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정 소설의 진수 <메밀꽃 필 무렵> 이어쓰기
한국 소설의 백미, ‘시로 쓴 소설’이라는 칭호가 걸맞는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이 강원도 출신 작가들 여섯 명의 펜을 통해 재탄생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주인공인 장돌뱅이 허 생원과 성씨 처녀, 그리고 그 둘을 잇는 동이 셋의 관계를 암시와 상징으로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그 열린 결말을 확장시켜 새로운 시점에서 각자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도서출판 단비에서 엮은 <메밀꽃 필 무렵>이다. 이 책에는 원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이와 성씨 처녀의 시점에서 뿐만 아니라 사라져가는 옛것들을 고이 간직하고 싶은 듯한 동이의 뒷이야기도 싣고 있어 원작에서 느끼는 감동과 더불어 새로운 문학작품을 만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자연을 그리는 서정적 문체와 생명력 넘치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이야기
이효석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통해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서정적인 문체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메밀꽃이 흐드러진 강원도 봉평의 농촌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농촌의 건강한 생명성과 자연에 대한 애정어린 감각적 문체들은 장돌뱅이의 시선을 통해 더욱 순수하고 서정적이게 다가온다.
특히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칠십 리 길에 대한 묘사는 한국 문학사에서 길이길이 백미로 꼽힌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도서출판 단비에서 선보이는 신작 <메밀꽃 질 무렵>은 이러한 이효석 소설의 서정성과 생명성, 그리고 향토성 가득한 원작 특유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작가들 각자의 개성에 맞게, 그 열린 결말을 지어나간다.
6인의 작가와 6개의 새로운 작품들
<메밀꽃 필 무렵>은 상징과 암시로써 결말을 독자들에게 남긴 채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동이는 정말 허 생원의 아들이었을까. 허 생원과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성씨 처녀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았으며, 아들로 추정되는 동이는 어떻게 자라왔을까 하는 궁금증들을 작가들의 상상력을 통하여 새롭게 풀어본다. 작품에 참여한 작가들은 원작의 서사가 비워놓은 틈들을 채워가며 전혀 새로운 작품이면서 동시에 원작을 이해하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윤혜숙의 <열여덟 동이> 는 <메밀꽃 필 무렵>의 앞 이야기로 제목처럼 열여덟 살 동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친아버지를 모른 채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아래서 동이는 어떻게 성장했을지, 아버지 없이 자란 상처받은 마음은 어떻게 치유하게 될지 친아버지일 것이라 추정되는 허 생원을 찾아가는 동이의 여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심봉순의 <달눔>은 성씨 처녀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단 한번 마주친 아이의 아버지를 ‘달눔’에 빗대어 표현하여 그녀가 허 생원과의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사연을 개연성 있게 풀어나간다.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은 여인의 고달픈 삶과 첫사랑을 기다리듯 ‘달눔’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박문구의 <길>은 원작 <메밀꽃 필 무렵>의 바로 뒷이야기에 해당한다. 물속에서 발을 헛디딘 허 생원이 동이에게 업힌 후의 상황을 이어간 것으로, 이 작품에서는 좀 더 선명해지는 둘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어느덧 달은 완전히 넘어가고 오른쪽 산부리에 옅은 빛이 솟아오르면서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삐삐루삐루루, 치르릇치르릇 하는 새들의 청아한 음향이 이슬에 묻어 귓바퀴에 굴러다녔다.” 같은 표현들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문체와 닮아 있어 원작의 감동을 박문구의 새로운 작품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김별아의 <꽃과 꽃자리의 기억>은 허 생원이 성씨 처녀를 그리워하며 찾아다니다 성씨 처녀라 짐작되는 여인을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그려진다. 첫사랑이자 마지막 연인이라 할 수 있는 성씨 처녀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은 실제 그녀를 마주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어떻게 그려질까 상상해보면서 읽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김도연의 <메밀꽃 질 무렵>은 제목처럼 <메밀꽃 필 무렵>을 마무리하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허 생원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함께했던 봉평 장에 자리를 잡은 채 오랜 세월을 신발 장수로 지낸 ‘동이’의 노년을 그렸다. 동이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자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옛것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이순원의 <헌정 글 - 말을 찾아서>는 작품 속 화자가 어린 시절 나귀를 모는 작은아버지의 양자가 되는 이야기가 주요 서사이지만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인 옛 시절의 봉평이 이 작품을 그리는 바탕이 된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과 나귀의 은유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애욕을 교묘하게 병치(竝置)시킨 구성 방식을 이순원 소설가의 방식으로 오마주하여 양아버지인 ‘아부제’와 주인공인 나에게 가장 설움과 눈총과 미움을 받던 ‘나귀’의 모습을 병치시켜, 또 하나의 서사를 색다르게 풀어가고 있는 것이 작품의 매력이다.
문학작품을 읽는 새로운 재미
문학작품을 읽는 데에는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가장 훌륭한 작품 읽기가 될 것이다. 소설가들의 감성으로 다시 읽어낸 <메밀꽃 필 무렵>은 그런 점에서 작품 읽기의 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문학작품은 읽기 어렵고 지루하다는 생각 대신 나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읽어가는 매력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을 통해 서정 단편 소설의 진수로 꼽히는 <메밀꽃 필 무렵>의 원작 감상과 함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는 또 다른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다른 문학작품을 읽고 감상하는 데에도 확장시켜 문학작품을 읽는 새로운 재미를 느껴보기를 바란다.
글쓴이 소개
윤혜숙
강원도 태백 출생.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작소설 창작과정에 선정되었고, 한우리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 청소년소설 『뽀이들이 온다』, 『계회도 살인 사건』을 썼으며, 청소년 단편소설집 『광장에 서다』, 『다시, 봄 봄』, 『여섯 개의 배낭』, 『내가 덕후라고?』, 『이웃집 구미호』를 함께 썼다.
심봉순
1967년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관동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했다.
2002년 김유정 전국문예공모에 산문 「출렁다리」로 대상 수상 후
2006년 계간 『문학시대』 신년호에 단편소설 「피타고라스 삼각형」으로 등단했다.
2017년 제9회 현진건문학상에 단편소설 「제천」으로 우수상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장편소설 『방터골 아라레이』와 단편소설집 『소매각시』, 『라스베가스로 간다』가 있다.
박문구
작가 약력 : 강원도 삼척 출생
가톨릭 관동대학교
『강원일보』 신춘문예
『강원일보』 중편 연재
산과 바다 주점으로 돌아다님
작품집 : 단편소설집 『환영이 있는 거리』
장편소설 『투게더』
김별아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2005년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는 『꿈의 부족』 장편소설 『개인적 체험』, 『축구 전쟁』, 『영영 이별 영이별』, 『논개1, 2』, 『백범』, 『열애』, 『가미가제 독고다이』,『채홍』, 『불의 꽃』,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탄실』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가족 판타지』,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삶은 홀수다』,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스무 살 아들에게』,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도시를 걷는 시간』 등이 있다.
김도연
강원도 평창 출생. 『강원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중앙신인문학상(2000) 수상.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콩 이야기』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아흔아홉』 , 『산토끼 사냥』, 『마지막 정육점』을 썼다.
이순원
1957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고,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가 당선되면서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을 작가로 길러 준 산과 바다에 대한 애정이 소설을 넘어 강릉 출신 산악인 이기호 대장과 함께 ‘강릉 바우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는 일로 이어지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 『우리들의 석기시대』,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에덴에 그를 보낸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그대 정동진에 가면』, 『순수』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7), 이효석문학상(2000), 한무숙문학상(2000), 허균문학상(2006), 남촌문학상(2006), 동리문학상(2016) 등을 수상했다.
이효석(李孝石 1907~1942)
호는 가산可山,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8년 『조선지광』에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초기에는 「노령근해」, 「북국사신」 등 경향성 짙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구인회에 가입할 무렵부터 향토적, 이국적, 성적 요소를 드러낸 「돈豚」, 「수탉」, 「분녀」,「산」, 「들」, 「메밀꽃 필 무렵」, 「장미 병들다」, 『화분』, 『벽공무한』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이효석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차례
서문 - 이효석 선생의 영전에 바치는 강원도 여섯 후배의 글 /이순원 … 5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 13
열여덟 동이 /윤혜숙… 31
달눔 /심봉순 … 57
길 /박문구 … 77
꽃과 꽃자리의 기억 /김별아 … 97
메밀꽃 질 무렵 /김도연 … 117
헌정 글 - 말을 찾아서 /이순원 … 143
첫댓글 오! 진짜 궁금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