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서 코가 새빨간 아가가 아장아장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낑'하고 안전 지대에 올라섰습니다. 이내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차장은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이 차장도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전차가 또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구나." 하고 이번 차장은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하고 갔습니다.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습니다.
작가 인터뷰
“원작 숨은뜻 그림으로 표현” 200자 원고지로 2장이나 될까. 그림책『엄마 마중』의 글인 이태준의 동화는 그렇게 짧다. 이 짧은 글이 아름다운 그림책이 된 것은 그림작가 김동성(34)의 상상력 덕분이다. 글이 말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그림 속에 풍성하게 숨겨 놨다. 추운 겨울날, 전차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가의 마음을 따뜻한 눈길로 표현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콧날을 시큰하게 한다.
“처음 원고를 받았을 때 글이 너무 짧아서 그림책으로 만들기가 참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 상황묘사가 없고 등장인물의 성격도 전혀 드러나지 않아서 그림작가로서는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많기도 하구요. 커다란 원석을 받아서 조각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당황스러운 한편 의욕도 느꼈죠.”
이태준의 원작은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우울하게 끝난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가 끝난 지점에 말없이 이어지는 세 장의 그림을 넣었다. 맨 마지막 장면에는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가의 뒷모습이 눈 오는 마을 풍경 속에 작고 포근하게 파묻혀 있다. “좀 더 긍정적인 미래를 담고 싶어서 환상이나마 엄마랑 만나는 장면을 넣었어요.
하지만 독자에게 ‘이게 정답이야’ 하고 강요하는 듯한 작위적 연출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파묻힌 듯 작게 그렸습니다. 추위 속에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의 표정에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무심하게 표현한 것도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그림책이 자아내는 긴 여운과 감동은 그림작가의 세심한 배려와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겠다. 많은 독자들이 이 그림책을 보고 ‘가슴이 찡하다’ 거나 ‘눈물이 핑 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더 깊이 생각했다. “단순히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나라 잃은 일제시대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시대의식과 비판정신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작가의 역할은 텍스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담으면서 작가의 숨은 의도까지 전하려고 애를 썼는데, 참 힘들었어요. 그림책 작업이 어려움을 새삼 실감했죠.”
그는 어린이책 출판사마다 함께 작업하고 싶어하는 인기 그림작가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으로 비로소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에 조심스레 한 발 내딛은 것 같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늘 긴장감을 갖고 자기발전을 위해 모험을 계속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김동성 한국일보/2004.12.18/오미환 기자
<엄마 마중>은 한국 현대소설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이태준이 1938년 발표한 동화다. 동화 애호가라면 한번씩은 접했을 정도로 제법 이름높은 이야기다. 동시에 가까울 정도로 짧고 간결한 글이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홀연 슬픔의 늪에 빠지게 하는 힘을 품고 있다. 잊혀진 옛 작가의 옛 동화지만, 다시 읽을수록 울림이 더 크게 번지는 묘한 매력도 변함이 없다. 발표 당시부터 아이는 물론 뭇 어른들의 옷섶까지 눈물로 적셨음직하다. 도서출판 ‘소년한길’이 이 동화를 새 책으로 냈다. 당연히 동화의 제목과 글은 그대로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삽화다.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동성이 담담한 채색수묵으로 20여점의 그림을 이태준의 동화에 덧댔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에서 삽화의 진정한 구실이 무엇인지를 웅변이라도 하는 듯, 간결한 이야기와 간소한 그림이 짝꿍을 이뤄 감동을 변주해 나간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무려 3점의 삽화를 이어붙이며, 말없는 감동을 글없이 쌓아가는 책의 마지막 대목은 압권이다.
동화의 배경인 30년대 서울 종로 거리는 요즘 아이들에겐 낯설 수밖에 없지만, 엄마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끝내 오지 않는 엄마와 그래도 고집스레 버티고 선 꼬마의 사연을 상상하는 서글픔도 시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태준은 남들이 계몽주의를 다툴 때 우리 정서에 천착한 아름다운 글을 골라내는데 힘을 쏟았고, 자칭 계몽주의자들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는 오히려 민족의 운명에 스스로를 던졌다. 역사보다는 삶을 사랑했음이 분명한 그는 한국전쟁 이후 월북했다가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때와 장소조차 분명치 않다. 근현대사를 반공 아니면 친북으로 구분지으려는 세태까지 더해, 오늘 그의 아름다운 동화는 더욱 가슴 시리다. 취학전, 이태준 글, 김동성 그림. 소년한길/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