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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어두움과 화려한 외로움
- 박일주 선생의 삶과 예술
예술가의 고향은 어디일까. 호적에 기재된 본적지, 태어난 곳, 유년시절을 보낸 회상의 마을, 청소년기 예민한 감성의 윤곽을 잡아 준 터전,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해준 무대, 영감과 창작 모티브의 계기가 된 현장, 가장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친 곳, 때로 좌절과 권태의 시기가 문득 발 디뎠던 우울한 고뇌의 얼마간을 보낸 도시, 만년에 이르러 추억을 더듬으며 삶을 관조하는 마지막 정거장, 이 모든 곳을 자기의 고향으로 삼아 고통스럽지만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는 창조활동이 가능한 것이 예술가의 특권이며 그들의 자부심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술가에게는 행정상의 지번(地番)이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할지 모른다. 삶과 창조행위의 궤적을 통하여 심상에 간직하게 된 푸근하고 그리운 그 곳, 바로 거기가 예술적 변용으로 이어지는 현장 어떻게 보면 하나의 떠도는 섬이 아닐까.
박일주 선생의 경우에서 우리는 여든 세 해 동안 기착(寄着)한 섬과 섬 사이의 항해를 보게 된다. 육십 년 넘게 찾아다닌 미지 의 고향, 그때마다 가슴 설레게 해준 삶의 무대는 그리하여 각기 동심원을 그리며 그가 일구어놓은 화폭사이에서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다.
1910 년에 대구에서 태어난 박일주 선생은 일찍 경상북도 청도군으로 옮겨 유년시절을 보낸다. 나라를 뺏긴 설움과 분노 그리고 궁핍한 삶은 어린 소년의 정서에 우울한 회색 이미지를 드리우기에 충분할 것이었지만 수려한 산천, 오염되지 않은 경관, 때묻지 않은 농촌사람들의 순박한 심성 특히 여인네들의 고왔던 자태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뇌리에 깊게 각인될 수 있었다. 1950 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 오고 있는 「외로운 여인들」작업의 밑바탕도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고혹적이었던 여인들의 실루엣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인정하고있다. 소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에 합격, 27 대 1 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뚫고당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지금의 후신 경기고교)에 입학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기에 충분했다.
어려운 여건아래 시골소년이 서울의 명문학교에 진학한 까닭에 집안은 물론 좁은 청도군 내에 적지 않은 기대와 화재를 모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 온 수재들로 구성된 학교에서의 주된 목표는 경성제국대학이나 일본에 있는 대학으로의 유학, 그러한 까닭에 공부 위주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시골에서 온 박일주 학생도 3 학년까지 남에게 뒤지지 않는학업성적을 보인다. 4 학년이 되면서 어떤 계기에서인지 그림 그리기에 취미를 붙였고 공부보다 그림에 더 열중하게 된다. 대학진학이 지상과제였던 학교 분위기와 동떨어진 미술에의 몰두는 필경 성적부진으로 이어져 급기야는 상급학교진학의 길로부터 멀어지기에 이르렀다. 주위사람들로부터의 그림칭찬 그리고 수업시간에 책상 밑에서 선생님 얼굴을 그리다가 들켜서 당하는 곤욕은 점차남모를 희열과 일탈감마저도 안겨주었다.
이럴 즈음 일본인 미술교사가 박일주의 재질을 인정, 일반 대학은 어려울 것이니 미술학교로 진학한다면 졸업에 도움을 주겠다고 제의하기에 이른다. 당대 제일의 명문고교 학생의 미술가 지망은 당연히 부모와 집안의 반대를 불러왔으나 서울에 하숙을 하고있던 관계로 자신의 결심을 굳혀 그 당시 새로 생긴 일본 문화학원 미술과에 진학, 1 회 졸업생이 된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청년 박일주는 지금의 서울신문 전신이었던 매일신보 문화부 기자로 취직이 되어 사회의 첫발을 내딛는다. 동경에 파견되어 근무하기도 하다가 해방되던 해 다시 귀국한다. 일본에서의 학창생활과 직장근무, 박일주 선생이 서울로 처음 올라온 이후 첫 번째 체험한 넓은 세계는 화가로서의 의식과 작품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기법 등 초기 단계 작가수업의 현장이 되어 주었다. 이중섭, 김병기, 유영국 등 문화학원후배화가, 이인성, 김환기 등 동료들이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폭넓은 대인교제와 집단활동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까닭에 주로 혼자서 작품활동을 해 나갔다.
파스텔화에 매료되어 많은 작품을 제작한 것도 이 시기, 농촌의 전원을 배경으로 아낙네들의 휴식장면을 관능성을 등신대에 구애받지 않고 다소 과장된 구도로 그려나가기도 하였는데 「외로운 여인에서 볼 수 있는 농염하면서도 적요한 분위기의 여인형상은 이 시기 작품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는 콘데화 「덕수궁」은 나무의 뒤틀림이나 풀잎의 엉킴이 보여 주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아래 매우 감각적 화풍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파스텔화를 소개한 선구자로 파스텔이 보여주는 농담(農淡)의 조화와 목가적(牧歌的) 분위기에 심취하였다고 술회한다.
6.25 동란이 나자 잠시 부산에서 교사 생활도 했으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75 년까지 직장근무와 작품활동을 병행하게 된다. 일본체류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 (U. N군 사령부 전속화가) 생활로 인한 여유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 빚어내는 일종의 매너리즘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그렇지만 직장의 배려로 사무실에 작업장을 설치, 끊임없는 탐색과 시도는 특히 재료사용에 있어 독특한 스타일로의 정착을 가능하게 하였다. 유화, 수채화, 파스텔 먹 등 여러 가지 재료의 특징과 속성을 충분히 파악, 그 장단점을 상호 보완하면서 거기에서 자신의 기법을 고안하게 된다.
1950 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지속해 온 「외로운 여인」은 이 시기에 창출한 색다른 기법으로 제작되고 있다. 석고를 입힌 하드보드에 칼로 홈을 새기면서 바탕이 되는 현상을 잡은 뒤 색깔을 그 속에 넣으면서 흡사 상감(象嵌)하듯 구도를 잡아간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일종의 프레스코기법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의 정착을 위하여는 특히 동양화 필법에 대한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만 했다. 1950 년대 초, 대략 1952∼1955 년 사이에 시작한 「외로운 여인」시리즈는 40 년이 흐르는 동안 무수히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밤, 나무, 꽃, 별 여인‥‥이들 오브제에서 형용되는 갖가지 분위기며 정조(情調)는 보는 이에 따라서는 같은 그림의 연속일 수도 있으며 또는 연작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각기 독립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옴니버스 스타일로도 간주될 수 있다. 「외로운 여인들」의 탄생은 1970 년대 초 일본에서이지만 1990 년대인 요즈음에도 프랑스 파리 근교 까샹의 작은 아뜰리에에서는 또 다른 자태와 표정 그리고 율동을 보이는 많은 「외로운 여인」이 탄생되어 기거하고 있다.
1975 년 파리 행,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노화가는 단신 프랑스로 건너와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스물 안팎 되던 시절 당시의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유창한 일본어 구사능력으로 발디딘 일본과 환갑이 넘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스스로 새 출발을 표방하며 시작한 파리생활, 거기에는 분명히 전혀 이질적인 배경과 상황전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작가의 도전의식, 미답(未踏)의 떠도는 섬을 향한 모험과 응전(應戰)라는 맥락은 유사할 것이다. 지금도 박일주 선생은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한다. 20 년 가까이 살면서도 아주 기초적인 표현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의외성」은 "화가의 정열은 대륙과 인종이 달라도 가능할 것"이라는 파리 도착당시의 신념이 지금까지 변함 없음을 증거 하는 예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국에서도 작품전을 열어 「외로운 여인들」 12 점을 선보였다. 미국 인디애나주 테르 호(Terre Haute)시 셀던 스워프 아트 (Sheldon Swop, Art)갤러리에서 1972 년 2 월 6 일부터 3 월 3 일까지 가진 개인전은 동양정서에 바탕을 두고 동양과 서양의 전통을 결합시킨 전설적이고 신비한 장식적 효과의 우아함을 드러내 보였다는 현지 언론의 소개를 받게된다. 이 화랑대표인 하워드 우든 (Haward Wooden)씨는 ". . .그의 그림은 시적인 신비성을 지니며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실과 환상이 세계에서 여성미의 아름다움을 이상의 미(美)로 표현하고 있다"라고 펑하면서 특히 흑과 백의 조화가 보여주는 강렬하면서도 화사한 관능의 이미지 제공을 눈여겨보았다.
이때까지의 이름은 본명인 박성규, 60 여 년 사용한 본명 박성주를 1975 년 파리도착과 함께 감상성 짖은 박일주로 바꾸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일엽편주(一葉片舟), 망망한 바다 위를 떠가는 외로운 배 한 척, 고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프랑스라는 또 다른 미지의 땅에 당도할 즈음의 심상, 이를테면 기대와 불안 그리고 무언지 모를 새로운 것을 찾아낼 것 같은 궁금한 조바심이 뒤섞인 상황에서 택한 새 이름은 이후 계속해 온 「외로운 여인들」 연작에 특히 어울린다. 외로운 화가와 화폭 속 외로운 여인들은 무언의 대화, 오관(五官)을 넘어서는 교감(交感)으로 서로의 고독을 달래게 된다. 이점에 대하여 박일주 선생 스스로 작품 속의 여인들과 맺은 감정이입이라는 은밀한 속내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자정이 되어 쉬고 있으면 벽에 있는 그림에서 여인들이 톡톡 튀어나와 도란도란 얘기를 하며 논다. 그런 얘기가 참 재미있어. 그런데 얘기를 하다가 어떤 날은 저희들끼리 「오늘은 박선생님 기분이 안 좋으니까 우리 그냥 가자」그러면서 소근소근 하기도 하고 크게 얘기하기도 하지‥‥ 나도 그들이랑 같이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내 꿈이라 그럴까, 결국은 내 환상이겠지."
환상-작품 속에 무수히 등장하는 각기 다른 여인들을 창조하편서 품는 환상, 박선생 자신은 스스로를 이상가라고 정의한다. 자기가 찾는 여인상을 아직 만나지 못했노라고 한다. 그 이상적 여인상에 대한 현상화 작업에서 드러나는 끈질긴 집념의 밑바탕에는 6.27 동란시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자리잡고 있을까. 아니면 일찍 부모를 잃은 까닭에 모성애 결핍에 기인한 정서반응일까, 박일주 선생은 이 두 가지 추론의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화폭 속 여인들은 때로는 혼자 더러는 무수하게 등장하여 각기 다른 표정과 동작으로 자아내는 농염하고 관능적 분위기는 검은색이 주를 이룬다. 캔버스의 절대부분을 점하는 검은색 선호에 따하여 그 화려한 색감과 파급효과를 언급한다. 동양화의 주조(主調) 재료인 먹은 기실 매우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색임에도 3 원색에 익숙해있는 서양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결국 그 오묘한 색감에 강한 흡인력을 보인다는 것이 박일주 선생의 설명이다.
한밤중의 숲 속 꽃이나 풀섶 옆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 여인들은 춤을 추거나 피리를 불고 하늘을 바라본다. 상상 속의 새가 날개를 괴고 여인들의 시선에 교감한다. 미세한 표정 묘사보다는 다소 과장된 듯한 선정적 몸매가 포인트를 이루고 있다.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 로제 부이요(Roger Bouillot)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은 "숲 속의 초자연주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초월한 관능적 여인"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의 꿈, 질박하고 풍요로운 환상의 세계는 그리하여 외로운 여인들이 지어 보이는 동작하나하나, 그들의 육감적이며 고혹적인 자태를 통하여 보는 사람의 감성반경에 다채로운 형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박선생이 보았던 우리나라 여인들의 자태는 아주 고왔던 것으로 남았다. 어머니 누이 동네 아주머니 그리고 함께 뛰놀았던 소녀들의 모습은 70 년 이상 작가의 뇌리에서 부단히 소멸-생성되면서 각기 다른 이미지로 작가자신의 외로움을 승화해 왔다.
그것은 동시에 눈부시도록 찬란한 요정(妖精)의 모습으로도 구성된다. 자신이 성장한 고향의 풍광(風光), 희미하게 기억나는 잊혀진 추억들이 더러는 여인들이 불고있는 피리소리에 실려 귓가에 맴돌기도 하고 분홍빛, 주황빛 여인들 치맛자락의 고혹적인 색상으로 닿아온다. 또는 꽃향기, 과일냄새와 더불어 도원경(桃源境)의 환상마저 느끼게 해줄 수 있다. 박일주 선생의 파리화단 정착에 큰 영향을 준 카티아 그라노프(Katia Granoff) 여사(작고)의 코멘트는 바로 이와 같은 감각의 상응(相應)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의 힘을 눈여겨보게 해준다. "항상 새롭게 천일야화(千一夜話)처럼 펼쳐지는 선생의 꿈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아주 까다로운 멋을 탐하는 것이 아닐까요.(선생의 그림을 생각하며 보들레르의 시를 떠올립니다)."
어둡고 깊은 조화속에
멀리서 합치는 메아리처럼 밤처럼
그리고 광명처럼 한없이
향기와 색채와 음향이 서로 화답한다. 밤처럼
-보들레르 「상응(相應)」중에서-
소리와 빛, 향기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 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서로 화답하고 어울리면서 그지없는 열락(悅樂)을 선사해 준다. 이 즐거움은 박일주 선생이 강조한 바와 같이 자신의 그림을 보는 짤막한 순간이라도 「꿈」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의도와 연결될 수 있다. 현실의 삭막함과 비정을 딛고 무한한 환상과 꿈의 세계로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외로운 여인들」이 내비치는 색채감각은 검은색이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지만 그것은 화려하고 농염한 여인의 체취, 그들의 웃음소리, 피리소리와 어울려 보는 이의 심상(心象)에 각기 다른 무늬로 교감될 수 있다.
「외로운 여인들」에서 보들레르의 시학을 떠올린 카티아 그라노프 여사와의 만남은 박선생의 파리도착 직후에 이후에 이루어진다. 65 세의 노령에 단신 도착한 파리는 생소한 환경, 언어소통불능, 문화적 거리감, 생계 유지 문제 등 갖가지 곤경의 현장이기도 했다. 호텔에 투숙한 뒤 호텔 방에서 그린 작품과 일본에서 가져온 작품들을 들고 무작정 파리 중심가 화랑을 찾아 나선 오척단구의 노화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42kg의 체중에 실린 그림의 무게는 실제 이상의 중량감으로 다가왔다. 파리시내 화랑을 전전하기를 일주일, 우연히 찾아든 어느 화랑에서는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카티아 그라노프 여사를 만나게 된다. 영어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한국인이다"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내가 그린 그림이다. " "보여줄 수 있겠는가" (한동안 그림을 들여다 본 후) "어디에서 그리고 있나"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일주일전 파리에 와서 지금은 호텔 방에서 작업하고 있다" "여기에서 개인전 할 의사가 있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내게는 돈이 없다" "없어도 해보자." 실로 우연치 않은 계기로 당시 파리 화랑계 의 거물이며 그 자신이 시인이기도한 러시아 계의 그라로프 여사를 만나 그로부터 십 여 년 간 여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까띠아 그라노프 화랑에 전속되어 전시, 판매업무를 여사에게 위임한다. 지금 박일주 선생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거의 없다. 한국, 일본, 프랑스 등 떠도는 삶의 자취에 따른 탓도 있겠지만 파리 거주 초기 그라노프 여사에게 300 여 점을 모두 위탁한데 기인한다. 더구나 초기 작품은 6.25 당시 공산군이 모두 가져가서 대부분 북한에 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대소 300 여 점의 그림중 일부가 루브르 박물관, 미국백악관. 대영 박물관 등에 기증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정확한 목록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국내와 일본에도 적지 않은 그림이 있는데 천성이 모질지 못한 탓에 엄격한 작품관리가 불가능했던 것이 그 한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파리 굴지의 화랑 전속화가로 활동하면서 그라노프 여사와 각별한 인연이 이루어지는 데 여사는 박 선생을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지칭하며 시적 감각에 기초한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평으로 관심을 표현하곤 하였다. "선생이 쓰는 붓은 때로는 아련한 무지개들을 더러는 미풍을 타고 나르는 형형색색의 하루살이 때를 펼쳐 보입니다. 뒤엉킨 덤불과 양탄자처럼 수놓인 꽃들로 덮힌 풍경은 서양인에게는 이국적인 것이지요. 선생만이 풍기는 독특하고 부드러운 유머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탐스러운 생명체들."
그라노프 여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외로운 여인들」에서는 제목이 시사하는 외로움과 '정한(情恨)이 결코 우울하거나 비탄조의 자기연민에 함몰되지 않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유머를 바탕에 깔고 때로는 사실적이고 때로는 추상화된 오브제가 펼치는 자연 속의 역동성,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연출하는 갖가지 삶의 동작은 여기서 작가 특유의 건강한 에로티시즘에 실려 하나의 축제를 이루기도 한다. 드러낸 젖가슴, 유난히 강조되는 힙의 볼륨, 어깨와 허리의 절묘한 커브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보여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 탐닉 적인 신들의 휴식과 방심한 자태에서 엿보이는 육감과 관능의 포커스를 어렵지 않게 상기시켜 준다. 그러므로 「외로운 여인들」은 한복을 입은 아낙네들이 표현하는 보 편적 인간 감정과 양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포괄적인 본능과 정서의 공감대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대표작 「목신의 오후 (L'apies midid'un faune)」에 등장하는 요정들, 이들을 탐하여 몽상에 잠긴 목신의 시선, 그 시선이 털어놓는 감각적 자기 확인등 일련의 드높은 상징구도를 떠올려 본다.
이 요정들을 나는 영원불멸토록 하고 싶다
하도 훤 해 서
그녀들 엷은 장미 빛 살결이, 숲 속의 수 안
졸리운 공기 속을 떠 돌고 있다.
내가 꿈을 사랑했던가?
-말라르메 「목신의 오후」중에서-
이교적이며 관능에 찬 삶의 모습이 흡사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한 목신이 시실리섬의 숨막히는 오후에 육욕에 가득 찬 꿈을 꾼다. 그 꿈속에서 반인반수의 목신은 음악 또는 추억의 마술로써 이 매혹적인 몽환상태를 연장시키려고 한다. 이 목신은 바로 보로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화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어느곳엔가에 화가의 시선 또한 닿아있을 것이다. 끝끝내 자신이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고 유혹을 떨쳐 벌린 채 다시금 침묵속으로 젖어드는 목신=시인은 필경 하나의 관조(觀照)자의 자세로 전환하고 있다.
나의 정신과 이 무거운 육체는
서서히 교수의 거만한 침묵에 무너진다.
그만 누워 잠이나 자야겠다 모독일랑 잊은 채,
목마른 모래 위에, 그리고 나는 얼마나
포도주의 힘찬 별에 내 입을 열고 싶어하는가!
한 쌍의 요정이여, 안녕, 나는 그대들이 변하여 된
그림자를 보러 가리라.
-위의 시-
관조 혹은 명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이나 배경, 의중의 인물로부터 영감을 받는 일종의 신적 토로(吐露), 서정적 질문일 수 있다. 박일주 선생의 화폭에서 보는 관조의 자세는 사실적 묘사에 실린 상징적 시어로 구체화된다. 원초적 향수, 생애를 시종하여 강박 관념 처럼 따라다니는 그리움과 애정이 거기에 끈끈하게 베어있다. 박 선생은 작품과의 대화를 강조한다. 그림을 그려놓은 뒤 끊임없는 무언의 대화, 성찰, 사색 그리고 은밀한 영교(靈交)를 통하여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뒤이어지는 작품의 모티브와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요즈음 일부 젊은 작가들이 일단 작품을 끝낸 뒤 작품과의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 경향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박선생에게는 60 여 년 간 그려온 작품 대부분이 타인에게 소장된 관계로 대화를 나눌 대상이 많지 않지만, 아뜰리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외로운 여인들」의 창조작업과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
1937 년 서울 오사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지까지 모두 열 네 번의 작품 전을 개최해왔다. 1938∼1942 서울 조지아(丁子屋) 화랑(2∼6회), 동경 시세이도 (資生堂) 화랑 1952 년, 1972 년 미국 테르호트시(市) 쉘던 스워프 아트 갤러리, 1979 년, 1984 년 파리 까띠아 그라노프 화랑에서 각기 개인전을 연 이후 1986 년 실로 45 년 만에 고국에서 전시회를 다시 갖는다. (서울 예총화랑). "검정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여인 그리고 노란 은행잎, 빨간 감등 뚜렷한 색 대비로 입체감의 효과를 내고 있다. (1986. 10. 11 중앙일보)," 「외로운 여인」연작 30 여 점이 전시되어 박성규라는 40 대 화가로 떠나 80 세 가까운 노화가 박일주로 돌아온 고국에 자신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선보일 것이다.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전에 고국을 떠나 국내 미술계에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선생의 회한(悔恨)에 가득한 작품 전으로 남다른 의미를 가졌던 이 개인전에 화단과 각 매스컴의 각별한 관심이 모아진 바다. "이번에 선보이게 될 박씨의 그림들은 한결같이 숲 속 초자연적 분위기에 등장하는 여인상들이다. 마치 여신이나 선녀, 혹은 요정들의 풍만하고도 관능적인 몸짓들이 신비롭게 전개되고 있다. (‥‥‥)치마저고리로 온몸을 몇 겹 씩 감싼 한복이 아니라, 풀어 헤친 가슴이 노출되고 하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복의 또 다른 이미지이다 (1986 10. 9. 한국일보)."
이후 박선생은 잦은 국내 전시회로 수 십 년 간 닫혀있던 고국과의 연계를 되찾고 막혔던 물줄기가 터지듯 노익장의 정열을 과시하게 된다. (1987 년 11 월 한국화랑 1989 년 11 월 두손 갤러리). 특히 두손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은 모교 경기중학 동기들의 모임에서 기획하여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의미 깊다고 박선생은 회고한다. 흡사 레이스를 뜨는 것 같은 섬세함과 고전화가들이 갖는 완전 미의 추구는 박선생이 정착한 자신의 예술세계의 한 기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숲 속 빈터에서 풍만하며 관능적인 여신들이 혹은 조롱하는 듯 장난끼 어린 선녀들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수 없는 사랑의 세계로 또는 꿈의 세계를 초월한 저 너머의 세계로 유혹하여 이끌어 가려는 듯 놀고 있는 세계, 봄의 원곡, 이교적 사랑의 제전인 박일주 선생의 작품들은 매혹 적인 영원한 여인상의 화신이며 청춘의 샘에서 불사의 생명수를 마신 요정들이며 우리를 보호하여 주는 여신상 그 자체다. (평론가 로제 부이요)"
박일주 선생의 작품이 동서양의 서로 다른 정서구조와 의식의 편차를 뛰어넘어 온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가령 「외로운 여인」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별반 근심 없어 보이는 충만한 젊음의 사랑예찬 그리고 달밤 숲 속 빈터에서 세밀하면서도 포근히 감싸주는 색채로 펼쳐 보이는 바 인간의 깊숙한 무의식 속에 내재한 이상향을 향한 갈망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다다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 이룰 수 없는 환상을 향한 목마름이 시적 세계의 범주 안에서 구체화될 때 거기에는 자생적으로 보편성을 띈 설득력이 우러나올 것이다.
박선생의 작품연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열 네 번의 개인전이외에 단체전이나 그룹활동에 거의 참여않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외국에서 활동한 탓에 조직적 연대 형성이 어려운 까닭도 있을 수 있다.
프랑코레 2001 이라는 한불 작가전, 그라노프 화랑소속 작가전, 재불 화가 전시회, 몇몇 기금조성을 위한 단체전이외 에는 작품을 내놓지 않았던 것은 그림이란 결국 작가 개인의 치열하면서도 고유한 자기세계 구축의 소산물이라는 명제에 더 큰 값을 매겼던데 기인한다.
젊은 시절 얼마동안의 신문사 근무이외에는 평생을 그림을 업으로 삼고 거기에는 정당한 노동대가를 받는다는 신조로 생활해온 장인 의식에서 그런 까닭에 화가란 작품제작 외의 활동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박선생은 "프랑스에서는 화가는 그림만 그리고 대학에 나가는 교수들은 학생들을 지도하기만 한다. 정확히 구분 되어있는 까닭에 프랑스에서는 화가들의 생활이 아무리 곤란해도 다른 것을 엿볼 틈이 없다. 샤갈이 죽기 전 생일날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사회: 선생님은 앞으로 무얼 하실 겁니까? 샤갈: 내가 무얼 하다니? 내가 그림을 그릴 때는 샤갈이지만 그림을 안 그릴 때는 저 앞에 돼지와 같아, 화가가 붓을 놓으면 화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지」 십 수년간 소속되어 앙던 까티야 그라노프 화랑은 가히 독보적인 예술감각과 발군의 영향력을 가진 까띠아 그라노프 여사의 개성아래 피카소, 샤갈 등 당내 대가들이 활동한 바 있다. 귀국전시회를 제외하고는 전속계약으로 인하여, 프랑스 내에서의 활동이 전적으로 그라노프 여사의 결정에 의존되었으며 작품유통 또한 여사에게 일임하였기 때문에 그라노프 화랑이외에서의 작품전이 어려웠다고 한다. 프랑스 체류 초기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선뜻 전속계약을 맺고 작품 활동의 길을 열어준 여사에게 지금도 다른 감사의 정을 느끼고 있지만 반면 자유로운 화단활동이나 작품 관리의 임의성이 배제된 데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 역시 숨길 수 없음을 밝힌다.
그라노프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여사의 여동생 아들이 화랑을 이어 운영하게 된 까닭에 전속계약에서 풀려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진 이후 수년간 박선생은 새로운 의욕과 끊임없는 모색으로 휴일이 없다. 여든 셋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캔버스 앞에서는 젊은이 못지 않는 뜨거운 시선과 재빠르고 섬세한 화필을 잃지 않는 박일주선생은 열 네 번째 개인전을 1992 년 12 월 2 일 부터 22 일까지 파리 불라키아 리브 드롸트 화랑에서 가진 바 있다. 1984 년 까띠아 그라노프 화랑에 이어 파리에서의 세 번째 개인전에는 가일층 원숙해진 조형미와 깊은 시적 세계를 형상화한 열다섯 점의 「외로운 여인」이 출품되었다. 이 화랑의 대표 마들렌느 불라키아(Madeleine Boulakia)여사는 27 년 간 파리에서 화랑을 경영해 온 원로로서 박일주 선생의 작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러나 유태계의 불라키아 여사는 특유의 감식력과 판단에 따른 객관적 평가에 바탕 하여 자신의 화랑에서의 초대전을 기획했음을 밝히고 있다. "매번 박선생의 화실을 방문할 때마다 머나먼 전설과 꿈이 살아 숨쉬는 미지의 세계로 아름다운 여행을 떠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
1992 년은 박일주 선생의 활동에 있어 매우 뜻깊은 한 해로 기록될 수 있었다 10 월 하순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FIAC'92 전에 출품하였고, 그라노프 화랑과의 계약만료 이후 파리에서의 개인전은 부단히 변신하고 끊임없이 탐구한다는 작가정신에 비추어 볼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로 간주된다. 작품성 자체보다는 미술외적인 활동과 권위로 보충하려는 작품, 미술투기 열풍에 편승하여 대량 발표하는 작품들에 대한 반감에서일까 종래 작가 스스로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안아 일견 기복 심하게 유통되었던 작품가격 또한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정립되었다고 한다. 이번 초대전에 즈음하여 박선생 자신 또한 각별한 감회를 피력하면서 아직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여인상의 형상화작업이 완결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를테면 암중모색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 요즈음에도 꿈을 많이 꾸며 환상의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이 작업은 여생을 두고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하나의 소명(召命)같은 생각이 굳어져 간다는 것이다.
일주라는 이름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파리로 오면서부터 쓰고 있지만 박선생의 삶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일엽편주(一葉片舟)의 숙명적 방향타에 의하여 지탱되어 온 것이 아닐까. 평탄치 못 한 개인적 삶의 역정,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박한 누 의 길을 걸어와 다다른 80노령의 삶을 회고하면서 오늘도 조그마한 아뜰리에에서 화필을 옮기고 있다. 「외로운 여인」 연작은 앞으로 10 여 년 정도 더해야 완성을 볼 것 같다는 작가자신의 여유 있는 자세와 집요한 천착은 향후 더욱 깊어진 환상과 꿈을 묘사하고 변용 시켜 줄 것이다. 추억이 있는 한 그것은 필경 꿈으로 전사(轉寫)된다. 꿈과 환상의 세계가 실존하는 현상에 흘러들어 거기에서 하나의 상징이 이루어진다면 그때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문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할 때 「외로운 여인」은 이 문의 빗장을 여는 손길에 따뜻한 사랑과 향으로 활력을 불어넣어 줄지 모른다. 그때 그 여인들의 떠도는 외로움은 비로소 달라질 것이다.
이 규 식
한남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나의 할아버지
열 세 살 무렵,
아버지는 외국에서 삼촌 할아버지가
오셨다며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셨다.
가을이었는데 이상하게 보였던, 포스터 많은
대학로의 풍경들이 기억난다.
밖에는 초상집에서 본 적이 있었던 화환들이 늘어서 있었고
안에는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다른 분들과 인사하느라 바쁘셨고,
박물관밖에 가본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 곳에
가득한 그림들을 하나씩 구경하였다.
그냥 구경만 했지만, 내 눈에 보였던 아름다운 여인들과
끝도 없이 떨어지는 꽃잎들은 참 희한하게 보여서 신기했다.
아버지는 다시 나를 호텔(가든호텔이었다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다)로 데리고 가셨다.
커피숖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그만 분수를 보고 있으니,
회색 스웨터와 면바지 차림의 할아버지가 내려오셨다.
인사를 하고 계속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분수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버지는 그림에 사인이 없다며 가지고 오신 그림을
할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한 장은 '54 년 네델란드의(和蘭에서라고 써있다) 가느다란
흰색 난간 아래의 강과 건물들을 그린 채색화이고,
한 장은 '76 년 황토색 종이 위에 먼 산의 성(城)과
아래에 양들을 그린 데상이었다.
할아버지는, '아, 이 그림을 네가 가지고 있었구나',
하시며 반가워하셨고, 흰색 난간을 가르키면서
지금은 손이 떨려 이런 선을 쓰지 못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사인을 받으러 할아버지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 다음부터는 내게는 잊을수 없는 기억이다.
방은 물감 냄새가 났고 그림 도구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황토색 종이와 검정색을 칠한 종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할아버지는 검은테 안경을 끼고
그림 한장 한장에 곱게 깎은 연필로 이름을 쓰셨다.
난 옆에서 할아버지를 보았다.
멀리서 찾아온 손자와 그의 조그만 아들에게
자신의 그림에 사인해 주는 노화가를,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 손은 아버지의 손과 꼭 닮았고,
우리 일가의 전통처럼 마디가 굵고 섬세했다.
나는 그 주름진 할아버지의 손 만큼
많은 것이 담겨 있는 손을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연필 두 자루를 얻어온 나는 정말 신이 났다.
친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었던 나는 그분의 모습을
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내 손에 담겨져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후로 내가 미대에 가게 된 것도 그 분의 덕택이리라.
2001. 1.
- 박동현
* 박일주
1910. 2. 17 출생 - 경상북도 청도 본명 박성규(朴性圭) 유년 시절을 보냄 소학교 중퇴, 검정고시에 합격 1930 경기고 졸업 (당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 서울 1935 동경 문화학원 서양학과 졸업 매일신보 기자로 취직, 동경에 파견 근무 1945 귀국 1952 U.N. 군 사령부 전속화가로 일본체류 1975 파리 行 박일주(朴一舟)로 계명 1979 까띠아 그라노프 화랑과 평생계약 1989 까띠아 그라노프 여사의 사망으로 중단 1994. 6. 2 별세 1995. 4. 5 유해를 청도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