는 당신이 지녔던 가난과 겸손과 겸양뿐입니다. 이것은 참된 평화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평화가 평화의 도시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참된 평화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세상이 평화의 길인 당신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를 한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교만함과 아집으로 가득 찬 세상은 예수님을 참된 겸손과 평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도성 파괴에 대한 예언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도성인 우리 자신도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평화의 길을 걸어가지 못할 때 원수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 전영준 신부-
혹시 최근에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주일 저녁마다 눈물을 지을 일이 생깁니다. 주일 저녁에 해외 입양아와 친부모가 상봉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그렇게도 눈물이 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동생을 입양했기 때문에 그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이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미사는 퉁퉁 부운 눈으로 미사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비유라는 방법을 통해 쉽게 설명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잘못되는 자녀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우시는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요구하는 표징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해주십니다.
특히 이방인도 아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람들, 더욱이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셨겠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어린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부러 쉽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고,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모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말씀에 감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하는 단순한 신앙인의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옛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저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세속의 탐욕에만 젖어 살아간다면, 예수님은 그 옛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듯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 눈에 눈물 대신 웃음꽃을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성심에 눈물이 아닌 웃음을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 봅시다.
예수님 뚝!
-장재봉 신부-
지난 주일, 자신의 소명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았던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났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오늘 그것을 뗄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사도 요한은 그 좋은 하늘 나라에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울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그 자격을 갖추셨다”고 한 원로가 위로합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우리 눈물을 닦아주시는 곳이라는 걸 이사야 예언자는 벌써 옛날 옛적에 말씀하셨지요.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이사 25,8).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말씀은 꼭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눈물은 예수님 덕분에 멈출 수 있었는데, 예수님 눈물은 어떻게 멈춰드릴 수 있을까요? 어린양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받으시니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저마다 수금과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바쳐드렸습니다. 그 귀한 금 대접에는 우리의 기도가 가득 담겨 있다고 하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도 모자람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당신 사랑으로 빚으신 우리의 기도를 이토록 귀하게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시던 우리 예수님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할 수가 있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가 힘이 있는 까닭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이재화 신부-
교구청 관리국에서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세속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하게는 사제로서 익숙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어떤 가치관으로 일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강론 중에 교우들을 향해서는 너무나 쉽게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큰소리로 말했지만 막상 일을 하면서는 세상 논리가 더 크게 보이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면 주교님은 항상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방식으로 복음 정신으로 일합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주교님께서 현실 감각이 떨어져 쉽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할수록 그 말씀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느님의 길’이 아닌 ‘세상의 길’을 선택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예수님은 분명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보여주며 이것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고 설득력 있게 속삭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그 속삭임에 이끌려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세상의 길’로 걸어가곤 합니다.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고자 하는 결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신 ‘평화(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평화의 길
-이회진신부-
인도의 옛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 밑에 아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를 잘 이해해 주었고, 서로 서로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그 마을에는 싸움도 없었고, 다툼도 없었죠.
그들은 모두 신의 뜻에 의해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마가 이것을 보고 하느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악마는 하느님에게 “신이시여, 저 사람들이 항상 행복하리라 봅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그들은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보아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악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심통이 나서 “좋아요. 나하고 내기합시다.
나는 저 마을 사람들을 아귀다툼하는 인간들로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악마가 끈질기게 졸라대기도 했고,
사람들을 믿었기에 그럼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악마는 세 번의 기회를 얻어 사람들을 유혹하러 지상에 내려 왔습니다.
악마가 지상에 내려와 행복한 마을의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아귀다툼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을까하며 살펴보다가
한 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바로 보면서 서로가 그렇게 이해해 주고,
아껴주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빼앗아 히말라야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마을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매일 바로 보던 사랑의 힘이 없어졌기에 불안과 초조가 엄습했죠.
그래서 마을의 원로들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 “사랑의 마음”을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히말라야의 눈보라를 헤치고, 어떤 어려움도 다 물리치고는
그 “사랑의 마음”을 찾아왔죠.
악마는 마을 사람들이 “사랑의 마음”을 찾아가자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빼앗아 태평양 바다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특공대를 조직하여 오랜 고난과 시련 끝에
결국 이것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느님은 흡족해 하셨습니다.
악마는 고민에 빠졌고, 어떻게 하면 인간을 고통 속에 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그러다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랑의 마음을 산산이 부수어서
한 조각씩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랑의 마음을 조각내 행복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한 조각씩 넣어주자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공대를 만들어 세상 곳곳에 다 보내봐도
사랑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사람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그것이 한 조각 한 조각씩 들어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사랑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훔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마침내 살인을 해서라고 차지하려고 했죠.
히말라야의 행복한 마을은 이제 악마가 원하던 데로 아귀지옥이 되어버렸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하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불행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길은 “하느님의 뜻, 바로 구원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평화의 길은 “함께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하느님이 각자에게 보내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함께 사는 길”이 흔히 가장 크게 위협 받는 것은 사람의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누구나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랑과 행복을 “함께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의 길”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 저희를 평화의 길로 나서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참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윤경재 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 41-44)
어느 신심 깊은 노 화가가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중 성화 몇 작품도 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발길을 멈추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화폭은 평화스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감상하고 있었지만 그 화가가 말하는 메시지를 알려하기 보다는 색감과 터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거친듯하면서도 생략된 배경구도는 예수님의 얼굴을 평화롭게 나타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손에는 안타까움이 배어나왔습니다.
평론가들이 절묘한 빛의 흐름이라며 입에 침을 튀겨가며 칭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수가 실려 있다며 극찬합니다. 그런 칭찬을 듣는 화가는 기쁘지만은 않은 듯 입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몇 칠 후 전시회를 마칠 때가 가까워 오자 그림 구입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습니다. 특히 그 작품에 대한 문의가 많았으나 화가는 ‘개인소장용’이라는 딱지만 붙여 놓았습니다.
전시회 마지막 날 그 성화를 한참 지켜보던 어느 어린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소매를 당깁니다. 그러자 아이 아빠는 왜 그러냐며 아이 얼굴을 쳐다봅니다. 아이가 아빠 귀에다 할 말이 있다는 표시를 하니 그 아빠는 친절히 허리를 숙여 귀를 빌려 줍니다.
“아빠!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문을 열고 들어가셔? 문에 손잡이도 없이 열쇠 구멍만 있는데.......”
“글쎄다. 정말 그러네!”
이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던 그 화가는 슬며시 다가와 ‘팔렸음’이란 쪽지를 그 그림에 붙이고 나서, 그 부자에게 그림 증정권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나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받아드렸는지 또 그 메시지에 응답을 제대로 밝혔는지에 달렸습니다. 그 전엔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교류가 일어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림에 대해 잘 안다고 여겼던 수많은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실상 그 노 화가의 깊은 신앙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화가가 여태껏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래도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괴로워했던 것은 자신을 완전히 열어젖히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점을 가슴아파하며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한 발은 여전히 인간적 갈망에 내 딛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모든 것을 버렸지만 사회적 존경을 바라는 마음마저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자존심이 아니냐? 그것 때문에 인간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는 것 아니냐? 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려하는 자는 그것마저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든 직함을 다 내려놓고 이제 죽음이 가까워 질 나이가 되자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화가로 주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필생의 역작을 남기려 했던 노력도 주님 말씀에 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몰랐던 예루살렘”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만든 죄로 그들은 평화를 잃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참 평화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가운데 다가옵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자만 하느님께서 내 곁에 찾아오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향기를 온 누리에 퍼지게 하도록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이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넘쳐흐르게 하소서.
나의 전존재를
완전히 꿰뚫고 사로잡아
나의 모든 삶이 다만
당신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나를 통하여 비추시고
내 안에서 비추시어
내가 만나게 되는 모든 영혼이
당신의 현존을
내 영혼 안에서 느끼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더 이상
나를 쳐다보고
바라보지 않게 하소서.
-J. 리딕
우리는 당신이 그리워요,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카 19:41-44]은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장차 당할 재앙을 내다보시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는 탄식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토록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은혜를 내리셨지만 그 사정을 외면하는 결과가 어떠한 비극으로 끝나는 가가 드러나 있다.(예루살렘의 뜻 : 평화의 도시, 유일신을 믿는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도시, 유대교, 그리스도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슬람교 등, 유대인, 아랍민족의 공존 등).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지상에 대한 엄격한 심판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의 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여러 번 몸소 방문하시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시지 않았다면,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눈물을 흘리시면서 까지 장차 당할 멸망을 슬퍼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 교훈이 있다.
1)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벌주기를 더디 하시고 오랫동안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였고, 하느님이 보낸 자들을 돌로 쳐죽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마침내 자기 아들까지 보내주시어,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일러주었지만, 이를 거절하는 예루살렘의 죄를 마음 아파하시며 우시기까지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오늘의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외면하는 우리를 향해서도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
2) 예수님의 사랑의 호소를 볼 수 있다 : 예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강제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호소를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호소를 받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엄숙한 책임으로 그의 종말에 가서 나타나고 있다면 주님의 호소에 내 마음의 문을 얼마나 열어놓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3) 복음의 이야기는 인간 스스로 하느님을 알고도 외면하는 죄의 고의성을 드러내고 있다 : 사람의 마음의 문은 외부에서 열 수 있는 손잡이가 없음으로 안에서 열지 않으면 안돼는 것인데 사람들은 말씀과 기적들을 통해서 간곡히 호소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의 문을 닫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4) 결국 그리스도를 고의로 배척한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그때부터 40년이 지난 기원 후 70년(로마의 티투스장군에 의해)에 말씀대로 폐허가 되는 재앙을 당하는 역사적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호소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샬롬! 당신에게 평화 있기를
-이기양 신부-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경우를 몇 군데 볼 수가 있습니다. 친하게 지냈던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는 대목이 있고(요한11,35), 잡히시기 전날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시는 장면도(마태26,38)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예루살렘 도시를 보시며 한탄의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19,42)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은 무척 잘 꾸며지고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겉모습뿐이었고 이미 하느님을 떠나서 한 걸음 한 걸음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지요.
예수님의 통찰력대로 예루살렘은 기원 후 70년 경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멸망의 과정 중에 백만 명 이상의 유다인들이 학살을 당하였으며,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태24,2)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건물이란 건물은 모조리 무너지고 말았지요. 겨우 성전 벽의 일부분만이 남아 한 때의 영화를 전해 주고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19,42)
물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 ‘샬롬(Shalom)’을 뜻합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의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 ‘팍스(Pax)’였습니다. 무력으로 내리 누르고 힘으로 강제하여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예루살렘은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메시아 역시 로마와 같은 무력으로 자기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고 메시아인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바라고 고집했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로마보다 더 큰 힘으로 자기 민족만의 평화를 염원했기에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평화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곧 폐허가 될 성전 건물이 안타까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곧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유다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유다인들이 결국에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이지요. 실제로 열두 지파로 나뉘어져 있던 이스라엘은 다윗왕을 맞아 통일 왕국을 이루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번영을 누리고 태평성대를 이어갔지만 솔로몬왕 이후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왕국이 분열되어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바빌론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요. 그리하여 전해져 온 생명과도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으고 정리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몇백 년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안타까운 길을 가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신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70년 경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1948년 지금의 자리를 찾기까지 약 2500년이라는 긴 기간을 안타까운 광야에서 망국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보다 세상이 주는 평화를 그리워했던 결과는 이렇게 큰 시련과 멸망의 아픔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비단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여기저기에서도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했을 때와 세상이 주는 평화를 원했을 때의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알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께 <성경 쓰기>, <신심서적 100권 읽기>, <기도 학교>, <이웃돕기> 등 많은 방법들을 제시했고, 그 방법을 잘 따라와 맛을 들인 분들이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였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거듭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 쓰기를 하면서 주어진 삶이 고맙고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는 체험을 했던 기억들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심서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을 때의 넘치는 감사, 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기에 거기에 머무르기를 갈망했지요. 또, 이웃돕기를 통해서 아홉 개 구역 전 신자들이 그동안 체험했던 보이지 않은 하느님 사랑을 이웃돕기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욕망을 채우려고 애쓰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것들에 매달리게 되지요. 돈이나 자식, 건강이나 외모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태웁니다. 돌고 돌아 돈이라는 말처럼 돈은 내 주머니에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말지요. 거기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자식이나 건강, 외모도 마찬가지이지요.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젊음을 지켜 보려고 기대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식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때가 되면 어린 새가 어미의 둥지를 떠나듯이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도 떠나고 빈자리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 따라 변해가는 세상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시대가 이리도 불안하고 힘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것에서 평화를 고대하고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가 무력으로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갈망했던 것과 같지요. 그러나 그런 거짓 평화는 결국 무력으로 망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 안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갈증도, 상처도, 고립도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신자이면서도 거짓 평화에 연연해 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안타까운 눈물이 그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당될 것입니다.
참 평화는 주님 안에 있으며 오시는 주님을 고대할 때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한탄하셨던 것은 참 평화를 가지고 오셨지만 유다인들의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처형하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유다인들은 2500년이 넘게 시련과 광야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지요.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세상이 평화를 줄 수 있다고 느낄 때 그것은 유혹이며 유혹의 결과는 시련과 멸망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 말씀 안에 머무르며 참 평화를 누리시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길
-이찬홍 신부-
복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단순히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바라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마음에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성전 파괴에 의해 심각한 피해, 재난, 생명을 잃는 그 무시무시한 재앙에 힘들어할 사람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목숨과도 같은 하느님의 성전이 파괴될 위험이 다가 왔는데도, 그 무사 안일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는 그 무디어진 마음에 안타까워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실제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얼마 되지 않아, 곧 70년경에 멸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이 패망한 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이 파괴되어 의지할 곳 없어 가슴아파하는 심경을 노래한 시편이 있습니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위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놓고서
우리를 잡아 온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 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고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위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지내면서 불렀던 노래로서 시편 137편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루살렘에 살았을 때에는 그 특별함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예언자들이 ‘회개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예루살렘이 망한다.’ 라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온갖 불의와 우상 숭배, 타락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외면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네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항상 지켜 주실 것이라는 거짓 예언자들의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결국 그리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의 함락이라는,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예루살렘의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오죽했으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너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고, 내 오른 손이 말라버릴 것이다”하고 말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정말 소중한 곳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이요,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요,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렇게 소중하고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임에도... 막상 예루살렘 안에서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의 의미와 고귀함을 온 마음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이 패망해 버린 후에, ‘아 하느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버리다니,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경배를 드릴 때는 참 좋았는데... 왜, 거짓 예언자들의 말만 믿고 그리 안일하게 살아갔는지...’ 라는 반성을 하였지만... 그토록 시편 137편을 읊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패망을 예견하시며 눈물을 흘리시지만.. 이런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아 그러지 말아야 했었는데...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는 ‘아 옛날이여, 지난 시절 다시 올 수 없나. 그날, 그날이여!’ 라는 노래 말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그것도 두 번이나, 파괴되어 버린 뒤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 삶이 있습니다. 좋고 행복할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자신이 살아가는 삶, 모습이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가 그것을 잃고 나서야, ‘아 그 때 그러지 말걸... 사람들의 충고와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호소하는 것을 들을 걸...왜 그 때 그러지 않았을까’ 라며 후회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깊은 절망과 억장이 무너지는 체험들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요, 후회는 우리의 후회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악순환 되는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잃어버리거나, 파괴되는 위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수님께서 알려주는 “평화의 길”의 의미는 아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하느님 백성이라는 품위...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늘 내적인 평화와 행복, 삶의 의미와 보람을 알게 되고 이에 대한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 이를 남에게 전해주는 그러한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점... 이란 면 안에서 살펴보아야 참된 평화의 의미일 것입니다. 때문에, “평화의 길”은 화답송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네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곧, ‘네가 주님과 함께 살아가니, 늘 주님의 눈으로 보려하고, 늘 주님의 귀로 들으려 하고, 늘 주님의 입으로 말하려 하고, 늘 주님의 마음으로 느끼려 노력하는 것이 바로 평화의 길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정말, 마음이 무디어져 버리는 것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나도 쉽게 돌처럼 단단해져 버립니다. 때문에, 늘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돌처럼 무디어져버린 제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소서’ 라는 기도를 자주 드리며 지냈으면 합니다.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박상대신부-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금화를 맡긴 종들의 비유’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고 했다.(28절) 이로써 루가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19,29-24,53)가 시작될 것이고, 이로써 예수님의 공생활도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향한 성대한 입성(入城)과 함께 시작된다.(19,29-40) 우선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산 너머에 있는 베파게와 베다니아 근처에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올리브산을 넘어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턱에 이르러 행렬을 멈추셨다. 여기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한 불행을 예고하신다.
바로 이곳, 올리브산 정상에서 가파른 경사를 따라 키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성도(聖都)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주님께서 우셨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우리에게는 ‘눈물성전’으로 알려져 있다. 5세기부터 수도원이 있었던 이 자리에 세워진 ‘눈물성전’은 1955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루치가 설계하여 완공한 것으로서 성전의 지붕을 눈물방울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제로 성지순례를 가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코스를 걸어보면 만감(萬感)이 교차한다. 베파게에서 올리브산 정상에 이르는 코스를 걸으면서 묵상하면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시끄럽게 들린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도와 성전이 한눈에 들어오면 갑자기 고요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비탈길을 내려와 눈물성전에 이르면 당시 예수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고 만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마태 21,1-9; 마르 11,1-10; 루가 19,29-40)과 성전정화 사건(마태 21,12-17; 마르 11,15-19; 루가 19,45-48; 요한 2,13-17) 사이에 삽입되어, 눈물과 한탄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내용의 오늘 복음은 루가만이 전하는 고유사료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울음에 관한 보도는 모두 세 곳인데, 라자로의 죽음을 향한 울음(요한 11,35), 하느님께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심(히브 5,7), 그리고 오늘 복음의 예루살렘을 향한 울음이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42절)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비통한 눈물과 한탄은 그분의 착잡한 심정을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요란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그리고 그 성도를 대표하는 무리들. 예수를 반대하는 예루살렘 성도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메시아의 영광은 없다. 기적의 시간도 모두 끝이 났고, 평화의 날들도 모두 지나갔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때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전쟁과 멸망과 심판이다. 실제로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율법에의 충성이 예수께 대한 믿음과 회개를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율법만능주의가 그 믿음을 방해하였다. 예수님의 비통한 눈물과 한탄이 오늘날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진정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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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