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비
우리 고향마을 입구에는 드넓은 비상활주로가 있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가을걷이한 벼를 이곳 활주로에 넓게 널어 말린다.
잘 말린 그 벼를 모으고 담아서 집안의 창고 안에 들여놔야 가을걷이가 비로소 끝이 난다.
어느 구름 낀 가을날이었다. 다니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야야! 현수야! 비가 몰아올라고 헝께 빨리 나락 담으러 활주로로 와라!”
그렇게 말하고는 무작정 전화를 끊어버리신다.
이따금 가을날이면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부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무조건 응해야 했다.
몸이 불편한 80이 가까워 오는 아버지가 일손 놓지 않고 고된 농사일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가을철 벼를 말리는 중에 몰아오는 비에 벼가 젖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농사철이면 우리 형제들은 각자 다니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농사일 돕기가 쉽지 않아 일손이 많이 딸린다.
모내기나 다른 일은 비가 오더라도 그리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벼를 말리고 있다가
비가 내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제때 담지 않으면 큰비에 벼가 떠내려 갈수도 있었고
또 벼가 비에 젖어 썩거나 싹이라도 나면 어렵게 지어놓은
한해 농사를 아주 다 망치고 마는 것이다.
2남 2녀인 우리 형제는 다들 출가를 했기 때문에 부모님까지 합하면
성인으로 구성된 십 명의 비상인력이 되는 셈이다.
벼를 말리고 있다가 비가 내릴 것 같으면 아버지는 자식들 모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다급한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위급할 때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자식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하던 일을 제쳐두고 바쁜 마음으로 급히 시골로 향하고 있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아버지셨다.
“얀~마!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왜 빨리 안 오냐!”
다급하게 외치고는 또 전화를 끊어버리신다.
자동차 가속 페달을 밟으며 부랴부랴 벼가 널어져 있는 비상 활주로에 도착해보니
벌써 형수님과 여동생 등 식구들이 모두 모여 부지런히 벼를 담고 있었다.
비가 몰려오는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컴컴해지고
한 방울 두 방울 벌써부터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집사람과 둘이서 부리나케 포대에 나락을 담았다.
모으고 담고 쓸고 정신없이 일을 했다. 이러다가 갑자기 비가 몰아치면 큰일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벼를 절반도 담지 못했는데 비가 한꺼번에 주룩주룩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벼를 쓸어 담던 아버지가 문득 일하는 손을 놓고
비 내리는 하늘을 넋이 나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틀 동안이나 볕에 말린 탐스러운 벼에서는 그새 물이 고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와서 벼를 담았더라면.......’
망연자실한 표정의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만에 평상심을 되찾은 비에 온통 젖은 아버지가
‘앞으로 삼일동안은 날씨가 좋아야 싹이 안날 텐데.......’
하면서 물에 젖은 벼를 손으로 한주먹 쥐어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신다.
다행히도 다음날은 가을볕이 따갑게 쏟아 내렸다.
비에 젖은 벼를 다시 잘 널어 말리면 되었다.
며칠 뒤 우리는 또 다시모여 갑자기 쏟아지던 비를
원망하며 가을걷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모내기를 마친 음력 오월 어느 날 논에 물고를 보고 오신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아버지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그 길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출상을 하루 앞둔
그날 비가 왜 그렇게 많이도 내리던지.......,
하루 사백미리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를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 많은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여 명이 넘는 문상객들이 다녀갔다.
내가 소속 되어있는 산악회회원들도 비를 흠뻑 맞은 채 문상을 다녀갔다.
불시에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의 깊은 슬픔을 함께 나누어 줄줄 아는
좋은 인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많은 비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출상하는 날, 정작 아버지가 가시는 그날에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문상 온 사람들이 날씨가 궂으면 큰일이라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들 놀라는 눈치들이었다.
가난한 촌부의 오남매 막내로 태어나 열아홉에 고아아닌 고아가 되어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삶이 서러워서 가시기 전날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시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살아생전 지금은 서울대학교 3학년에 다니는 조카의 합격을 그토록 고대 하셨는데........
’ 마음속으로 소원해 하던 그 좋은 소식도 못 듣고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지금도 비가 온 다음날 날씨 좋은 날엔 인자하시고 자상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본다.
한국 교육개발원 제33회 학예경연대회 입상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