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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마르파(Marpha)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의 기념관
1) 가와구치 에카이(1866~1945)는 누구인가?
일본에서는 우리의 혜초(慧超)스님에 비견되는 탐험가이자 황벽종(黃壁宗)의 승려로 『티베트에서 3년(西藏旅行記:The three years in Tibet)』이란 무게 있는 여행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물론 자칭타칭 ‘티베트통’이라는 필자는 티베트, 히말라야, 네팔, 인도 곳곳에서 그의 체취에 맡을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초인적인 그의 불굴의 구도심에 존경심이 절로 생기기도 했다. 물론 그의 행적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밀정 냄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의 업적이 모두 상쇄되지는 않을 정도로 그의 행적은 우뚝하다. 말하자면 필자에겐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 (慧超)이상으로 나의 ‘역마살’의 ‘롤모델’인 인물이었다.
1997년 나는 그를 까일라쉬산(Kailash) 꼬라(Kora)길 순례 중의 최대의 난코스인 될마라(5,668m)고개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다음으로는 세라사원에서, 그리고 까트만두 보드나트스뚜빠(Bouthnath S.)에서 그리고 또 다시, 좀 생뚱맞게, 무스탕왕국 입구의 작은 마을 마르파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의외의 소득이었다. 그것도 그가 그냥 이 마을을 그냥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아예 3달 동안을 머물다 갔다고 하니 더욱 그러했다.
기록상으로 그는 동양삼국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성산 까일라쉬를 도는, ‘바같꼬라(Out kora)’를 마친 첫 번째 사람이라는 사실은, 1백년 뒤에 필자가 한국인으로서는 1997년 처음으로 꼬라를 성취한 것에 비하여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는 까일라쉬 꼬라의 최대의 고빗길인 해발 5,620m의 될마라 고개를 남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삼도해탈(三途解脫)의 고개”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아름다운 ‘하얀 산’ 다울라기리를 바라보며 “마치 비로나자 부처님이 허공에 계신 듯한, 눈 덮인 봉우리구나… ” 라는 시구절을 남기기도 했다.
가와구치의 집안은 대대로 나무통을 만드는 집안의 장남이었기에 출가가 어려웠으나 어릴 적부터 승려가 되기를 열망한 탓으로 그의 나이 25세 되는 1890년에 마침내 황벽종의 승려가 되었다. 그리하여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금주와 채식과 순결을 지키며 수행자로 살다가 잠시 도쿄의 오백나한사(五百羅漢寺) 주지를 하다가 이후 한 작은 암자에서 3년 동안 한문 불전을 공부하였는데, 이 때 당시 일본불교계의 세속화에 실망하고는, 중국과 한국 일본에 전승되는 한문 경전에 만족하지 않고 산스크리트 원전과 티베트어 불전을 구해 일본 불교계로 가져 오려는 원력을 세우게 된다.
2) 가와구치의 행로
가와구치는 1897년 32세에 고베항을 출발하여 싱가폴을 경유하여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1899년 1월에 보드가야를 참배하고 마하보디회(Maha Bodhi Society)의 창설자인 스리랑카의 아나가리카 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로 부터 티베트의 13대 법왕 달라이 라마에게 전하는 헌상품으로 부처님 진신 사리를 봉안한 은제탑과 패엽경 1권을 받았다. 그리고는 유명한 티베트 어학자인 찬드라 다스(Sarat Chandra Das)를 소개받아 다르질링에서 1년 간 티베트 말과 습관을 익히는 예비단계를 거쳤다.
까트만두에 도착해서는 다르질링에서 만난 네팔인 지트 바하둘(Jit Bahadur K.C.)의 소개 편지로 보우드나트 스뚜빠 사원의 주지인 붓다 바즈라(Buddha Vajira Lama)를 만나서 그의 도움으로 경계가 비교적 허술한 네팔 서북쪽으로 가서 5월 중순에 포카라를 경유하여 무스탕에 있는 차하랑(Tsharang)마을에 머물면서 몽골인 불교학자의 지도로 불교와 티베트 풍속을 익혔다.
1900년 3월 10일 차하랑을 출발해 3월 13일 마르파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길이 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6월 12일에 마르파를 출발하여 7월 4일 다우라기리 히말(Dhaulagiri Himal) 북쪽의 설봉을 걸어서 티베트로 입국하여 8-9월에 마침내 마나사로바(Manasarova L)호수와 까일라쉬산을 순례하고 현재의 우정공로인 전통적인 루트를 통하여 1901년 3월 21일 마침내 라싸로 입성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4월 18일 세라사원 강원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승적을 얻고 티베트불교를 배우고 경전을 수집하였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전직 재무대신의 부인의 탈골을 치료해준 후로 그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재무대신의 형은 3대 사원의 하나인 간댄사원의 좌주(座主)인 치 린포체였기에 그를 통하여 고승들을 접견할 수 있는 신분이 되고 의 의사로 유명해졌기에, 13대 달라이 라마 톱텐 갸초(Thubten Gyatso, 1876-1933)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듯이 1902년 5월 상순에 일본인이라는 신원이 탄로 나자 탈출을 계획하여 천화당(天和堂) 약국을 경영하는 중국인 부부의 도움으로 수집한 불전을 말에 실어 5월 29일에는 인도로 탈출하여 3일 만에 다르질링의 학자 찬드라 다스의 별장으로 돌아와서 이후 열병에 걸려 3개월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10월에 티베트를 왕래하는 상인들로부터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이 구금되어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어 여러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대를 무릅쓰고 1903년 1월 10일 네팔 국왕을 만나기 위해 다시 캘커타로 가서 3월에 네팔 국왕(총리) 찬드라 슘쉬러 라나(Chandra Shumsher Rana)를 통해 달라이 라마 13세에게 투옥된 사람들의 구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네팔 총리에게서 많은 산스크리트 불전을 하사받아 4월 24일에 인도 뭄바이를 출발하여 5월 20일 홍콩을 거쳐 일본 고베항에 도착하였다. 6년 만에 살아서. 경전을 한 보따리 들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각종 신문에 그의 티베트의 여행기를 발표하고 1904년에는 단행본 『티베트여행기:西藏旅行記』를 출판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한편으로는 티베트 입국 사실 자체를 의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9년에는 자신의 영역으로 『Three Years in Tibet』을 출판하였고 이어서 일본어판 『티베트여행기(チベット旅行記)』를 출간하였다.
그 뒤에 1905년에는 세 번째로 네팔을 방문하여 네팔 총리에게 『한문대장경 』100권을 기증하였는데, 이 대장경은 현재도 까트만두 국립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네팔총리는 여러 가지 산스크리트어 필사본들을 수집하여 가와구치에게 선물을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받은 두둑한 후원금으로 자신도 산스크리트어 필사본, 불전 두루마리 경권, 불화, 종교 유물 등을 수집하였다.
산스크리트 불전을 수집하면서 총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마단 푸스타카라야(Madan Pustakalaya)에 보존되어 있는 이 편지에서 그는 아시아의 단결과 범아시아주의를 제안하였다. “빛과 절제(Light and Moderation)”라는 가르침을 편 붓다의 탄생지로 네팔을 묘사하였다. 이젠 네팔이 일본으로부터 과학과 기술의 혜택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며 교육, 정치, 재정, 산업 발전을 위한 사회 경제적 인프라 개발 등의 네팔 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1896년에 인도와이 접경지대인 네팔령 룸비니에서 아소까 석주(Ashok Pilor)가 발견됨에 국제적 이목이 쏠림에 따라 1912년에 가와구치도 룸비니를 방문하였는데, 이 때 타카쿠스 준지로(Junjiro Takakushi), 류타이 하세베(Ryutai Hasebe) 등과 같은 불교계의 학자들과 함께였다. 이 때 네팔인들이 마야 데비(Maya Devi)를 힌두교의 신으로 숭배하며 동물 희생을 공양 올리는 것을 보고는 네팔 총리에게 건의하여 마야 데비 상에 동물 희생 공양 금지령을 내리게도 하였다.
3) 티베트로의 재입국
물론 처음에는 그의 티베트행의 진위를 의심하던 불교계에서 점차로 그의 평가가 높아져, 강연이나 장래품의 전시 등 바쁜 날들이 계속 되던 중, 여러 협찬기관이 나서면서 1904년, 그의 나이 38세 때. 가와구치는 든든한 후원금을 들고 제2의 티베트행에 나섰다.
그 목적은 티베트어의 대장경과 산스크리트어의 경전을 입수하여, 이것을 비교 대조해 일본어로 된 일체경(一切經)을 만들어보자는 거국적인 목적이었다. 배편으로 우선 캘커타에 도착한 그는 캘커타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간혹 시성 타고르(R. Tagor)의 집에서도 신세를 지면서 네팔의 입국 허가서를 기다렸다. 그리고 까트만두에 들어가서는 가서, 네팔 국왕에게 한역대장경을 헌상하고 국왕으로부터 범어경전(梵語經典)을 하사 받기도 했다. 그리고 네팔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불전과 불상을 수집하였고 티베트에서는 많은 티베트어 불전을 수집하고 민속자료, 식물표본 등을 수집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티베트 제2의 법왕(法王)인 빤첸라마가 인도에 와 있어서 티베트어 경전과 한역 경전을 교환하기 위해서 1914년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티베트에 입국하여 빤첸라마의 궁전이 있는 티베트 제2의 도시인, 시가제에 도착하여 빤첸라마에게 한역경전을 바치는 임무를 완수하고는 귀국길에 올랐다.
1915년, 귀국 후 가와구치는 그가 가져온 경전의 번역이나 티베트어의 교수, 불교의 포교, 불교서의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이 때 『티베트 입국기(入藏記)』와 『설산 노래 여행(雪山歌旅行)』을 묶어 『제2회 티베트 여행기(第二回チベット旅行記』로 출판하였다. 일본에 돌아온 뒤 가와구치는 황벽종 승적을 반납하고 다이쇼(大正)대학교 교수가 되어 ‘우빠사카(在家)불교’를 제창하였다.
근대 일본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불교의 원전(原典)을 구하러 해외로 나가는 노력이 끈질기게 지속됐다는 점인데, 그런 면에서 가와구치 에카이의 공적은 일본의 불교발전에 큰 공헌을 한 선구자였다.
그는 만년에도 동양문고(東洋文庫)에서 장화사전(藏和辭典:티베트어-일어사전)을 편집하는 작업에 몰두하였고 그런 일련의 작업들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의 편찬이라는 일본의 불교학의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현재 동북대학에는 <가와구치기념관>이 있고 저서는 『서장여행기(전후)』를 비롯해서 20여 종류에 이르고, 신문 잡지에 발표한 논문이나 기사도 상당하다. 현재 대표적인 저작을 모은 〈가와구치 에카이 전집〉도 발행되어 있다.
또한 교토의 황벽산(黃檗山) 만복사(萬福寺)문 옆에는 가와구치 에카이가 네팔에서 가져와 심은 거대한 히말라야 시카다(Himalayan Cicada) 나무가 우뚝 서서 그의 행적을 기리고 있으며 최근 2002년에 네팔에서도 그를 기리는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하였다.
가와구치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6개월 전에 방공호 입구에서 굴러 떨어져 뇌출혈이 생겼고 이 때문에 자택에서 서거하였는데, 그의 유골은 천왕사에 매장되었다가 지금은 아오야마묘지(靑山靈園)에 이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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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일본 황벽종(黃壁宗)의 승려로서 단신으로 네팔을 통하여 설역고원에 올라 카일라스산 꼬라를 마치고 라싸에 잠입하여 몽골인으로 위장하여 세라사원에서 3년간 승려 노릇을 하면서 티베트불교를 공부하다가 신분의 위협을 느껴 귀국하였다가 10년 뒤 다시 한차례 더 잠입하여 티베트대장경을 수집하여 가져갔다.
2). 탐험가 이노우에(井上圓了), 후지이(藤井宣正),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本願寺) 법왕 오따니(大谷光瑞)
3) 대정신수대장경은 20세기 초(1924~34) 일본에서 활자판으로 간행된 대장경이다. 이에 앞서 일본에서도 몇 차례의 대장경판 간행이 있었는데, 19세기 말부터 활자판에 의한 간행이 본격화되었다. 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한 최초의 대장경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1880~85) 대일본교정축쇄대장경이다. 이것은 고려대장경을 모범으로 삼고 중국과 일본의 불전으로 증보하여 1,916부 8,534권을 수록하였다. 이어서 7,082권을 수록한 대일본교정장경, 7,140여 권을 수록한 대일본속장경이 간행되었다. 활자판 간행 대장경으로는 가장 우수한 대정신수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으면서도 독자적인 분류로 불전을 배열했다. 그리고 송·원·명의 중국 대장경과 자국에 소장된 사본들을 함께 대조하였으며, 중국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사본으로부터 많은 문헌을 선택하고 중국과 일본의 문헌들로 증보하였다.
4) 1866년,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나 25세 때, 황벽종의 운노 키젠(海野希禪) 아래에서 출가하여 데이지로오에 ‘에카이(慧海)’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황벽산(黃檗山)의 서고에서 오로지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을 읽었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러한 어려운 문자로 적혀 있으면 일반 사람들은 불교를 이해할 수 없겠다. 꼭 쉬운 일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또 대표적인 경전인 〈법화경〉이나 〈무량수경〉의 이역(異譯)도 많이 있고, 내용도 조금씩 달라, 이것으로는 번역도 할 수 없다. 반드시 원전과 대조할 필요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때 그는 티베트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경전 원전은 산스크리트어나 파리어로 적혀 있어서 인도에 가지 않으면 입수할 수 없다. 그러나 인도에서도 흩어 없어지고 지금은 네팔이나 티베트에 보다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티베트가 산스크리트어로부터 티베트어로 번역한 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아, 티베트에의 입국을 희망하게 되었다. 먼저 그는 스리랑카에서 돌아온 샤쿠 고우넨(釋興然)을 방문해 산스크리트어나 파리어를 공부했다.
5) 에카이 스님의 저작에는 ‘붓다의 전기’ 외에 티벹어에 바탕한 <<승만경>>, <<유마경>>, <<법화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대일여래경>>, <<유식삼십송>>, <<밀라래빠 게송>>이 있고, 포탈라궁 등의 ‘티벹여행 그림’, 인도가극 ‘샤쿤타라(Shakuntara) 왕비’ 등이 있다.
일본
첫댓글 혜초, 현장 etc 글로벌이란 말이 격세지감 중..🙊
Thanks a lot~~~
일본에도 이런 고승이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좋은 볼거리 올려주셔서~~
탐험가 나오무라 와 하께 제일 젤로 존경하는 일본인~
어쿠 굉장하네요. 지금으로부터 백여년 전에 티벳, 그것도 카일리스 성산까지 순례를 했다니요?
에카이의 환생 茶汀?
에카이, 다정샘..고독한 베가본드들이 무서붜욤..🙊🤪
안 무시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