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주상절리와 철원평야에서 마주한 시간의 풍경
강원도라 하면 으레 산간 지역을 떠올린다. 하지만 철원은 다르다. 끝없이 펼쳐진 철원평야가 먼저 반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탄강이 빚어낸 깊은 협곡을 마주하면 자연이 얼마나 크고 거친 존재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철원에 들어서자 논마다 물이 가득했다. 갓 심은 벼들은 벌써 땅맛을 본 듯 파릇파릇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어린 벼를 바라보니, 이 넓은 평야가 왜 예부터 곡창지대로 불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지난 25일, 철원을 다녀왔다.
풍요로운 들판에 서려 있는 역사의 굽이굽이
풍요로운 들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철원의 오랜 역사가 떠올랐다. 이곳은 단순히 넓은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땅만은 아니다. 천 년 전에는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왕도였고, 오늘날에는 분단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접경의 땅이다.
그래서인지 철원은 강화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나라의 중심이었던 왕도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오늘날에는 분단의 최전선에 자리한 접경 지대라는 점도 닮았다. 천 년 전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과 고려의 수도를 지켜냈던 강화는 시대는 달라도 역사의 굽이 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그 생각을 품은 채 옛 군사보호구역이었던 주상절리길에 접어들었다. 드르니매표소에서 출발하여 순담매표소까지 3.6km이다. 이곳 탐방길은 한때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곳이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덕분에 한탄강 협곡의 원시적인 풍경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탐방로는 절벽 중턱에 매달리듯 이어져 있었다. 이 길을 '잔도(棧道'라 부른다. 잔도란 원래 절벽에 기둥을 박고 널판을 얹어 만든 길을 뜻한다. 이름 그대로 길은 아찔한 절벽을 따라 이어졌다.
벼랑에 의지해 놓인 길을 걷다 보니 발바닥에 닿는 철판 틈새와 유리 바닥 밑으로 서슬 퍼런 강물이 그대로 내려다보여 절로 오금이 저려왔다. 우렁찬 물소리를 들으며 벼랑 끝을 걷는 일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아슬아슬하고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 길 위에서 일행과 이야기를 나눴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러게 말이야. 대단하네, 대단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오랫동안 위험한 협곡으로만 여겨지던 곳에 길을 내고, 사람이 오지 않던 곳에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다. 절벽이 무섭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 누군가의 상상력이 결국 철원을 대표하는 명소를 탄생 시킨 셈이다.
불이 짓고 물이 깎은 거대한 성벽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발 아래로 한탄강이 푸른 비단 띠처럼 협곡 사이를 굽이쳐 흐르고 있었고, 강 양편으로는 검은빛 현무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절벽을 바라보던 일행이 손가락으로 바위벽을 가리켰다.
"저게 주상절리라는 건가?"
"무등산 서석대와 입석대처럼 오각형, 육각형 기둥들이 뚜렷하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저게 다 주상절리야."
"신기하네. 오랜 세월 사람이 깎아 놓은 것도 아닌데 자연은 역시 위대해!"
가까이서 보니 절벽은 마치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성벽 같았다.
"그러니까 불이 먼저 만들고, 물이 나중에 깎아낸 거네?"
"그렇게 보면 되지."
한마디로 정리가 되었다. 먼 옛날 북한 평강 일대에서 분출한 용암이 이곳까지 흘러와 식으면서 오각형과 육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갈라졌고, 이후 한탄강이 수십만 년 동안 그 땅을 깎고 다듬어 지금의 협곡을 만들어 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불과 물이 함께 빚어낸 거대한 자연의 작품이었다.
실제로 한탄강 협곡의 웅장한 풍경은 잔도길을 만나면서 비로소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절벽도, 강물도 예전 그대로지만,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절벽 끝자락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강물이 흐르고, 위에서는 숲이 자라고, 그 사이를 사람들은 잔도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수십만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통로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처를 딛고 흐르는 시간
흔히 사람들이 한탄강을 '한숨 쉬고 한탄하는 강'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한탄강의 이름은 '크고 넓은 여울'이라는 뜻을 지닌다. 슬픔에 머무는 강이 아니라, 바위를 가르고 협곡을 만들며 쉼 없이 흐르는 강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철원평야의 어린 벼들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자라고 있었고, 한탄강은 말없이 협곡 사이를 흘러가고 있었다. 수많은 역사의 굴곡과 전쟁의 상처를 지나왔지만 자연은 묵묵히 제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철원에서 만난 가장 큰 풍경은 눈앞의 절벽도 강물도 아닌, 상처를 딛고 오늘을 평온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전갑남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