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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석동호회 단톡방에서]
[채동석회장님제공]
🙆가슴 먹먹해지는 글
오늘 나는 학교 앞에서 김필수 아저씨를 봤다. 청진동 큰길가 에서다.
아저씨가 열살가량의 소년을 데리고 이발관으로 들어가신다. 이상하다.
그 애가 누굴까?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대구 아저씨가 웬 아이를 데리고 이발관으로 들어가셨어."
"그래? 너 잘못 본 게 아니냐?
그 친구에게 그런 아이가 없는데 이발관으로 들어갔어?"
"네."
"어, 그제 나하고 같이 머리 깎았는데?"
저녁에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저녁은 먹었나? 안 들었으면 먹어야지.."
"영선아, 금순 언니한테 아저씨 저녁 내 오라고 해라." 하신다.
사랑방 손님들은 모두 같은 시간에 저녁을 드신다.
그 시간에 안 드시는 분들은 나름대로 해결하셨다고 간주 하여 따로 상을 차리지 않는다.
그러나 대구 아저씨는 예외다. 언제나 아버지가 마음을 쓰신다.
"오늘 영선이가 자네를 봤데. 이발관으로 들어갔다고 하던데 ..."
아저씨는 말없이 저녁을 드시고 상을 물리신다.
"웬 아이를 데리고 이발관으로 들어가더라고 하던데.. 그런가?"
"응, 이발관에 갔었네."
"그 애가 누군가?"
"신문 파는 아이야. 머리가 너무 자라서 아주 거지 같더라고.. 깎아 주려고."
"자네 돈이 있어?"
"없지."
"그런데 어떻게 깎아 주었어?"
"머리를 내가 깎나? 이발사에게 맡겼지."
"뭐라고?"
"이발사에게 얘 머리 좀 깎아 주시오."
하고 빙긋 웃는다.
"머리를 깎기 시작을 해서 밖으로 나왔지..
담배 한 대를 물고..
이발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어. 이발이 끝나고 이마에 땀띠 분을 바르고... 이발사가 아이에게 저기 앉아 아버지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 하는 거야.
아이가 우리 아버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았어. 이발사가
그럼 누구냐? 하고 묻는 거야. 웬
아저씨가 너 머리 많이 자랐구나. 깎아야겠다. 하시며 데리고 왔다고 하는 거야.
이발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아이를 보더니 '그래 알았다. 가거라.' 하며 고맙게도 그냥 보내 주었어." 한다.
아버지는
"이발사가 된 사람이네. 착한 사람이야.
그러나 자네, 다시는 그러지 말게...
세상 사람이 다 자네 같지 않아요." 하신다.
그러나 아저씨는 가끔 비슷한 일을 하신다.
"오늘 두 아이에게 국밥을 먹였네."
동아일보사에서 석간으로 나오는 신문이 어린소년들 손에 들려 거리에 쏟아진다. "신문이요!" 신문을 겨드랑이에 끼고 헤진 신발을 신고 뛰어 다닌다.
그 보다 더 어려운 아이는 구두닦이 소년이다.
김필수 아저씨는 한 아이를 먼저 데리고 국밥집으로 들어 간다.
"여기 국밥 두 그릇이요." 하고 당신과 아이 것을 주문한다. 국밥 두 그릇이 나왔다.
아이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아저씨는 밖으로 나와 구두닦이 소년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남은 한 그릇을 먹게 하고 아저씨는 밖으로 나와 멀찌 감치 서서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국밥집에서도 이발관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아이들이 무사히 나왔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랑방 아저씨 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적선은 자기 분수대로 해야지 남을 속여 적선을 하면 됩니까?
나쁜 것 중에 남을 속이는 것이 제일 나쁜 짓이라고도 하신다.
김필수 아저씨는 묵묵히 앉아 듣기만 한다. 도둑질을 해서 먹이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니 그런 적선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시는 분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니야 옳은 방도는 아니지만 나무랄 일은 더 더군다나 아니야. 나는 감동을 받았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야 말로 없으면 말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아.." 하시며 아저씨의
편을 드셨다.
아저씨는 이런 말을 하신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여야 할 아이가 있는데 어쩝니까? 아이는 허기가 져 곧 쓰러질 것 같았어요.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있는거야. 정신이 오락가락 하나 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뛰려고 하는 거야. 눈은 퀭한데 빈 창자가 꺼진 배에 달라 붙었어. 한 줌이나 될라나?"
아저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신문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울음 섞인 말소리가
신문지 너머에서 들린다.
"나는 땡전 한 푼 없지요. 그런데
국밥집은 손님이 다 가고 나면 국밥이 그대로 남지 않겠어? 나는 그것 한 그릇을 훔쳤지만 저 사람들은 선행을 했으니 좋은 업을 쌓는 것이지요. 이발사도 그래요. 자기가 가진 기술로 돈이 없어 거지꼴을 하고 있는 아이 머리를 잘라준 것이 무슨 큰 손해를 본 것입니까?
그저 좋은 일 한번 한 것이지요. 그리 생각하면 마음도 편하지요..
그러나 제가 돈이 생기면 틀림없이 갚을 겁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행패를 할까봐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시비가 나면 내가 감당을 해야 하니까요."
"무엇으로 감당을 하시려고요? 돈도 없이.."
"그야 뺨을 때리면 뺨을 맞고, 옷을 달라면 옷을 벗어주고, 파출소엘 가자면 가야죠.
갈 겁니다. 그리고 돈이 생기면 갚고요." 한다.
이 분은 대구 분이다. 종교인 집안이다.
위로 형님이 계시고 아래에도 두 분 동생이 계시다. 바로 아래 동생은 김동환 신부님이고 막내동생은 김수환 추기경님 이시다.
아저씨는 돈이 생기자 먼저 국밥집을 찾아갔다. 종업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외상값을 갚았다. 그런데 종업원에게서 전갈을 받은 주인 내외가 쫓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절을하며
상석으로 모시더라는 것이다. 주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희는 식당을 하면서도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손님 덕분에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손님이 다녀가신 후 저희들도 어려운 사람을 돕자고 생각을 하면서도 실행을 못하고 있습니다.
손님께서 바쁜 시간을 비켜서 아이들을 보내주시면 배불리 먹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단체가 있고 종교인이 있다.
이 분들은 선행을 인도하고
가르친다. 많은 성금을 받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선행을 하는
사람들의 것을 받아서 생활한다.
그러나 아저씨는 선행하는 사람과 도움을 받을 사람을 연결해 줬을 뿐이다.
- 조영선의 '아버지 나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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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친구· 우정이야기 다시 읽어도 감동입니다
~닭도리 탕-
퇴근길이었다.
아까부터 서너 걸음 뒤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앞엔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
낯 익은 모습의 초라한 행색의 한 중년 여인이 있었다.
누구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 한 토막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바로 친구 형용이의 부인이다.
그래 20여년 전 결혼식하고 서울 근처에 신접 살림 냈다며 경기도 부천역 부근의 방 둘 짜리 300만원 전세집에서 친구들 불러 집들이했던 중학 동창 조형용의 부인이었다.
차린 건 많지 않았지만 정성이 묻어났고 우리는 그날 맥주와 소주를 벗삼아 옛 얘기하며 밤을 지새웠지.
그리고 그게 전부였나보다.
그 친구는 리비아의 아랍대수로 건설 공사 현장으로 떠났고, 무심한 우리들은 그 뒷 소식조차 챙겨보지 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왔다.
운좋게 아직 대기업 계열사에 부장으로 있는 난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부천 집들이에 갔던 벗들도 하나 둘 명퇴다, 정리해고다, 구조조정이다 하는 두어 차례의 칼바람을 벗어날 수 없었고 요즘은 아예 모임 자체가 형상화된 셈이다.
가끔씩 생각 나 홀로 포장마차에서 비우는 소주와 벗하는 추억으로만 곱씹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이름을 기억 못하는 내 머리에 너무 화가 났지만
"저... 혹시 형용이 부인... 아니시던가요?"란 말로 그녀에게 첫 말을 건넸다.
그녀는 어색하고 또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남편이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고 답한다.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급한 상황이 생겼다는 느낌에 함께 그곳에 가자고 했더니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남편은 중동에서 돌아와 그럭저럭 거기서 번 돈으로 지내왔는데 3년 전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반복하던 끝에 결국 다음주면 생을 마감할 거라는 병원의 통보를 받았다는 거다.
그러면 이승을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그녀는 내게 용건을 말한다.
아무도 없어 나를 찾아왔노라고.
중환자실 입원 이전까지 나온 병원비는 부천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어렵게 사는 친정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아 지불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는 거였다.
병원측은 당장 이삼일 내로 밀린 병원비 3천만원을 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내보내겠다는 거였다.
평생을 가족 위해 살아온 남편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눈물섞인 형용의 부인의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나라고 월급쟁이인데 뭔 대수가 있을까?
순간, 카톡을 통해 온라인상으로 자주 대화가 되는 벗들이 떠올랐다.
일단 형용의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함께 들어갔다.
거실에서 집사람과 옛 얘기 잠깐 시키고는 동창생의 마당발인 이시무라는 이름의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사정이 이런데 내가 좀 여유가 있으니 1천만원 마련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시무는 자기도 은행빚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정리되었고 보험 겸 저축상품 장기가입한 거 해지하면 5백만원은 모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친구들에게 사정을 전하겠다고 했다.
많은 동창들이 적게는 몇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시무 계좌로 보냈다.
형용은 3천만원 조금 넘게 돈이 모아지던 날 새벽 눈을 감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친구들에게 하늘에 가서라도 그 은혜 갚겠다는 말을 아내와 두 남매 앞에서 남기고.
우린 모두 벽제 장례식장에서 그를 한 줌 재로 보냈다.
돌아오는 길 진관사길 하늘은 잿빛이었다.
아니, 우리 모두의 가슴은 먹빛이었다.
차창도 울고 가로수도 울었다.
우리 모두가 울었다.
10여년 전의 일은 그렇게 우리들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져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형용의 부인은 서울 변두리에서 테이블 두 개짜리 조그마한 닭도리탕 집을 냈다.
처음엔 모든 게 서툴렀다.
설익은 감자를 내동댕이치며 육두문자로 시비거는 주정꾼들은 그래도 나은 손님이었다.
인근에 먼저 영업 하던 큰 식당 주인 부부가 와서 괜시리 욕하며 여자 혼자 남자 꼬시려고 하느냐며 비아냥거릴 땐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 모든 걸 딛고 섰다.
먼저 가장 신선한 채소와 가장 맛있는 고추가루를 확보했다.
그리고 김치며 밥을 손수 정성껏 만들었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 별도로 닭 두 마리를 따로 투자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그녀는 다른 곳에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닭도리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인근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그 맛과 정성이 명성을 만들었다.
'식객'을 쓴 허영만 선생이 찾아와서는 최고의 찬사와 함께 '조선반도 최고 닭도리탕' 이라 쓴 사인을 남겨줬다.
그렇게 해서 "조형용 닭도리탕"은 지금 월 매출만 1천만원이 넘을 정도로 단골이 늘었고, 상표등록까지 마친 서울 최고의 맛집이 되었다.
밴드를 통해 늘 만남을 실천해온 번개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조형용 닭도리탕"에 모여들었다.
동창 6백명 가운데 그 집 모르는 친구는 없었다.
멀리 천안에서, 강릉에서조차 가족들? 서울 행사를 그 집에서 했다.
괴산에서 프리 랜지로 들판에 풀어놓고 키우는 토종 자연 청정 양계업을 하는 또 다른 동창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영원히 최고의 닭을 생산원가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식사 때마다 대기하는 손님 줄이 2백미터 넘게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
형용의 아들은 가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자랐다.
바르게 자식 교육에 힘써온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은 한국의 국가대표 기업인 현대 자동차의 전략기획실에 입사,
글로벌 마케팅 아이디어로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초석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형용의 아내가 내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저도 형용씨 친구분들 밴드에 정식 멤버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는 없는가요?"
물론 예쓰다.
누구에게 물을 것도 없이 예쓰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시무에게도 전했다.
시무는 고지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를 이렇게 결속시켜준 형용이 가입하는 것보다 100배 더 반가운 일이라며 그녀를 밴드로 불렀다.
그녀는 밴드가입 인사를 이렇게 했다.
"세상에... 저는 수어지교니 문경지교니 하는 말들은 그냥 책에서나 있는 말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용씨가 친구들한테 잘 한 것도 없는데 어쩌면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 클 수 있는지 참으로 고마웠어요.
전 정말 기대하지도 못했어요.
제가 그 은혜 평생 갚아나가며 살 게요.
그리고 형용씨와 제가 만들어 키운 저희 큰 녀석이 지난달 좋은 아이디어로 마케팅 실적 높였다는 공로로 회사로부터 특별 인센티브 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 전액을 저도 회원이 된 이 밴드, 바로 우리 남편의 동창생 모임의 기금으로 기부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바로 우리 모두의 우정이었고, 우리 모두의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는 뜨거운 물줄기가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걸 그 밴드 글 읽으며 억제할 수 없었다.
친구의 이름으로 살아있는 그 닭도리탕집은 전 세계 어떤 식당보다도 가장 눈물깊은 사연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어떤 식당도 해내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벗들의 안방이 되었다.
오늘 봄볕이 무척 따사롭다.
이 저녁, 퇴근길이 무척이나 가볍다.
아니 기대가 가득하다.
분명, 굳이 밴드에 고지하지 않아도 늘 600명 가운데 10여 명은 그곳에서 감자와 닭다리를 뜯으며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웃고 떠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말이다.
사랑과 우정의 크기는 어느 게 더 클까?
그 부등호의 결말을 혼자 셈해보며 회사를 나선다.
오늘은 형용의 아내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오메기떡 한 봉지를 사가야겠다.
🐧친구라는 힘있는 우정과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감동적인 글이라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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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울림 ~
천년을 사는 "산속 나무"는"바람이 부는 쪽"에는 나무 "가지"가 없습니다.
나무는 "바람에 맞서면"부러 진다는걸" 압니다.
"바람부는 데로""가지"를 뻗어야"오래산다는걸""알고"있습니다.
"모난돌이 정 맞는다"고"평지에 튀어나온 돌"은 발길로 "걷어 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은"모난 돌처럼" 살면
"아파서" 주변에 친구가 없습니다.
조약돌처럼 서로 부딪혀도 아프지 않게" 살아가 는 "사람"이 되어야 겠지요.
그래서 "함께"라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함께라는말은"
참 다정"하고" 소중한 말" 입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하면" 행복해 집니다.
"양보하며"
한발자욱씩 다가서는 조화로움 으로,
함께하는 행복한 날들"이 되시길~^♡^
♡ 행복한 삶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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