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정사에 와서 / 이승하
아주 오래
길이 집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걸었고
눈이 오면 눈길을 미끄러지며 걸었다
누우면 천정에는 수많은 별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우물이 있을것이고
저곳으로 가면 설산이 나타날 것이다
난생처음
집을 원했다
비바람 피할 수 있는 집
머물면서 설할 수 있는 집
등 따뜻하고 밥 지을 수있는
대나무로 둘러쳐진
이부자리가 있는 너와 나의 도량
빔비사라 왕이여
우리는 그대의 덕을 받았다
하지만 때가 되면 사람은 모두
행장을 꾸려 길로 나서야 한다
이 죽림정사를,기원정사를
등 뒤에다 두고 또다시
구걸의 길 구법의 길 구도의 길
집은 다리를 약하게 하는 법이니
모든 집은 재물이니
나 다시 문 열고 나서야 한다 여래여
어느 길이나 죽음을 향해 나 있겠지만
ㅡ <불교문예> 2023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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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 시인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감시와 처벌의 나날』 『나무 앞에서의 기도』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등.
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으로 경기문학대상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