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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이라는 예배의 설교는
그 교조적 권위로 인해 오랫동안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습니다.
그 설교의 말씀에 대한 비판은 곧 불신의 영역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강단의 설교는 인본주의 설교로 혼탁되었으며
혼잡한 말씀의 가라지 현상으로 이단과 사이비가 창궐하였습니다.
성서지대는 거짓 선지자의 허탄한 묵시를 경계하였고
혼잡한 말씀과 다른 복음과 다른 교훈을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경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에 대한 화 있을진저의 선언으로 말미암은 역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였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적 율법의 이해와 극단적으로 갈등하며 대립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비롯한 서신서에 기록된 사도들의 고난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율법적 충돌을 비롯하여 이방의 문화와 대립하며 갈등하였기 떄문이었습니다.
선지자와 율법의 증거를 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천하만민을 구원할 하나님의 의로 믿음의 주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선지자와 율법의 증거를 받았듯이 하나님과 성령과 사도들의 증거로 충만하였고
그 증거로 말미암은 복음의 전파는 온 천하에서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15:26-27)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5-6)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 복음의 증거는
그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의 인치는 역사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습니다.
☞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7-18)
그러나 오늘날 소위 예배의 설교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 선지자의 허탄한 묵시와 혼잡한 말씀과 다른 복음으므로 이단과 사이비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교조화된 예배의 설교로 선포된 말씀은
그 뿌리를 찾아보면 이스라엘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고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사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선지자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23:14-1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6-11)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5)
이처럼 성서지대는 거짓 선지자의 허탄한 묵시와 다른 복음과 사람의 전통과 다른 교훈을 철저히 경계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구분하고 분별하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복음과 다른 교훈과 사람의 전통, 그 경계지점은
혼잡한 말씀으로 끝이 다른 이단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예배의 설교는
대부분 다른 복음과 다른 교훈과 혼잡한 말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깨달으면.....
"듣고 깨달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며 따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일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혼잡한 말씀을 듣고 갈등하지 않는다면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미혹되어 거짓 선지자의 말씀을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자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의 소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참된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주 예수를 믿는 그 진실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불자의 길로 구원을 이해할 수 없듯
이단과 사이비의 혼잡한 말씀으로 영생의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믿음의 날개에 대한 복음적인 성찰은
믿음의 본질에 충실한 이해가 될 것입니다.
먼저 성서지대의 말씀으로 믿음의 날개라는
율법과 선지자, 그리고 사도들의 말씀이 있는가 묵상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한 성서지대의 말씀은
믿음의 문, 믿음의 법, 믿음의 의, 믿음의 말씀, 믿음의 분량, 믿음의 분수, 믿음의 마음,
믿음의 때, 믿음의 가정, 믿음의 방패, 믿음의 진보, 믿음의 기쁨, 믿음의 제물, 믿음의 봉사,
믿음의 역사, 믿음의 소문, 믿음의 부족, 믿음의 비밀, 믿음의 선한 싸움, 믿음의 굳은 것,
믿음의 교제, 믿음의 주, 믿음의 시련, 믿음의 기도,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도 등 충만합니다.
믿음에 대한 성서 저자들의 성찰은
복음에 대한 다양한 방면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나 믿음의 날개라는 의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성서지대의 믿음과 날개는 전혀 복음적인 성찰이 아니며
믿음의 날개라는 개념은 복음적인 말씀으로 소통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에 붙을 수 없는 날개의 근원을 찾아
성서지대의 날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살펴보았습니다.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
그룹들이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이렇게 성서지대의 날개는 새의 날개와 그룹의 날개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상징하는 날개가 있을 뿐입니다.
시편 55편 기자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고 노래하였습니다.(시55:4-8)
시인은 사망의 환난을 당하여
겨우 비둘기의 날개가 있다면...이라고 가정하였습니다.
성서지대의 믿음은 적은 믿음을 가진 믿음을 의심하는 작은 자가 있고
믿음, 그 자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일으키며 큰 믿음으로 자라고 성장할 뿐입니다.
믿음의 한계, 그 임계값은 믿음의 날개를 달기 위한 구실일뿐......절망의 자리,
그 곳에서 역사되는 믿음의 날개는 하나님을 주술적 대상으로 삼는 영성 신앙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서지대의 날개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과 그 섭리와 관련된 성서저자의 이해입니다.
환난의 푹풍과 광풍을 피할 수 있는 믿음의 날개는 성서저자의 영감적 성찰이 아니요,
영성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무속신앙과 주술적 신앙입니다.
비전신앙으로 성령의 바람날개를 타고 하늘을 날아 오르는 목표 설정은
전형적인 인본주의 무속신앙의 말로입니다.
죄를 짓고 비난받는 것의 절망을 극복하는 믿음의 날개는 주술적 영성의 자위일뿐......
믿음의 임계값을 극복하는 믿음의 날개라는 신앙이라는 것은 믿음의 궤변이요, 그 농단일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 그 환난과 고난의 문제를 믿음의 날개라는 비전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라 인본주의 신앙의 신화사상입니다.
베드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벧전2:20-21)
주 예수께서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치시고 죄를 사하신 것은
절망을 극복하는 믿음의 날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병든 자의 병을 치료하시고 죄를 사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의 날개를 얻은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은 인본주의 설교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서지대 믿음의 주체는 대상이요,
그 믿음으로 영생의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의 주체가 자아인 신앙은 인본주의 신앙이요,
믿음의 날개라는 신화적 개념은 하나님을 주술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무속신앙입니다.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주술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성공과 번영을 위한 삶의 비전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신앙은
믿음의 날개라는 믿음의 궤변과 농단을 일삼는 연금술사의 변을 낳았습니다.
믿음의 주체가 대상인 믿음은 신본주의요
믿음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의 구원을 얻는 완전한 개념입니다.
참으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예배의 설교는
다른 복음과 다른 교훈과 혼잡한 말씀의 이단과 사이비의 사설로 혼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고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설교를 듣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하는 그곳은
이단과 사이비의 소굴이든지,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말씀으로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는 말씀이든지
둘 중의 하나, 복불복 신앙의 갈림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