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서울 명동의 심지다방. 400석 규모에 2000장의 음반을 갖추고 동굴을 연상케 하는 전위적인 실내장식으로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었다.
- 원조는 50년대 대형 음악감상실
- 전축·복제음반 등 유통되자
- 기존 다방도 DJ박스 꾸며 영업
- 식당·스낵코너도 가세하자
- 통기타 라이브로 차별화 꾀해
한국전쟁으로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새로운 미국 문화가 일본 문화의 잔재를 밀어내며 생존에 허덕이는 한국인에게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새로운 문화를 먼저 받아들이는 젊은이 중 앞서가는 사람들은 미국 대중음악에 눈뜨기 시작했다.
음악인들은 미8군 무대를 통해 온몸으로 미국 대중음악을 받아들였고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미군을 위한 라디오방송 AFKN을 통해 새로운 음악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가 되기 이전에는 한국 라디오에서는 미국 대중음악인 팝송을 소개하지 않았다. 1962년이 되어서야 KBS 라디오의 '금주의 히트 퍼레이드'에서 주 1회 30분간, MBC 라디오의 '한밤의 음악편지'에서 간간이 팝송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팝송을 들으려면 시내 음악전문다방으로 가야했다.
이런 흐름을 받아들인 다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4년경 명동의 '은하수 다실'이 클래식을 주로 틀다가 최초로 팝송을 틀어준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1957년 종로에 '디쉐네'와 같이 팝송만을 전문적으로 틀어주는 '음악감상실'(혹은 뮤직홀)이 생기면서 음악다방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디쉐네는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앞쪽에 무대가 있고 무대를 향하여 1인용 소파가 놓여있어 극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뒤쪽에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DJ박스가 있고 여기서 DJ가 신청음악을 틀어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부산의 '무아음악실'이 바로 이런 형태였다.
라디오 방송이 외국 음반을 수입할 수 없었던 시대에 이런 음악감상실은 최신 음반, 빌보드 챠트를 비롯한 외국음악잡지, 최고급 음향기기 등 최신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방송국의 수준을 능가했다.
라이브 음악 종합백화점이었던 '오비스캐빈'의 광고 문구.
고막이 아리도록 울려퍼지는 재즈 리듬 속에 티 없이 지껄이고 앉아있는 저 GI들은 지금 미국 속에 앉아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서울에 앉아있는 것일까? 뮤직홀에 꽉 들어찬 이 땅의 틴에이저들은 앉은 채 의자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어이 터지고야 마는 괴성. 어느 사이엔가 손뼉소리에 맞추어 튀스트는 GI가 무색하도록 열을 올린다고 문화식민지. 독립한국의 서울 속에 자리잡은 치외법권지대.
-'멍든 전위들 2.뮤직홀' 대한일보 65.1.28
위의 글은 기성세대들이 새로운 음악문화를 탐닉하는 젊은이들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대형 음악감상실은 '뉴월드' '세시봉' '라스칼라' '아카데미' '메트로'등으로 이어지면서 1966년까지 호황을 누린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한국 방송 인프라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TBC-FM(1965), 대구의 한국FM(1966)과 같은 FM방송이 생겨난다. 1963년에는 민간상업방송 DBS라디오가 개국하면서 1964년부터 최동욱이라는 DJ가 '탑튠쇼'를 통해 팝송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하자 MBC라디오에서 '탑튠퍼레이드'로 맞불을 놓으면서 드디어 팝송이 방송으로 제대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구하기 힘들었던 팝송 음반들이 1960년대 중반부터 비록 불법음반이지만 청계천에서 대거 생산되기 시작했고 여유있는 사람들은 전축과 라디오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존 다방에서도 얼마든지 DJ박스를 설치해놓고 팝송을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음악감상실은 밀려나고 음악다방이라는 형태로 탈바꿈하게 되면서 명동에 '심지' '청자', 소공동의 '대호', 광화문의 '초원'과 같은 음악다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업소는 대규모이면서 많은 음반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는 400석 규모에 2000장의 음반을 갖추었고 전위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실내장식으로 골수파 젊은이들이 애호하는 대표적인 음악다방이었다.
이렇게 DJ가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다방은 젊은이가 드나드는 거의 모든 공간으로 확산되어 심지어는 식당이나 스낵코너까지도 DJ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들어서서 청년세대가 통기타음악이라는 새로운 음악으로 주류음악계에 진출하게 되자 음악다방은 차별성을 상실하게 되어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
새로운 전략은 규모는 축소하고 컨텐츠는 차별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20평 내외의 아담한 규모에 자유롭고 개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실내장식을 하고 팝음악은 물론 통기타음악을 라이브로 들려주는 것이었다.
라이브음악 종합백화점이었던 명동의 '오비스캐빈', 편안한 응접실 분위기의 충무로의 '르시랑스', 골수 중의 골수파가 드나들었던 명동의 '내쉬빌' 등은 1970년대 통기타음악의 자존심과 순수성을 지켜낸 중요한 음악업소였다.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그때 그시절 추억의 명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