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1 / 이민하
얘들아, 집에 가자
이제 곧 폭설이 올 텐데
많은 것들이 쏟아지고
더 많은 것들이 묻힐 텐데
희끗희끗 철근이 드러나는 나무들과 층층이 휘어지는 나뭇가지들
잠들 수 없는 창문들이 와르르 쏟아지듯
가을이 무너졌는데
집에는 불볕처럼 끓고 있는 미역국이 있고
냉장고에는 화내서 미안하다는 쪽지가 있고
옷걸이에는 세탁소에서 막 돌아온 슈트 한 벌
귀가를 서두르는 종종걸음으로
거리의 눈은 우리의 눈을 지우고
어떤 날은 날씨 이야기만으로 하얗게 지새우겠지
몇 페이지의 밤이 찢어지고
끼워 맞출 수 없는 기억들
거리에 두고 온 건 우리였을까
내일의 약속을 취소하고
슬픔을 꾹꾹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
우리는 영원히 숨기고 싶은
비밀번호를 가졌구나
ㅡ 《문장 웹진》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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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하 시인
1967년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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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각각의 현관 비밀번호가 있다.
제목 <9201>은 화자의 비밀번호일 터다.- 물론 시인의 비밀번호일 리는 만무하겠지만.
그 숫자의 실마리를 풀자고 인터넷 검색창에 '9201'을 넣어 보았다.
광역버스 노선번호, 청소기 복합기 등 각종 가전제품 모델번호, 문서번호 등 많았지만
화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얘들아, 집에 가자/ 이제 곧 폭설이 올 텐데" 첫 연을 보는데 자꾸 작년 가을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가 떠올려지는 것이었다.
그날이 언제였더라. 찾아보니 10월 29일, 거꾸로 쓰면 9201이다.
그래서 "내일의 약속을 취소하고/ 슬픔을 꾹꾹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 걸까.
내가 너무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 임종명 (전 한국일보 기자, 네이버 블로거 ‘숲속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