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원피스 속 자유와 통제에 대한 고찰
부제:자유를 위한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원피스란?
원피스는 해적 VS 해군에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해적은 바다에서 자유를 찾고자 하고, 해군은 그런 해적을 통제하고자 한다. 간단하게 본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만, 해적중에서도 바다에서 자유를 찾고자 하는 이와 바다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로 나뉜다. 이는 원피스 세계관 속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구도이며, 오다는 이러한 사실을 운명론으로 엮고 있다. 예를 들어 바다에서 자유를 찾은 전 해적왕 골 D. 로저는 그의 의지를 이은 몽키 D. 루피가 있고, 전 과거 바다를 지배했던 록스 D. 지벡과 그의 의지를 이은 마샬 D. 티치가 존재한다.
이 둘의 싸움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운명적으로 이어지며 내가 말한 원피스의 더 중요한 내용이 이에 해당된다.
자유와 통제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와 통제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이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원피스 세계관 속에서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많은 논쟁이 오가고 있다.
해적들이 얻고자 하는 자유는 현실에서의 자유(개인)주의와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자유(개인)주의란, 한 명 한 명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보장하는 사상으로, 개인의 신체, 사상, 재물 등의 정부가 과도한 간섭을 금지한다.
홉스는 자유주의 토대를 만들어냈고, 이를 존 로크와 몽테스키외가 계승하여 자유주의를
만들어냈다. 이는 해적들이 세계 정부로부터 바다에서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하는 의견과 같다.
해군이 추구하는 통제란, 현실에서의 전체주의와 비슷한데, 이는 전체주의가 주장하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처럼 해군들의 우두머리인 세계 귀족 “천룡인” 그 위에서 천룡인들을 지배하는 “오로성”이 존재하고, 마지막으로 원피스 세계관 속 왕인 “이무”가 존재한다. 이처럼 원피스 세계관 속에서 세계 정부는 모두 “이무”만을 위하여 존재하며 이는 현실 속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자들과 닮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체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전체주의는 대중을 국민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명칭이며, 전체주의는 이름이 생기기 전에도 “이오시프 스탈린”, “아돌프 히틀러”처럼 독재자들이 권력을 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체주의를 프리디리히와 브레진스키 등의 사회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전체주의 체제를 정의하였다.
선과 악
전 문장에서 내가 해적을 개인주의와 비교하였고, 해군을 전체주의와 비교하였으며, 원피스 세계관 속에서도 해군보다는 해적인 주인공 몽키 D. 루피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펼쳐나간다.
그렇다면 오다(작가)는 해적이 착하고, 해군이 나쁘다 말하는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원피스를 본 사람이라면 바로 알 것이다. 해적 중에서도 주인공 루피와 로저같이 자유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티치와 지벡같이 바다를 지배하고자 하는 해적이 존재한다. 또 해군 중에서도 몽키 D. 가프와 같이 바다에서의 통제가 아닌 해적에게서 순전히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해군을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사자즈키(아카이누)처럼 독선적이고 확고한 정의관을 가지고 있으며 시민의 안전보다는 해적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해군도 존재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원피스가 단순한 주인공 성장물이 아닌 철학적인 내용과 엄청난 복선이 존재하는 오다(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만화라고 생각이 들었고, 비록 만화이지만 정의로운 해적, 잔인한 해군 등 현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을 그려냈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정의를 위한 폭력
앞서 원피스 세계관 속 해적과 해군을 비교하며 설명하였는데, 이번에는 해적과 해군들이 각자의 사상을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원피스 세계관 속 해적과 해군들은 자신의 힘 또는 무기를 수단으로써 사용한다. 즉, 폭력(무력)이라는 말이다. 만화 속에서 폭력이란 만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의 폭력은 파괴적이고 고통을 낳는 수단으로써 법적으로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도 금지되고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
폭력에 관하여서 서로 상반된 생각을 한 두 철학자 “사르트르”와 “카뮈”가 존재한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인간과 집단, 사회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 차이가 나는데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의 의견에 어느정도 동조하면서, ‘폭력’이란 인간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말하였다. 폭력은 어느 상태로도 존재해오고 있고, 이에 대한 대항폭력이 일어나며,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라는 존재의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말하였다.
사르트르는 폭력을 찬성한 것에 반하여, 카뮈는 정치적 폭력 일체를 거부하였다. 진보적 폭력과 목적, 수단의 문제에서 집단적으로 강박되는 한계는 자신의 존재 방식을 아주 드러내어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위기가 닥칠수록 더욱더 요구의 강도가 올라가며, 파시즘과 제2차세계대전, 모더니즘의 붕괴 등은 인간을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하였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폭력에 대한 철학은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각자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폭력에 관하여서는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간에 자신 또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원피스 명장면 or 명대사
이렇게 원피스 세계관 속 자유(해적)와 통제(해군) 그리고 서로의 사상을 위해 수단이 된 폭력에 관해서 나의 생각과 철학자들의 주장을 적어봤는데, 원피스에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무수히 많다. 나는 이것을 차례대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1.원피스 400화에서 우솝이 해적왕의 부선장 레일리에게 원피스의 정체에 대하여 물어본다.
“‘보물이 어디있나’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보물이 있나없나’같은 건도 듣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두 그렇게 목숨걸고 바다에 나온거라고!,
여기서 아저씨(레일리)로부터 뭔가 듣게 된다면 나는 해적 그만둘거야!,
시시한 모험이라면 난 안해!!”
라고 소리친 장면에서 운명적으로 해적왕이 될 루피가 자신의 운명론적 삶과는 반대로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인생이란 바다를, 선택이란 항해를 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삶에 이유를 찾으려는 루피에 모습이 우리에게 결과 보다는 삶에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2.원피스 86화 “Dr.히루루크”가 죽기 전 “쵸파”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을 총알이 꿰뚫었을 때?”
“아냐”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냐”
“맹독 버섯 수프를 먹었을 때?”
“아냐!”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다.”
“내가 사라져도 내 꿈은 이룬다.
분명 구할 수 있어
의지를 잇는 자가 있다면 말이다
안심해라, 쵸파
네가 준 버섯으론 난 죽지 않아”
“정말 멋진 인생이었다!!”
이 상황에서 Dr.히루루크는 불치병에 걸리고 걱정하는 쵸파가 잘못 만든 맹독 버섯 수프를 먹고 죽기 전이었다. 그런데도 Dr.히루루크는 외친다. 내가 이곳에서 육체적으로 죽고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나의 꿈, 나의 의지가 잊히지 않는다면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굉장히 두려움을 느끼며, 그것을 위로받고자 종교를 믿기도 하는데, 나도 “내가 죽는다면?”하고 상상을 하며 두려워하곤 한다. 하지만 Dr.히루루크에 죽음을 보고선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육체적으로 죽는다는 것에 어째서 두려움을 갖는 것일까? 정말로 내가 진정 두려워해야 될 것은 나의 꿈과 정신이 잊힐 때라는 것을 말이다.
3.원피스 488화 정상결전에서 코비(해군)가 아카이누(사자즈키)를 막으면서 소리친다.
“이제 그만둡시다!
이제 이 이상 싸우는거 그만두자고요!
목숨이 아깝습니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귀가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데!
목적은 이미 이뤘는데!
전의가 없는 해적들을 쫓아가
끝낼 수 있는 싸움에 욕심을 더 내고
지금 치료하면 살 수 있는 병사들을 버리고
그런데도 또 희생자를 늘린다니
지금부터 쓰러질 병사들은
마치 바보같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코비가 해군대장을 막으면서 소리치며 진정으로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걱정하는 장면에서 코비가 진정으로 정의로운 해군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현실에서 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진정으로 용기를 낸다면, 그 몇 초가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의 인생, 혹은 이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난 말하고 싶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유튜브 원피스 명장면
첫댓글 원피스 팬으로 보이는군요. 자유와 통제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로 보이고요. 당연히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므로, 그쪽에 무게가 두어집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반되는 폭력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선한 의도가 악한 수단의 사용을 허용하는가? 이 문제에 쉽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모두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무척 어렵고 힘들지만, 선한 의도는 선한 수단으로 실현되어야 하며, 혹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팬에니메이션인 원피스에는 전체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면면이 발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