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불을 끈 채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는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다. 석봉은 결국 내기에 져서 글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공부를 가르쳐주던 스승 곁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읜 석봉의 어머니는 고단한 살림살이 가운데도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떡 장사를 하여 글공부를 뒷바라지해주었다. 그러나 내기 이야기는 누군가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입하기 위해 지어낸 동화일 뿐이다. 누구든 어둠 속에서 붓글씨를 써서 숙달된 솜씨로 떡을 써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칼질이야 손끝의 감각만으로도 암흑 속에서 얼마든지 정확하게 해낼 수 있지만, 붓글씨는 아무리 숙련되었더라도 눈으로 보면서 정성을 다해 써야 할 예술분야이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재위 16년(1583) 윤2월 1일자에 처음 등장하는 석봉 한호(1543~1605)의 기록은 썩 바람직하지 못하다. 관리의 기강을 감찰하는 사헌부의 상소 내용이다.
<와서(瓦署. 기와와 벽돌 제작을 담당하는 관서) 별제(別提. 종6품으로 기술직 실무자 중 최고위직) 한호는 용심이 거칠고 비루한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 능력이 이서(吏胥. 종9품)와 같아 의관을 갖춘 사람이 그와 동렬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替直. 교체)하소서.>
아마도 겨우 진사시에 합격한 자가 오직 글씨 좀 잘 쓴다는 이유로 종6품 벼슬에 오른 사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선조는 체직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명필인 선조가 한호의 서체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종 22년(1567) 진사시에 급제한 한호는 사자원(寫字員. 글씨만 전문적으로 쓰는 종9품 관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그 빼어난 솜씨로 명성을 날렸다. 명나라 사신들은 왕희지체를 발전시킨 한호의 독창적인 ‘석봉체’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반드시 한두 점 사가곤 했다.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도 모두 ‘석봉체’ 글씨를 몇 점씩 사갔다. 한호의 글씨는 명나라 고관대작들도 매우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뇌물용으로 고가에 사가곤 했던 것이다.
한호는 사신단의 사자관(寫字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종6품 관원)으로 몇 차례 명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외교문서에서 그의 글씨를 보고 홀딱 반한 명나라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갈 때마다 상당한 글씨를 남기고 돌아왔다. 때문에 명나라에서도 그의 글씨가 높이 평가되며 소장을 원하는 자가 많았던 것이다. 이수광은 광해왕 6년(1614)에 지은 「지봉유설」에서 ‘한호가 북경의 어느 중국인 집에 유숙할 때 이백의 시 한 편을 벽지 위에 써준 적이 있었다. 24년이 지난 뒤 내가 마침 그 집에서 유숙한 적이 있는데, 글씨의 기운이 새것과 같았다. 중국인이 글씨의 가치를 알아보고 매우 소중하게 보존했기 때문이었다.’고 써놓았다.

명나라 최고의 문학가인 왕세정도 한호의 글씨를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라고 호평했다. 영의정 이항복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선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일은 다 마음에서 이뤄지는데, 왕세정의 병통은 진실하지 못한 데가 있다. 한호는 현판에 쓰는 큰 글씨는 잘 쓰지만, 초서와 예서는 그의 특장이 아니다. 왕세정이 그렇게 말했다면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선조의 비판과 달리 한호는 초서와 예서에도 매우 능했다. 심지어 명나라 재상들은 조선에서 외교문서를 보낼 때 한호에게 맡겨 ‘석봉체’로 써달라고 요구하는 자도 있었다. 선조가 왜 한호는 물론 명나라의 왕세정까지 싸잡아 폄하하고 비난했는지,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한호를 가평군수에 제수했다. 중앙관서의 여러 관료들 틈에서 시기받고 시달리느니 산수 좋은 곳에서 조용히 글씨 공부나 하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가평에서도 한호는 평판이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호가 수령으로서 직무를 태만히 하여 고통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며, 사헌부에서 그를 파직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선조는 자세히 조사해보라고만 명하고 그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선조실록』 재위 37년(1604) 3월 15일자 기록에도 선조가 한호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대마도주로부터 편액을 하나 선사해달라는 요청이 오자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에서 한호에게 편액을 쓰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는 건의가 올라왔다. 이때 한호는 강원도 흡곡현(현재 북한)의 현령으로 나가 있었다. 이에 대한 선조의 비답은 매우 냉혹하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한양의 아무 선비에게나 맡겨서 써 보내라.”
선조는 명나라에 중요한 외교문서를 보낼 때만 한호를 불러올려 그에게 작성을 맡겼다. 왜놈들의 침략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전국이 초토화된 지 불과 6년, 상굿도 경복궁조차 복구하지 못해 치를 떨고 있는 판에 편액을 요청한 대마도주도 참으로 아베 신조 총리만큼이나 염치없는 인간이다.
그 직후 선조는 임진왜란에 공이 많은 관리들을 가려 각각 호종공신(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한 관리) 및 선무공신(전공을 세운 관리)에 책봉하고, 한호를 불러 그들에게 내릴 공신첩을 쓰도록 명했다. 이때 한호가 공신첩 작성을 싫어하여 차일피일 미루거나 일부러 글씨를 비뚤게 썼다며, 사헌부에서 그를 파직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선조의 비답은 여전했다.
“한호가 글씨를 쓰기 싫어하거나 일부러 비뚤게 썼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한호 혼자서도 하루면 충분히 다 쓸 수 있는 양인데 왜 태만히 했겠는가?”

얼마 후 공신이 소지하고 다니는 녹권(공신증)을 쓸 때도 한호가 동원되었고, 이때도 여지없이 그를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선조는 그를 흡곡현령에서 파직했다. 그러나 녹권을 쓰느라 수고했다며 한호에게 조랑말 한 필을 내림으로써 여전히 그를 아끼고 있음을 알렸다. 조랑말은 하급 관리에게 하사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석봉 한호는 63세에 눈을 감았다.
첫댓글 한석봉은 글씨는 천하명필인데 어머니와 떡을 써는 내기외에는 알려줘 있지만 그 외에는
알려진 것은 없는데 이 글을 읽어보니 정치하는 것이 무책임한 인물이네
한석봉의 글을 눈으로 보는 것은
오늘로 처음일세.
역시 잘 쓴 글로 보이네.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