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66> 선조 14
-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표상, 홍의장군 곽재우와 조선의 의병장
조선은 사대부(士大夫)의 나라!
의무는 적고 (병역? 그런 거 난 몰라), 권리는 무한 (벼슬하여 백성 위에 군림하고, 땅 늘리고~)했습니다.
그 많은 것을 누리던 사대부들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는 대거 도망했고,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이들도
대부분 왜적의 모습만 보고는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대부의 명예를 지킨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격렬하게 싸운 의병장들 입니다.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고 열흘이 지난 뒤 경상도 의령에서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한 열혈남아입니다.
곽재우는 경남 의령에서 대대로 살아온 지방토호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의령 최고의 부호였으며
김종직 가문과 혼맥을 맺는 등 지방의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일찌기 34세때 진사과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정쟁만 일삼는 중앙 정계에 실망해 벼슬길에 나갈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곽재우는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전재산을 털어 청장년을 모집, 1592년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의령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왜적 보급로 상의 중요 지점이었는데,
곽재우는 게릴라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곽재우는 적의 보급 수송선단이 지나가는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두었다가 적선이 여기에 걸려 전복되는 사이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수송선단을 괴멸시키는 등 임진왜란의 방향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곽재우는 이벤트 능력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는 붉은 비단옷과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 붉은 옷을 입은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 부르면서
신출귀몰하게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홍의장군이라는 명칭이 유명해지자 여럿에게 자신과 같은 차림을 하게 하고는 여기저기에 나타나도록 하여
왜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거듭된 승리로 어느덧 홍의장군 곽재우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이름으로, 적들에게는 공포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곽재우의 혁혁한 공을 시기한 경상감사 김수와 관군들은 곽재우가 관군들이 도망가며 버렸던 빈 관청창고를 뒤져
무기와 군량을 확보한 일을 두고 도적으로 몰았고 이에 경상우병사 조대곤은 곽재우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곽재우는 도적떼의 괴수로 몰려 위기에 처했으나
마침 경상도 초유사였던 김성일
(일본출장 결과 허위보고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중앙정계에서 파직되어 고향인 경상도 초유사로 쫓겨갔음)이 진상을 조사,
곽재우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고 구명운동에 나서 구해주었습니다.
김성일이 없었다면 의로운 열혈남아 곽재우는 전란을 틈타 발호한
한낱 도적으로 치부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뻔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 외에도 과거에 장원급제한 전라도 선비 고경명과 김천일,
충청도의 대쪽같은 선비 조 헌, 경상도의 성리학자 김 면과 정인홍, 함경도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등 상당수가 있었으며,
1593년(선조 26) 정월에 명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26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의병이 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이정암은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8개 항목의 군율을 스스로 정했는데,
그 내용은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 (臨賊退敗者 斬),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 (民間作幣者 斬)”는 등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의병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능한 관군 대신 지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열세의 전력으로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웠으며,
임진왜란의 방향을 틀 정도로 큰 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으나, 대부분 마지막에는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이순신과 더불어 당시의 전통적 가치인 유교의 충효(忠孝)사상에 충실하고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이땅의 진정한 '보수'였습니다.
담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