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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곳간과 헛간
어릴 적 우리의 곳간은 특별한 곳으로 참으로 많은 용도로 쓰였는데 그 당시는 지금의 창고가 아니라 생활의 모든 것이 들어 있어서 필요한 많은 것들이 곳간에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자리를 제일 많이 차지하는 것은 곡식들이고 각종 약초나 마늘, 고추, 호박, 생강, 기타 많은 양념류들이 들어 있었고 다음 해 봄에 뿌릴 씨앗과 종자도 들어 있고, 각종 농기구의 연장과 생활용품이 정리되어 있었던 곳간은 집안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곳간에 도둑이 들지 않도록 자물쇠로 채워 문단속을 철저히 하였고, 쥐나 여우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개나 고양이를 곳간 주변에 배치하고, 곳간 열쇠는 그 집 주인이나 안주인이 맡아서 다른 사람은 근처에 범접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주면 집안 살림살이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줄로 알았고, 열쇠를 맡기면 곳간에 며느리의 허락을 받고 출입할 정도였는데 때로는 집안의 감옥 구실을 하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곳간과 같은 용도로 쓰였지만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과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관하고 모아두는 '헛간'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헛간은 문을 열어 놓고, 쓰레기나 재를 모아두는 곳으로 본채와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정결한 것은 곳간에 있다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헛간에 두었습니다. 깨끗한 생활도구는 곳간에 두었다면 지저분하고 막 쓰는 연장들은 헛간에 두었고 화장실도 주로 헛간 옆에 있었고, 소변을 받아두는 거름통도 헛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같은 곳간으로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선한 것은 곳간에서 그리고 악한 마음은 헛간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깨끗하고 좋은 것을 간직하여 선한 말과, 생각이나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곳간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추악하고 더러운 생각이나 말과 행동으로 헛간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가득 찬 마음에 있기도 합니다. 가만 생각하건데, 나는 선한 것을 가득히 담고 있는 곳간인가? 세상의 쓸모없는 더러운 것을 가지고 있는 혹시 헛간은 아닌가? 그리고 나의 곳간에서 간직하고 있는 무엇을 꺼내는가? 곳간에 모아둔 선한 마음이 넘쳐나서 내가 하는 말이 선하고 과연 아름다운가? 헛간에 가득한 악한 마음으로 더러운 냄새와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추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토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 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 주님’하고 부르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잘 지키지 않으면서 더러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시키고, 잘했다고 우기고,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서 오히려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명심보감의 '팔반가'(八反歌)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아조 출천음 군청상불염 부모 일개구 편도다한관 비한관친괘견 호수백두 다암간 권군경봉노인언 막교유구쟁장단’
兒曹 出千音 君聽常不厭 父母 一開口 便道多閑管 非閑管親掛牽 晧首白頭 多諳諫 勸君敬奉老人言 莫敎乳口爭長短
<어린 자식들이 아무리 말이 많아도, 그대는 언제나 듣기 싫어하지 않건만, 어버이 어쩌다 한번 입을 여시면, 잔소리 많고 참견 한다 여기네, 참견이 아니라 걱정되어 그러시는 것이지, 흰 머리 되도록 사시면서 아시는 게 많다네, 그대에게 권하노니, 늙은이 말씀을 공경하여 받들고, 젖내 나는 입으로 옳다 그르다 다투지 말라.>
오늘은 갑자기 부모님에게 불효자인 내가 이 노래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과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고 푸념만하고 성질만 부리면서 살았던 자신의 삶 때문에 우울해집니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거나 '공중누각'(空中樓閣)이라는 말이 있는데 <모래 위에 누각을 짓는다.>는 말이고, <공중에 누각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뿌리와 기초가 없기 때문에 지어도 금방 무너지고, 지을 수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도 바로 그런 모습을 주님은 걱정하십니다. 부모님의 말씀이나 신앙의 선조들의 말씀이나 순교자들의 가르침이나, 훈계를 잊어버리고 멋대로 살면서 흐트러진 신앙을 다시 생각합니다. 신앙의 깊이를 굳건하게 하고, 자기 잘난 멋으로 살지 않으며, 말만 앞세우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여 가장 튼튼한 신앙의 집을 짓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답니다.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과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8-17
8 여호야킨은 열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느후스타인데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이었다.
9 여호야킨은 자기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0 그때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다.
11 이렇게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성에 이르렀다.
12 그러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은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대신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빌론 임금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론 임금은 그의 통치 제팔년에 여호야킨을 사로잡았다.
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주님의 집에 있는 모든 보물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내가고,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주님의 집에 만들어 놓은 금 기물들을 모조리 떼어 냈다.
14 또한 온 예루살렘 주민과 모든 대신과 모든 용사 등 포로 일만 명과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갔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5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을 모후와 왕비들, 내시들과 나라의 고관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들을 끌고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간 것이다.
16 바빌론 임금은 또 훌륭한 사람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등,
전투할 수 있는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17 그런 다음에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를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
축일6월 27일 성 치릴로 (Cyril)
신분 :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 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 연도 :380?-444년
같은 이름 :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삼촌인 테오필루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인 삼촌을 수행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isostomus, 9월 13일)를 단죄한 퀘르키아(Quercia) 주교 회의에 참석했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삼촌을 계승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삼촌보다 더 뛰어난 신학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경쟁자였던 티모테우스(Timotheus)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재개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던 유다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관여했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오레스테스 총독 또한 그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성 키릴루스는 세속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며 유다인들 문제에서 손을 뗐다.
성 키릴루스는 신학적으로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노선을 따르며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였다.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그는 430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분쟁에 휘말렸다. 네스토리우스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동일하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즉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이단에 빠지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성 키릴루스는 강론과 서한을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430년 8월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교황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성 키릴루스도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는 교황이 아닌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성 키릴루스를 이단으로 고소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황제의 신임을 믿고 고소했지만, 황제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주교 회의를 소집했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431년의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이다.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는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에페수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 요한 1세(Joannes I)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 세력을 단죄함으로써 성 키릴루스의 승리로 끝났다.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유배되었고, 이런 과정을 겪으며 그리스도론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리가 확고히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인 433년에 성 키릴루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화해를 이루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의한 대로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했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하며 인간 예수와 동일함을 인정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성 키릴루스는 이러한 결의와 합의를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고,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신학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이단이 사라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후로도 성 키릴루스는 모든 생애를 바쳐 이단 척결을 위해 사목적, 학문적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의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지속해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관한 여러 주석서와 많은 교의 신학 논문을 비롯해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에 대한 반박문과 편지 그리고 다양한 강론들이 전해져 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6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치릴로 (Cyril)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