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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탄서원기(溪灘書院記)》는 예전에 대충 읽고 지나쳤다. 평상시 보고도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後)에 새로운 것이 보인다는 것은 발전(發展)일 것이다.
노수신(盧守愼)은 젊은 시절에 충주에 살던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을 찾아 스승으로 모시고 학업에 매진하였고 사위가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 훗날 영의정까지 올랐다. 전남 진도(珍島)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잠시 괴산에 1년간 이배(移配)되기도 하였던 인연으로 충주와 괴산에 관련된 한시(漢詩)가 다수 전한다. 이는 다음에 소개한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사백년도 더 전에 쓰여진 글이지만 충주 일대의 지형(地形)이 크게 바뀐 것이 아니므로 노수신의 《계탄서원기》에 나오는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글만 보아서는 오해하기 쉽다. 실물을 봐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의견을 달았다.
계탄서원(溪灘書院)은 검암서원(劍巖書院)이라고도 하고 충주시 대소원면 수주팔봉(水周八峰)에 있는 팔봉서원(八峰書院)을 말한다. 1582년(선조 15)에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이자(李耔) · 이연경(李延慶)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1612년(광해군 4) 김세필(金世弼) · 노수신(盧守愼)을 추가 배향하였다. 《계탄서원기》를 쓴 노수신(盧守愼)은 이연경(李延慶)의 제자이자 맏사위가 된다.
이연경과 이자에 관련된 자료는 《한국고전번역원》에 있는 것을 옮겨 맨 아래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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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穌齋集), 노수신(盧守愼)
소재집 제7권 / 기문(記)
계탄서원기〔溪灘書院記〕
원문
《溪灘書院記》
院于(子로 써있으나 원문에는 于字가 맞다. 이미지에 보이는 소재집 목판본의 于字나 子字를 비교하면 확인할 수 있다. 字形이 다르다. 子字는 첫획이 꺾였음을 볼 수 있다. 院子로 쓰면 子는 접미사가 된다. 그런데 어색하다. 하지만 院于溪而로 쓰면 문맥이 자연스럽다.)
溪而聯灘爲號。尊同也。嶽三山之東曰俗離。頂有水。分派西流而北。爲槐津。抵中原治南。南北山夾之者兔溪也。迤風流山下。峭壁巉峯。束聳環列二三里者劍巖也。霧豹雲虬。錦屛玉鏡。紆上下而映左右。綿亘不可斷。經細浦歷獐項。至丹月。部曲而峽盡。爲峽窈而爽。闢而廓。眞隱者所盤旋者。天作而地秘之者幾劫。己卯禍起。韓山李先生參贊公退寓雪城。濯纓于溪而樂之。輙卜其北岸。直壓劍面。搆屋以居。廣陵李先生校理公同時而擯。仍卜小築龍灘上。灘折西下而溪之獺川會其左。或欲乘興而往焉。則便從一力挐艇泝洄。可不暮而聞剝啄矣。嘗以溪翁灘叟相命。每月扉風欞。淸坐晤語。熟玩圖書。參訂古今。若將終身。不知老至。斯豈非二先生會心之境也歟。不幸未幾。相繼易簀。苔蝕側礎。兔窟荒蹊。過者愴然。爲斯文羞久矣。歲壬午春。監司金侯宇宏。唶迹之亡。謀諸牧伯李侯。選推州士數輩。相故宅之北。因其向背而董之役。後倅劉侯漢忠吳侯澐。踵而用力。克底于成。其制則先建廟以奉二先生。曰崇德。次講堂。曰好懿。次齋。東曰明誠。西曰敬義。遂繚以坦而門之。合扁曰溪灘書院。顧而四望之。峽裏煙霞水石。盡爲一院之有矣。未敢知大老之靈以爲如何。今金侯偉聞而說之。將究厥績。夫五君子者。殆能有以風厲而作興之。亦休矣夫。 王子師傳康復誠實主院事。屢屬余文以記之。余惟書院奚爲而創。乃就鄕賢藏脩地。爲學祠者也。思昔子朱子欲以待夫不屑科試之士。而今世非之。豈不以不可與鄕校竝歟。殊不念古者閭黨皆有學。況此特家塾遺意。且其所以稱書。蓋曰是庋書之所云爾。書也何書。亦聖賢之籍也。聖人去矣。不籍之考。何所尋其緖而得其心。如使買其櫝而還其珠。又因以爲利。誠不若無籍之爲愈也。幸而有志。亦曰。考其籍而效其爲而已。爲之何以。其事曰。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其法曰親義別序信。其功曰。學問思辨行。然其大要。亦只是求其放心而已矣。竊願遊是院者。進而瞻乎廟。以致尊尙之義。退而聚乎堂。以盡講究之實。齋乎坐尸如也。門乎出賓如也。造次必于是。顚沛必于是。異時處約處泰。遇險遇夷。無入而不自得焉。夫如是。始是讀書人。豈不懿乎哉。嗚呼。弟子今老矣。朝夕乞骸而歸。常欲泊灘(氵往, 글자가 깨지는데 往의 이체자다.)溪。復識江山之勝。新窺堂室之好。以償宿債。耿耿難了。顧鍾鳴漏盡。矯首南悲。猶以托名姓楣間爲自慶。於是乎書。赤拘夷則歸德。後學盧守愼謹記。
번역문
《계탄서원기(溪灘書院記)》
토계(兔溪)에 서원을 세우고 용탄(龍灘)과 연계하여 이름을 지었으니, 존귀함이 같기 때문이다.
[※원문은 [院于溪而聯灘爲號。尊同也。]이다.
풀이하면 [서원(院)이 시내에 있고 연달아 여울(灘)이 이어지므로 이로써 이름(號, 溪灘)을 삼았다. 존귀(尊貴)함이 같기 때문이다.]이다.
아래 주(註)에는 서원이름을 계탄(溪灘)이라 한 것은 계옹(溪翁)인 이자(李耔)와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號를 딴 것으로 풀이한다. 尊同也라는 표현을 보면
잘못된 것은 아니라 본다. 무정물(無情物)인 溪와 灘이 존귀한 것이 같다는 표현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스승인 이연경(李延慶)과 막연한 벗인 이자(李
耔)의 호를 따서 서원 이름을 지은 것이 맞다. 또 溪灘은 여울이 있는 계곡(溪谷)의 뜻이니 서원이 있는 곳의 풍경을 잘 표현하였다.
이자(李耔)는 1480년(성종 11)에 태어나 1533년(중종 28)에 사망(54세)했고 음애(陰崖)라는 號도 있다. 이연경(李延慶)은 1484년(성종 15)에 태어나 1548년(명종 3)에 사망(65세)했고 용탄자(龍灘子)란 號도 있다. 이연경이 네 살 어리고 15년 더 살았다.
이연경(李延慶)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1504년 갑자사화(연산군 10)에 연루되어 연좌제로 섬으로 귀양갔고 1518년 현량과를 통해 관직생활을 했으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연루되어 축출될 뻔했으나 귀양은 면했다. 이후 충주 북촌(北村)에 낙향하였다. 충주 북촌은 지금 금가면 유송리(遊松里)이고 선대의 농막(農幕)이 있었다 한다.]
삼산(三山,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현(報恩縣) 郡名이 三年山, 保齡, 三山, 保令이다. ) 동쪽에 솟은 산을 속리산(俗離山)이라 하는데, 정상에서 발원한 물이 갈라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여 괴진(槐津, 槐津은 느티나루로 槐山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괴산군 산천(山川) 항목에 槐津。在郡東七里。卽忠州達川之上流。라고 나온다.)이 되고 중원(中原, 충주의 古號)의 치소(治所) 남쪽에 이르러 남북의 산골짜기로 흐르는 것이 토계(兎溪, 兎溪는 문맥을 보면 지금 수주팔봉 일대를 흐르는 達川을 말한다. 漢字가 다르지만충주시 살미면 토계리(土界里)는 팔봉마을(八峰村) 강건너편 일대를 말한다. 토계(兎溪)가 훗날 토계(土溪)로 바뀐것 같은데, 토계(土界)의 뜻은 땅의 경계, 달리 지경(地境)의 뜻으로 봐야 한다. 토계(土界)도 오래된 지명인데 이름대로 복잡하게 여러 곳에 속했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을 보면 연풍군(延豊郡) 수회면(水回面)에 속했다.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을 보면 괴산군 상모면(上芼面)에 속했다. 이는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괴산군 상모면은 1963년 중원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 상모면 문강리, 토계리는 살미면에 편입되었다.
여기 《계탄서원기》에는 토계(兎溪)라고 썼다. 노수신(1515년 ~ 1590년)은 조선시대 1500년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가까운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 토계(兎溪)울 마을이 있는데, 최근에 LNG발전소가 들어선 마을이다. 청주로 가는 충청내륙고속화도로를 달리다 보면 음성군 읍내에 이르면 토계울1, 2터널이 있는데 토계울 마을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본 마을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다.
일제시대에 나온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음성군編을 보면 <토기여울>이라 했다. 토끼여울을 줄여 토계울, 토계(兎溪)라고 쓴 것이다. 마을 앞을 음성천(陰城川)이 흐르는데 실지로 보면 여울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로 작은 하천이다. 작은 여울을 <토끼여울>이라 했고 작은 시내(溪)를 토계(兎溪)라고 썼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살미면 토계리와 대소원면 문주리 사이를 흐르는 달천(達川)은 강폭이 작지는 않다. 이와 비교되는 지명으로 문경시(聞慶市)에 <토끼베리, 토끼벼루>가 있다. 토끼나 다닐만한 작은 벼룻길을 말한다. 한자로 토천(兎遷)으로 쓴다.)이고, 풍류산(風流山) 아래를 연하여 깎아지른 벼랑과 가파른 봉우리가 묶음으로 솟아 2, 3리(里)에 빙 둘러 있는 것이 검암(劍巖, 칼바위)이다.
안개 속 표범과 구름 속 규룡 및 비단 병풍과 옥거울처럼 아름다운 산수가 아래위로 감돌고 좌우로 비추며 끊임없이 연(連)이어져 있는데, 세포(細浦, 세포는 싯계를 말한다. 생각보다 오래된 지명이다. 싯계를 한자로 옮긴 것이 세포(細浦)인데 소태면 덕은리에도 세포(細浦)가 있다. <가늣개>를 한자로 옮겨 세포(細浦)라 썼고, 충주에도 많이 있던 지명인데 사라지고 있다. 앙성면 본복, 엄정면에도 있는 소지명(小地名)이다.
싯계와 관련 《충주의 지명 시결(동량면 지동리)과 싯계(살미면 향산리) ---- 일제시대 지도.》에 써놓았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기 바란다.)를 지나고 장항(獐項, 노루목)을 거쳐 단월부곡(丹月部曲)에 이르면 협곡(峽谷)이 다하여, 골짜기가 그윽하면서도 시원하고 확 트여 넓어져서 참으로 은자(隱者)가 소요하며 지낼 만한 장소이니,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둔 지가 몇 겁(劫)의 세월이었다.
(원문은 霧豹雲虬。錦屛玉鏡。紆上下而映左右。綿亘不可斷。經細浦歷獐項。至丹月部曲而峽盡。爲峽窈而爽。闢而廓。眞隱者所盤旋者。天作而地秘之者幾劫。인데 至丹月部曲而峽盡。에서 끊어서 번역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계탄서원 일대를 묘사한 것이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 이 선생(李先生) 참찬공(參贊公)이 물러나 설성(雪城)에
설성은 陰城의 古號다. 이 부분과 관련 어설프지만 《음성군 역사 관련자료(雪城) ---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국립중앙도서관.》에 써놓았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 바란다.
三山, 中原, 雪城, 貴德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郡名이라 나오는데 古號라기도 한다. 또 別號라고 한다. 이게 뭔 말인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소개할 것이다.)
우거(寓居)하며 토계에서 갓끈을 씻고 즐거워하다가 문득 그 북쪽 언덕에 터를 잡고 검암(劍岩)을 곧장 굽어보는 자리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광릉(廣陵) 이 선생 교리공(校理公)도 같은 시기에 파직된 후 용탄(龍灘) 가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용탄은 꺾어져 서쪽으로 내려오고 토계는 달천(獺川)으로 흘러가 왼쪽에서 모이는데(灘折西下而溪之獺川會其左。), 간혹 흥이 나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문득 종 한 명을 데리고 거룻배를 저어 거슬러 올라갔으니, 저녁이 되기 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或或欲乘興而往焉。則便從一力挐艇泝洄。可不暮而聞剝啄矣。) 한 명의 하인(一力)에게 배를 젓게 하여(挐艇) 물줄기를 따라 올라간다(泝洄)란 뜻이다. 금가면 유송리(遊松里)에서 달천을 거슬러 팔봉마을까지 배를 저어 올라간다고 했는데 지금 지형을 살펴보면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괴산군 불정면 목도(牧渡)까지 소금배가 올라갔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수주팔봉 팔봉마을까지 직선거리가 약 10km정도 된다. 달천은 굽어 흐르니 실제거리는 16km 된다고 한다. 두 지점간 해발고도는 20m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하고 하천 경사도는 1/700에서 1/1,000이라 하는데, 700m 흘러갈때 1m나, 1km 흘러갈때 1m 정도 낮아지는 걸 의미한다. 100m 내려갈때 10cm(14cm), 10미터 내려갈때 1cm(1.4cm)가 낮아진다는 것인데 실제로 보면 편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군데군데 여울이 있었고 물이 깊은 호소(湖沼)가 있었다. 문제는 수심(水深)과 유속(流速)일 것이다. 조선시대 한선(韓船)은 배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低船)이라 하는데 작은 거룻배는 수심 50cm여도 충분히 운행이 가능하리라 본다.
일찍이 계옹(溪翁, 이자)과 탄수(灘叟, 이연경)가 서로 불러 매번 달 밝은 밤이면 바람 부는 창가에 편안하게 앉아 다정히 담소를 나누었는데 도서(圖書)를 익숙하게 완미하고 고금을 참정(參訂)하매 일생을 마칠 듯이 하여 늙어 가는 줄도 알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두 선생께서 마음이 합치했던 경지가 아니겠는가. 불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이끼가 침식하고 건물이 기우는 등 유적이 황폐해져서 지나는 사람들이 서글퍼하였으니, 사문(斯文)의 수치가 된 지 오래되었다.
임오년(1582, 선조15) 봄에 감사(監司) 김우굉(金宇宏)이 유적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목백(牧伯) 이선(李選)과 상의하고 주(州)의 선비 몇 사람을 추천하여 고택(故宅)의 북쪽을 살핀 뒤에 그 좌향(坐向)에 따라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후 목사 유한충(劉漢忠)과 오운(吳澐) 등이 뒤를 이어 조력하여 낙성(落成)할 수 있었다.
그 제도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묘우(廟宇)를 건립하여 두 선생을 봉안하고 ‘숭덕(崇德)’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강당을 지어 ‘호의(好懿)’라 명명하고, 그 다음 재사(齋舍)는 동재(東齋)를 ‘명성(明誠)’이라 하고 서재(西齋)를 ‘경의(敬義)’라 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마침내 담장을 두르고 문을 만들고 나서 합하여 ‘계탄서원’이라 편액하였으니, 돌아서 사방을 바라보면 골짜기 안의 연하(煙霞)와 수석(水石)이 모두 서원의 소유가 되었다.
※전원에 집을 짓는다면 누구나 주변 경치를 염두에 두고 지을 것이다. 이는 절이나 누정(樓亭), 서원(書院)도 마찬가지다. 건물을 앉히는데 있어 주변 경관과의 조화는 물론 건물에 사는 사람이 주변 풍경(風景)을 바라보기 좋게 마루나 거실, 창호(窓戶)를 설계할 것이다. 이를 전통건축에서 차경(借景)의 원리(原理)라 한다. 차경(借景)이란 주변 경치를 끌어 들인다는 뜻이다.
이와 좀 다른 얘기지만, 월악산 덕주사 마애여래입상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전설이 있으나 절의 앉음새로 설명해야 한다. 내가 만일 두 불상을 조성한다면 어떠할까? 지금 모양과 방향으로 조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덕주사 마애불은 천연 암반을 깎은 것이고, 주변 산세를 보아 미륵리 석불도 지금 방향으로 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륵리 석불의 경우 남쪽이 막히고 북쪽으로 좁은 골짜기가 터졌는데 당연 북향(北向)으로 석불을 조성할 것이다. 실제 두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은 지도를 보더라도 빗나간다. 이 각도를 한 번 알아 보자.
지도상에서 재보니 두 불상은 직선거리로 약 5.4km 떨어져 있다. 수평거리다. 미륵리 석불은 해발 약 380m, 덕주사 마애불은 해발 약 700m 높이에 있다. 대략 320m 표고(標高) 차이가 난다. 둘 사이는 5.4km로 먼 수평거리이므로 경사각은 3.39°이고 사선거리는 9.5m가 더 긴데 수평거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 사선(斜線)거리는 두 불상을 잇는 가상의 직선거리를 말한다.
실제 불상이 바라보는 정면 방향을 보면,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틀어진 북동 10°~15° 방향을 향하고 있고, 덕주사 마애여래입상은 거대한 자연 화강암 암벽에 조각되다 보니, 암벽 면의 각도에 따라 남남서쪽(약 200°~210°)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정남(正南) 180°에서 20° ~ 30°서쪽이다.
지리적 방위각 (서로를 향하는 직선)을 살펴보면,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에서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는 직선 방향은 북북동쪽 (약 15° ~ 20°)이고, 반대로 덕주사 마애불에서 미륵리 석불을 바라보는 직선 방향은 남남서쪽 (약 195° ~ 200°)라고 한다.
덕주사 마애불이 미륵리 석불을 바라보는 시선 각도 차이는 5°~10° 내외로 매우 근접하게 맞추어져 있고, 미륵리 석불은 그보다 조금 더 틀어진 15°~20° 정도 비껴 있다고 한다. 이는 덕주사 마애불이 높은 위치에 조성되다 보니 근접하게 미륵리 석불 위치를 바라본 것 같다.
그리고 덕주사 본사(本寺)에서 떨어진 상덕주사(上德周寺)는 해발 700m 고지(高地)에 있다. 이곳에 마애불이 있는데 당연 미륵리 대원사지보다 훗날 조성한 것이다.
미륵리 석불이 있는 미륵대원지의 석굴 감실의 중심축과 주변 석조물의 주축은 남북으로 조성되었다. 미륵불과 조금 북쪽에 있는 미륵리 오층석탑을 일직선으로 그어보면 남북 방향이다.
미륵리 석불에서 정북쪽으로 5.4km 올라간 위치는, 덕주사 마애불에서 정서쪽 방향으로 약 1.4km ~ 1.85km 떨어진 지점이 된다. 실제로 5.4km 전방 목표물을 보고
약 1.4km ~ 1.85km 떨어진 곳이면 상당한 거리다.
그럼 마주보고 있다는 전설은 막연한 얘기가 된다. 덕주공주인 미륵리 석불이 마의태자인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의태자인 덕주사 마애불이 덕주공주인 미륵리 석불을 애달프게 멀리 굽어보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무엇보다도 미륵리 석불은 곱상한 여인네의 모습으로 지긋이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숙인채 삼매경(三昧境)에 들어서 있다.
감히 알지 못하겠다. 대로(大老)의 영령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이제 목사 김위(金偉)가 서원이 낙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장차 그 사적을 이루려 하니, 대저 이상의 다섯 군자가 거의 풍속을 고무하여 흥기한 점은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왕자사부(王子師傅) 강복성(康復誠, 아래 註를 보면 노수신은 강복성의 큰이모부가 된다. )이 실로 서원의 일을 주관하였는데, 여러 차례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서원은 무엇 때문에 창설했는가? 바로 고을의 현인들께서 은거하며 수양하던 땅에 학사(學祠)를 건립한 것이다. 생각건대 옛날 주자(朱子)는 과시(科試)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선비들을 기다리고자 하였는데 지금 세상에서는 옳지 않다고 여기니, 어찌 향교(鄕校)와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는 자못 옛날 여(閭)와 당(黨)에 모두 학교를 두었던 일을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이는 단지 가(家)에 숙(塾)을 두었던 유의(遺意)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또 서원이란 명칭에서 ‘서(書)’ 자는 대체로 서적을 보관하는 장소를 말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서적이란 무슨 책을 말하는가? 또한 성현의 서적을 의미한다. 성인(聖人)은 이미 떠났으니 서적을 상고하지 않으면 어디서 그 단서를 찾아 그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만일 상자만 사고 그 속에 담긴 구슬을 돌려주고 나서 다시 이것이 이익이라고 여긴다면, 참으로 서적이 없는 편이 나음만 같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지사(志士)가 있어서 또한 말하기를 “그 서적을 상고하여 그 행실을 본받을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행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일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를 말하고, 그 법(法)은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하며, 그 공(功)은 박학(博學)ㆍ심문(審問)ㆍ신사(愼思)ㆍ명변(明辯)ㆍ독행(篤行)을 말한다. 그러나 그 대요(大要)는 또한 달아난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삼가 원하건대 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나아가 묘우를 우러러보아 존숭하는 의리를 다하고, 물러나 강당에 모여 강구(講究)하는 실상을 다하며, 재사(齋舍)에 앉아 있을 때에는 시동(尸童)처럼 하고, 문밖을 나가 사람을 대할 때에는 큰 손님을 대하듯이 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고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면 다른 날 곤궁하고 위험한 처지를 만나거나 태평하고 편안한 처지를 만나더라도 들어가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대저 이렇게 해야 비로소 책을 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오호라, 제자는 이제 늙었기에 조만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辭讓)하고 물러남)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니, 항상 용탄과 토계에 가서 다시 강산의 승경을 확인하고 친히 당실(堂室)의 아름다움을 엿보아 묵은빚을 갚으려 하지만 애타는 마음을 다하기가 어렵다.
(嗚呼。弟子今老矣。朝夕乞骸而歸。常欲泊灘(氵往, 글자가 깨지는데 往의 이체자다.)溪。復識江山之勝。新窺堂室之好。以償宿債。耿耿難了。)
※여기서 번역한 분은 <항상 용탄과 토계에 가서>라고 했는데 문맥상 <늘 여울에 배를 대고 시냇가를 거닐고자 하였다>가 맞다고 생각한다. 바로 뒤에 나오는 당실(堂室)이란 계탄서원을 말한다. 이 글은 주제가 계탄서원기이다.
그리고 번역한 분의 노고는 잘 알겠는데 龍灘은 지금 충주시 용탄동이 아니고 금능동 능바우 앞 남한강 일대를 말한다. 灘叟 혹은 龍灘子라고 號한 李延慶은 지금 금가면 유송리(遊松里)에 살았다고 한다. 용탄동(龍灘洞)은 1914년 용골(龍谷)과 가린여울(岐灘)에서 한 글자씩 딴 法定里이다. 이 분이 註한 걸 보면 전부 잘못 적어 놓았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을 보면 지금 충주시 용탄동은 충주군 북변면에 속했는데 기탄리(岐灘里, 가린여울), 구동(臼洞, 확골), 용동(龍洞, 용골), 사라곡동(沙羅谷洞, 사래실)이 보인다. 용탄동은 충주산업단지가 들어서서 가린여울, 확골은 폐동(廢洞)되다시피 했다.
돌아보건대 저녁 종이 울리고 해시계의 물이 다한 것처럼 늙은 나이에 머리 들어 남쪽을 바라보며 슬퍼하면서도 오히려 서원의 기문을 부탁받은 것을 스스로 경사로 여기나니, 이에 기문을 적는다.
병술년(1586, 선조19) 5월에 귀덕(歸德, [신증동국여지승람] 尙州牧 郡名에 상주(上州)ㆍ상락(上洛)ㆍ사량벌(沙梁伐)ㆍ사벌(沙伐)ㆍ상산(商山)ㆍ타아(陁阿)ㆍ귀덕군(貴德軍)라 했다. 노수신은 尙州 出身이다.)의 후학(後學) 노수신은 삼가 기문을 짓다.
[주-D001] 계탄서원(溪灘書院) : 이자(李耔)와 이연경(李延慶)이 기묘사화 이후 충주(忠州)에 은거한 뒤 소요하며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에 지은 서원으로, 이자가 거주하던 ‘토계’와 이연경이 살던 ‘용탄’을 조합하여 지은 이름이다. 검암서원(劍巖書院)이라고도 한다. 1672년(현종13)에 팔봉서원(八峯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주-D002] 토계(兔溪) : 이자가 만년에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이자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ㆍ몽옹(夢翁)ㆍ계옹(溪翁),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들과 어울려 도학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면서도 급진적 개혁 정책을 완화하여 훈구(勳舊) 세력과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뒤 김세필(金世弼), 이연경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소재도 17세 무렵에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주-D003] 용탄(龍灘) : 소재의 장인이자 스승인 이연경이 만년에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주-D004] 삼산(三山) : 충청북도 보은(報恩)의 이칭이다.
[주-D005] 중원(中原) : 충청북도 충주(忠州)의 고호(古號)이다.
[주-D006] 갓끈을 씻고 : 세속을 초탈하여 고결하게 살아가는 삶을 비유하는 말로,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어도 좋으리라.”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上》 《楚辭 卷7 漁父》
[주-D007] 강복성(康復誠) : 1550~1634. 소재의 동문(同門)이며 동서 간이기도 한 강유선(康惟善)의 아들로,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암회(巖會)ㆍ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이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평 군수(富平郡守), 성주 목사(星州牧使)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주-D008] 주자(朱子)는 …… 하였는데 : 주희(朱熹)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할 때 학규(學規)를 제정하고 나서 “내가 삼가 살피건대 옛날 성현들이 사람에게 학문을 하도록 가르쳤던 뜻은 의리를 강명(講明)하여 자신을 닦은 뒤에 이를 미루어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었지, 한갓 많이 보고 억지로 기억하거나 문장을 공부하여 명성을 얻고 이록(利祿)을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학문하는 것은 이와 반대이다.” 하였다. 《晦庵集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주-D009] 가(家)에 …… 유의(遺意) : 옛날에 행정 구역마다 교육 기관을 두었다는 말로,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은 가에는 숙을 두고 당(黨)에는 상(庠)을 두고 술(術)에는 서(序)를 두고 나라에는 학(學)을 두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0] 상자만 …… 나서 : 정작 중요한 것은 취하지 못하고 껍데기만 취하는 경우를 비유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이 옥으로 꾸미고 향기를 쐰 목란(木蘭) 상자에 보배 구슬을 담아 정(鄭)나라에 가서 팔자, 어떤 사람이 상자만 사고 구슬은 돌려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非子 外儲說左上》
[주-D011] 달아난 …… 것 : 흩어져 산란한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라는 의미로, 맹자가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달아난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告子上》
[주-D012] 재사(齋舍)에 …… 하고 : 엄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다는 의미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앉는 것은 시동처럼 하고, 서는 것은 재계할 때처럼 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13] 문밖을 …… 하여 : 문밖에 나가서 사람을 대할 때에는 손님을 대접하듯이 경건한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는 말로, 《논어》 〈안연(顔淵)〉에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보는 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적에는 큰 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해야 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4] 들어가는 …… 것이다 : 어떠한 환난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태연히 대처한다는 뜻으로, 《중용장구》 제14장에 “군자는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 환난에 처해서는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니, 군자는 들어가는 곳마다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5] 귀덕(歸德) : 소재의 고향인 상주(尙州)의 고호이다.
院于인지 院子인지 활자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오른쪽 朱夫子, 아래 이미지 君臣父子를 보면 字形이 다르다.
《溪灘書院記》목판본 이미지.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참고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추록(追錄)에
[<이연경 전(李延慶傳)>
좌랑 이연경은 갑진생(1484년)이고 자(字)는 장길(長吉)이며, 벼슬은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광주(廣州)가 본관이며 서울에 살았고, 도사(都事) 이수원(李守元)의 아들이다.
보유 : 연산조(燕山朝)에 공의 조부인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 및 제부(諸父 삼촌)들이 모두 화를 당했고, 공도 역시 섬에 귀양갔다. [중략] 갑술년(1514년)에 모친을 모시고 충주(忠州) 북촌(北村)에 있는 선대의 농막(農幕)에 거처를 정하였다. [중략] 사위 노수신(盧守愼) 의정(議政) ㆍ강유길(康維吉) 생원 ㆍ심건(沈鍵) 정자(正字) ,양자(養子) 이호약(李好約) 현감,외손(外孫) 심희수(沈喜壽) 문과 ㆍ심창수(沈昌壽) 부장(部將) ㆍ강복성(康復誠) 진사 이 있다.] 라 써 있다.
*문봉집(文峯集) /제 5권.(조선 전기 문신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 ~ 1576년(선조 9)의 문집)한중필록〔閑中筆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연경(李延慶)은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7세손이다. 일찍이 기묘년(1519) 현량과(賢良科)에 합격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현량과가 없어지자 물러나 중원(中原 , 충주(忠州))에 머무르며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고, 벼슬길에 나갈 생각도 없었다. 오직 노래를 읊조리고 물고기를 낚는 것을 일삼았다. 항상 성현을 존모하였고 예(禮)로써 스스로를 단속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덕을 높이 여겨 이 교리(李校理)라고 불렀다. 정미년(1547)에 찬성 권벌이 유배를 가면서 중원의 금탄강(金灘江) - 공의 집에서 겨우 5리 떨어져 있다. - 까지 갔다. 마침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월성(月城)으로부터 유배를 가는데 역시 이곳에 이르렀다. 공이 두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와서 방문하였다. (李延慶。遁村七世孫。嘗中己卯賢良科。爲弘文館校理。賢良科罷。退居中原。不復應擧。亦無仕進之念。唯以吟詠漁釣爲事。動慕聖賢。以禮律己。鄕人高其德。呼爲李校理。丁未歲。權贊成赴貶。行到中原金灘江 去公家僅五里 適李晦齋自月城赴貶。亦扺于此。公聞二公之至。急來訪之。)]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한성부〔漢城府〕, 1656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충주(忠州) 용연(龍淵)가에 살면서 호를 탄수(灘叟)라고 하였다. (及士禍作,廢居忠州龍淵上,號灘叟。)] 라고 나온다.
*이중환의 《택리지 충주목, 1751년》에
[탄금대에서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면 북창(北倉)이 있는데 강가에 있는 바위의 경치가 좋다. 창(倉) 서쪽은 기묘사화의 명현인 탄수 이연경이 살던 곳이다. 자손 10대에 걸쳐 끊임없이 과거에 합격하자, 사람들이 강가의 명당이라 하였다. (自臺渡江而北爲北倉。有臨江巖石之勝 倉西卽己卯名賢灘叟李延慶之所居。子姓十世科甲不絶。人以爲江干名基。)] 라고 나온다.
반면 이자(李耔)는 기묘사화(1519년)에 연좌되어 파직ㆍ숙청된 후 음성ㆍ충주 등지에서 은거하였고, 이연경, 김세필(金世弼), 이약빙(李若氷) 등과 교류했다 한다.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이자 전(李耔傳)이자는 경자생이고 자(字)는 차야(次野)이다. 신유년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갑자년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벼슬은 우참찬에 이르렀다.[중략]보유 : 공은 겨우 14세 적에 송(宋) 나라 역사를 읽다가 개연히 분노하여 만언서(萬言書)를 짓고 스스로 바치고자 하였는데, 부친 대간공(大諫公)이 경계하며 말렸다. 대간공이 연산군(燕山君)에게 미움을 받고 외방으로 나가서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는데, 공도 이조 좌랑으로서 편양(便養)하기를 청해서 문소 (의성이다. )의 원이 되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그 방법을 다 알맞게 하여 갈려간 뒤에도 그의 공덕을 생각하게 되었다. 중묘(中廟)가 즉위하자, 뽑혀서 옥당(玉堂)에 들어와 시종이 되었으며, 정축년에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무인년에 조정에서 변무(辨誣)하기 위해서 주청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공에게 특별히 품질(品秩)을 올리고 부사(副使)로 임명되어서 경사(京師)에 갔다. 상사(上使)였던 남곤(南袞)이 북경에서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공이 애써 약으로 구료(救療)하였다. 서장관(書狀官) 한충(韓忠)이 공에게 귀엣말로, “저놈이 반드시 사류(士流)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정색하고 말리면서 오히려 보호하기를 더하였다. 돌아온 뒤에 계자(階資)를 뛰어 한성 판윤(漢城判尹) 겸 지경연(知經筵)에 임명되니, 곧 기묘년 봄이었다.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잇달아 참찬으로 이배(移拜)되었다. 그때 나라에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고 또 어지러운 정사를 겪었으므로, 여러 현신이 함께 다스리면서 정교(政敎)를 경장(更張)하고 시위(尸位 하는 일 없이 관직에 있는 것)를 탄핵하니 인심이 크게 엇갈렸다. 공이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ㆍ조 문정공ㆍ충정공(忠貞公) 권벌(權橃)이 둘 사이를 조화시켜서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한두 공이 불가함을 고집하여서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북문(北門 신무문(神武門)의 화(禍)가 일어나서, 조정암(趙靜庵)ㆍ김충암(金冲菴) 제공(諸公)과 같이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대신이 구원하여 최후에 석방되었는데, 남곤이 연경(燕京)에서 병구완 받은 것을 잊지 않은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12월에 최 이상(崔二相 최숙생(崔淑生))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음성(陰城) 고을의 음애(陰崖)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음애라고 호(號)를 지었다. 좌우에는 오직 도서뿐이어서 정신을 집중하고 눈길을 모아서 집안 사람도 그의 안면을 볼 때가 드물었고, 비록 양식이 여러 번 떨어졌으나 태연하였다. 간혹 샘물을 못에 끌어들이고 떼풀을 베어서 정자를 지었다.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려서 흥을 풀고, 술이 생기면 양껏 마셔서 가슴속의 뇌락(磊落)한 심사를 돋구었으며, 흥이 나면 붓가는 대로 회포를 적어서 시름을 달랬다. 기축년에 충주의 토계(兎溪)로 이사하니, 곧 달천(㺚川) 상류이다. 구름 낀 산이 깊고 그윽하여 인가가 절로 드물었다. 정자를 지어 이름을 몽암(夢庵)이라 하고, 이를 따라 호도 몽옹(夢翁)이라 하고, 또 계옹(溪翁)이라고도 하였다. 이탄수(李灘叟)와는 배를 타고 서로 방문하였는데, 항상 서로 심방하였으므로 물고기와 새들도 놀라지 않았다. 이때에 송계(松溪)의 수령이었던 중숙(仲叔)이 이항(李沆)과 한마을에 살면서 잘 사귀었는데, 송계가 그의 형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의 사건으로 연좌되어서 선산(善山)에 정배되었다. 경인년에 석방되어서 돌아올 참인데 마침 이항이 찬성(贊成)이 되어 개령(開寧)의 선산(선조의 무덤)에 분황(焚黃)하였다. 송계와 공도 같은 배로 서울에 올라오니, 대개 송계가 거문고를 잘 타므로 배 위에서 서로 즐기고자 한 것이었다. 이항이 뱃길에서 음애를 맞이하니, 음애가 배를 저어와 먼저 송계가 석방되어 돌아옴을 위로하고 이어 이항에게, “그대도 신사년 사람을 반역했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항이, “그 사람들의 언사를 들으니 크게 원망하는 무리로다.” 하였다. 음애가 이르기를, “어허, 그대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어찌 분해하는 말에 성내어서 억울하게 뜻밖의 죄를 더하는가. 안처겸(安處謙)은 의협(義俠)한 무리일 뿐이오.” 하니, 온 좌중이 두려워하였다. 그 뒤 며칠 안 되어서 몽암에서 죽었다. 죽은 뒤 6년 만에 중묘께서 기묘년 일을 크게 깨달아서 당시 사화에 관련되었던 사람을 모두 다시 서용하였다. 만력(萬曆) 정축년에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계하기를, “죽은 참찬 이자(李耔)는 기묘년의 명신(名臣)으로서 폐출되어서 명을 마쳤습니다. 그의 충직한 행실이 민몰되어서 알 수 없게 됨은 진실로 애석합니다. 명호(名號)를 바꾸도록 하여 장래 사류를 장려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임금이 윤허하였다. 〈행장(行狀)〉에는 대략, “천분(天分)이 매우 높았으며, 외모도 아름다웠고 마음이 넓고 컸다. 심주(心柱)가 넓고 두터웠으며 도량이 넓고 밝았다. 사람을 접할 때는 온화하면서 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간략하게 하고 근실하게 하였다. 제향하는 데에 정성스러웠고 벼슬에 임해서는 씩씩하였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질서가 엄하였다.” 하였다. 또, “평소에는 담연(淡然)히 세상일을 잊은 듯하였으나, 조정 정사가 잘못됨을 들으면 여러 날 탄식하였다. 사람을 가르치다가, 진동(陳東)을 죽인 대목에 이르면 두어 줄을 읽지 못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 하였다. 슬픈 빛이 얼굴에 가득하고 눈물이 눈썹에 잇닿으니, 배우던 자들이 가만히 보다가 놀라서 물러갔다.” 하였다. 또, “공의 학문은 쇄소 응대(洒掃應對)를 계제(階梯)로 삼고, 신(神)을 궁구하고 조화를 아는 것을 귀취(歸就)로 삼았다. 수양하는 데에 도가 있고, 체(體)와 용(用)을 구비하였다. 다만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경솔하게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빈말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오직 실천하는 데 착실하기를 힘썼다. 만년에는 진실이 쌓이고 학력(學力)이 오래되매 인의(仁義)가 정숙(精熟)하여서 동정 어묵(動靜語黙) 어느 것이나 예에 맞았다.” 하였다. 또, “당시 만사(挽詞)로 심언광(沈彦光)의 글에,
영묘(소년)한 시절의 높은 심회가 노성과 견주었는데 / 英妙高懷擬老成한 세상을 경장할 때에 일찍이 놀랍기도 하였다 / 更張一世曾□驚애오라지 시례로써 초복을 이루었으나 / 聊將詩禮成初服경륜한 것이 반생을 그르칠 줄 어찌 뜻했으리 / 豈意經綸誤半生쓰임과 버려짐은 천운이니 기뻐하거나 성낼 것이 없고 / 用舍任天無喜慍슬픔과 편함은 처지에 따라 쇠고와 영화가 있었다 / 慘舒隨地有枯榮궁ㆍ통ㆍ달ㆍ절이 심상한 일인 듯 / 窮通達節尋常事10년 동안 임천에 아직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 十載林泉尙領名 하였다. 이 만사가 비록 도가 있는 자의 기상을 형용할 줄은 몰랐다 하겠으나, 또한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서 전해진다. 외아들 이추(李秋)는 아들이 없었고, 일찍 죽었다. (문인(門人)인 소재(蘇齋)가 지었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였는데, “학문이 넓고 도덕이 있음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일어나며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고 한다.” 하여,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D001] 분황(焚黃) : 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내릴 때에 관고(官誥 일종의 사령장)를 적은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그 무덤 앞에서 태우는 것이다. (李耔傳李耔庚子生。字次野。中辛酉進士。甲子及第壯元。官右參贊。[중략]補。公年纔十四。讀宋史。慨然發憤。作萬言書欲自獻。其父大諫公戒止之。大諫忤燕山。出牧星州。公亦以吏曹佐郞。便丐聞詔。(義城) 理民作人。咸得其方。大有去後思。 中廟卽祚。選入玉堂爲侍從。丁丑陞副提學移承旨。戊寅朝廷有奏請辨誣事。特賜贈秩充副使赴京師。上使南衮得疾幾殊。公辛勤藥餌。書狀官韓忠付耳語曰。這漢必赤士類。公正色禁止之。保護猶加。及還超拜漢城判尹。兼知 經筵。卽己卯春也。遷刑判尋移參贊。時國家法久弊生。又經亂政。諸賢共理。更張政敎。彈劾尸位。物情大乖。公與申文節公鏛趙文正公權忠貞公撥。欲調兩間不至敗闕。則一二公執不可。已無如之何。北門禍作。趙靜庵金冲菴諸公同被下獄。爲大臣所救。最後見放。亦賴南衮不忘燕京救病之意也。十二月崔二相等同被削奪。寓居于陰城之陰崖。而仍自號焉。惟左右圖書。凝神注目。家人罕見其面。雖至屢空。晏如也。或疎泉引沼。誅茅架亭。嘯咏舒放。得酒則痛飮。以澆胸中磊落。發興則信筆書懷以自遣。己丑移卜忠州之兔溪。卽㺚川上流。雲山深邃。村烟自稀。築精舍。名以夢庵。號夢翁。亦號溪翁。與李灘叟掉舟相訪。尋常相訪。魚鳥不驚。是時松溪守仲叔與李沆同里閈相善。松溪以其兄詩山正。正叔緣坐。定屬于善山。庚寅蒙赦將還。適沆以贊成焚黃于開寧。松溪同舟上京。蓋松溪善彈琴。欲於船上相娛耳。沆在水道邀陰崖。陰崖掉舟來訪。先慰松溪放還。仍謂沆曰。君亦以辛巳人爲叛逆耶。沆曰。觀其言辭。大懟之流也。陰崖曰。唉君迄未悟矣。豈可怒其慷慨之言。枉加情外之罪乎。安處謙義俠之徒爾。一坐悚然。未幾卒于夢庵。後六年。 中廟大悟己卯事。盡復收敍。萬曆丁丑。副提學柳希春啓曰。卒參贊耔己卯名臣。廢棄終身。其忠直之行。泯泯無聞。誠可痛惜。請賜易名。以礪將來。 上允之。行狀畧曰。天分甚高。休休乎其外。恢恢乎其中。根基廣厚。宇量虛明。接人和而嚴。處事簡而勤。篤於祀享。莊於臨莅。閨門之內。斬斬有序。又曰。平居淡然若忘世。及聞朝政缺失。嘆吒彌日。常訓人至殺陳東。未數行。哽咽不能出聲。慘色滿容。哀淚承睫。學者切視之。瞿然經退。又曰。公之學以洒掃應對爲階梯。窮神知化爲歸宿。充養有道。體用皆備。但不求人知。亦不輕以語人。不喜空言。惟務踏着實地。晩而眞積力久。義精仁熟。動靜語默。隨處而中。又曰。當時挽詞沈彥光一篇曰。英妙高懷擬老成。更張一世曾□驚。聊將詩禮成初服。豈意經綸誤半生。用舍在天無喜慍。慘舒隨地有枯榮。窮通達節尋常事。十載林泉尙領名。雖不解於形容。有道者氣像。亦爲膾炙傳誦之矣。獨子秋。無子夭死。(門人蘇齋述)太常按謚法曰。博文道德曰文。夙興警戒曰敬。賜謚曰文敬公。)]라고 나온다.
*문봉집(文峯集) / 제 5권.(조선 전기 문신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 ~ 1576년(선조 9)의 문집)
한중필록〔閑中筆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참찬 이자(李耔)는 자가 차야(次野)이고, 호는 음애(陰崖)이다. 청백(淸白)하고 충후(忠厚)하여 앞선 사람들보다 우뚝했다. 기묘년(1519)의 청류들은 공을 영남의 영수(領袖)로 추대하였는데, 당화(黨禍)가 일어나자 논척을 당하여 음성(陰城)의 촌사로 물러나 머무르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로 스스로 즐겼다. 공과 김안로는 모두 채수(蔡壽) 공의 사위였지만, 지향하는 바는 얼음과 숯처럼 달랐다. 평소 서로 맞지 않았고 김안로가 공을 원수처럼 싫어하였는데, 부인과 형제들도 매우 반목하였다. 공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한가로이 지낸 것이 모두 15년이었다. 나라를 염려하고 시국을 걱정하며 술로 자신을 달랬다. 권벌 공이 평소에 공과 잘 지냈다. 이때에 권벌 또한 폐출(廢黜)되어 머물고 있었는데, 공이 음주가 지나치다는 것을 듣고 서간(書簡)으로 경계시켰지만, 공은 그치질 못하였다. 계사년(1533)에 권공이 여러 공들보다 먼저 서용(敍用)되어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음성 지역에서 공을 방문하니, 공 또한 마중 나와 시냇가에서 기다렸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의 부음이 이르렀다. 권공은 통곡하며 “내 일찍이 과음하는 것을 경계시켰거늘 결국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저술한 시문 10여 권이 남아 있는데, 현재 형의 손자 집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李參贊耔。字次野。號陰崖。淸白忠厚。蔚然前輩人也。己卯淸流。推公爲嶺袖。黨禍起。被斥。屛居陰城村舍。以書史自娛。公與金安老。俱爲蔡公壽之壻。而所向氷炭。平生不相得。安老嫉公如仇讐。夫人兄弟亦至反目。公閑居凡十五年。憂國傷時。以酒自遣。權公橃素與公善。是時。亦廢居。聞公過酒。以書戒之。公不能止。癸巳年。權公先諸公見敍。被 召還朝。取徑路訪公于陰城地。公亦出俟于溪邊。從容談論而別。未幾公訃至。權公痛哭曰。吾嘗戒其過飮。今果至於斯矣。公有所著詩文十餘卷。今藏其兄孫家云。)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충주진(忠州鎭) 음성현》에
[이자(李耔): 본조 공희왕(恭僖王 중종) 때 관직이 우참찬에 이르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뒤에 음성에 우거하여 자호를 음애(陰崖)라 하였다. 방 안에 서책만 가득하고 집종도 그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뒤에 또 옮겨 충주의 토계(兎溪)에 살았는데 정사(精舍)를 지어 몽암(夢菴)이라 이름을 붙였다.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과 배 타고 서로 방문하여 도의를 강마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