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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__시의공간 : 충남 대구
시가 들끓는 도시, 대구
권순진
“대구는 나에게 대통령을 뽑은 무서운 도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 그리고 폭염의 도시로 달려들었다. 이성복, 이하석, 이태수, 장정일, 구광본, 그리고 김춘수, 한때의 이문열…” 1988년 8월 기형도는 「짧은 여행의 기록」이란 제목으로 노트의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구는 시인들로 들끓고 있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촘촘하고 풍성하게 우글거린다. 이곳 시의 지형도에는 몇 개의 우뚝한 봉우리가 있고 그 형성의 등고선마다 한국시의 중심을 떠받히는 시인들로 빼곡하다.
1920년대의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시인으로부터 1930년대 이설주, 이윤수, 훗날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1940년대의 박목월, 조지훈, 1950년대에는 『竹筍』이 발굴한 김춘수, 신동집을 비롯해 김종길, 허만하 등이 있다. 한편 1948년 김소운 이윤수 백기만 등이 주도해 달성공원에 세워진 상화 시비 <나의 침실로>는 국내 최초의 시비로 알려져 있다. 이윤수 시인은 1950년 대한민국 최초의 시 전문지 『竹筍』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국 문인들의 거점 무대였다는 점 등이 대구를 ‘시의 도시’라 일컫는 또 다른 근거이며 까닭이리라. 그 흔적은 지금도 향촌동과 그 근방에 짙게 남아있으며, 그 중심에 <대구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기형도가 미처 언급하지 않았던 시인 몇을 등단연도 구분 없이 우선 ‘출향시인’부터 들추자면 박목월, 조지훈 그리고 김종길, 허만하 등 일찌감치 서울 등지에서 터를 잡아 문단의 핵심적인 위치에 올랐던 시인이 여럿이고, 70년대 이후로 정호승, 김재진, 김수복, 오정국, 박덕규, 안도현 등이 있다. 안도현은 「태동기, 그리고 시인 도광의 선생님」이란 글에서 70년대 후반 대건고 문예반 ‘태동기문학동인회’와 은사인 도광의 시인을 이렇게 추억한다.
“내가 밤새워 고치고 또 고친 시를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쭉쭉 그을 때마다 생살이 베어지는 것 같은 지독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스무 줄짜리의 시가 열 줄도 채 남지 못하고 앙상하게 뼈만 남는가 하면, 선생님의 볼펜 끝에서 아예 자신의 숨소리를 놓아버리는 시들도 생겨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의 비참함이 없었다면 ‘언어’를 함부로 남발하거나 혹사시키는 언어의 난봉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언어를 절제하는 능력이 손톱만큼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
안도현의 스승인 도광의 시인은 등단 이후 50여 년 동안 『갑골길』, 『그리운 남풍』, 『하양의 강물』 단 세 권의 시집을 내었을 뿐인 과작 시인이다. 하지만 지금도 시 앞에서는 긴장을 늦추는 법이 없으며 시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시인에겐 늘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란 수식이 따라 붙었다. 가족처럼 여기던 반려견 ‘우슬’이 죽자 그의 주검을 평소 함께 산책했던 뒷동산에 묻었다. 몇 삽 대충 파서 묻은 게 아니라 산주를 불러 거금 50만원을 치룬 뒤 정중하게 장례를 치룬 것이다. 그리고 그 ‘우슬’에게 바치는 송시를 무려 여섯 편이나 남겼다.
196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대표적인 문단 원로로 권기호 시인이 있다. 권기호 시인은 김춘수 시인의 직계 제자로서 경북대학교에서 문리대학장을 지냈다. 공식적으로는 1970년에 5백 부를 찍은 『서쪽의 풍경』이 작품집의 전부지만, 그렇다고 작품 활동에 소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작품에 새로움이 없다면 구태여 시집을 낼 필요가 없다는 평소의 소신 때문에 시집 한 권을 묶고도 조바심 없이 태연자적하다. 오래 전 계간 『대구문학』의 편집 일을 볼 때다. 인터넷 메일이 아닌 육필 원고를 받았는데, 그 후 두 차례나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4층 사무실로 직접 와서 퇴고한 원고를 다시 건네받은 일이 있다. 이름이 좀 알려진 시인들은 기관지 성격의 지역잡지에 원고를 주는 일조차 인색한 경향이 있지만 시인은 어떤 잡지든 청탁받은 원고에 대해서는 성심과 전력으로 최선을 다한다. 퇴고를 거듭하는 그 모습이 마치 ‘산정’을 향한 ‘알피니스트’를 연상케 했다.
「詩法」이란 제목의 시다.
그 산정은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일이 없다/ 노련한 알피니스트들도/ 그 발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올 뿐이다.// 그 미립자의 얼굴은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죽은 나의 발톱에서나/ 뛰는 심장에 이르기까지/ 움직이고 있는 그 무엇이란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우주의 벽은/ 어디쯤에서 닿을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보내고 있는 가장 강한 전파로도/ 다만 은하계와 은하계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만/ 추측할 뿐이다.
1970년대 등단 시인들로 인해 대구가 한국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그 지분을 크게 늘렸다. 이하석, 이태수를 필두로 이성복, 이동순, 이기철, 송재학, 엄원태 등이 전국 무대에서 대구 시의 자존감을 높였고 이정우, 이진흥, 박정남, 구석본, 서종택, 강현국, 송진환, 이구락, 이상규 등이 가세했다. 그중에서도 이태수, 이하석 시인은 지역의 양대 신문사(<매일신문>과 <영남일보>)에서 각각 논설주간과 논설실장을 역임하면서 지역 문학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지역 문단의 좌장 격인 이하석 시인은 특히 진보진영 문인들에겐 대부와 같은 존재이다. 이태수 시인은 ‘문학과지성사’에서만 10권의 시집을 낼 정도의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많은 문인들에게 선망이 되어 왔으며 대구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그의 족적은 매우 크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풍성해지기 시작한 대구 시단은 90년대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지금 “시의 도시 대구”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시인만 800명에 육박하는 도시가 된 데에는 중·고등시절부터 활발히 문예활동을 해왔던 학생문사들의 역할도 컸다. 격동의 1980년대에는 신군부에 의해 문단의 대표적인 두 계간지 ‘창비’와 ‘문지’가 돌연 폐간되고 새로운 정기간행물의 창간이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경직된 사회 분위기는 한편으로 시 동인의 결성을 재촉했고 부정기 간행물인 동인지도 여럿 나왔다.
이기철, 이하석, 이태수, 이동순, 박해수 등을 축으로 하는 『자유시』박재열, 구석본, 문인수, 이진흥, 이구락 등이 함께 했던 『형상』 송재학, 장옥관, 김재진, 엄원태 등이 주축이 되고 박진형, 손진은, 노태맹 등이 가담한 『오늘의 시』 김용락, 배창환, 김윤현, 정대호, 김종인 등과 충청지역의 도종환, 김창규 등이 함께 한 『분단시대』 서지월, 김세웅, 김상환, 이상규 등을 축으로 한 『낭만시』 김선굉, 서정윤, 하청호, 박곤걸, 김주완 등으로 구성된 『자연시』 박기영, 장정일, 안도현, 박상봉, 권태현 등이 활동한 『국시』 등이 동인지 전성시대를 열어나갔다.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이성복 시인은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발간함으로써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핵심적 위치에 올랐다. 가히 혁명적이라할 만큼 과감한 시 문법의 파괴와 번뜩이는 비유로 평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니체적이며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이후 사상의 일대전환이 일어났다. 소월과 만해,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작품의 성향도 초기의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적 형이상적 향기가 물씬 풍겼다.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이후 10년 만인 2013년 시집 『래여애반다라』를 내면서 시인 자신은 교직과 함께 일단 시인으로도 ‘명퇴’한 셈이라고 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전해들은 풍문으로 어쩌면 올 상반기 안에 서울로 주거를 옮긴다는데 새로운 환경에서의 변화된 모습 또한 기대가 된다.
80년대 등단하여 활동한 시인 가운데 역시 가장 도드라진 성과를 낸 경우는 문인수 시인이라 하겠다. 당시 문단 분위기에서는 마흔의 나이가 적지 않은데 늦깎이 등단하여, 그만큼 치열하게 자신만의 세계와 언어를 조탁해낸 시인도 드물 것이다. “자신의 시 속에서 한국적 서정을 줄곧 추구해 왔고, 서정시의 원형이라 할 만한 미적 성취를 세상에 지속적으로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생략이나 함축의 원리에 의한 단형 시편을 기반으로 하면서, 절제된 풍경 묘사와 내면에 가라앉은 비애의 형상화에 주력했다”(유성호 평론가)
시력 삼십여 년 동안 십여 권의 시집을 내면서 시인의 시적 성취는 눈부셨고 그에 따른 보상도 컸다.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목월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이 시인에게 주어졌다. “문인수의 시는 야생의 시다. 문인수의 시는 온갖 정성 기울여 가꾸는 화분 안의 화초가 아니다. 저 넓은 들판 어디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피어나는 야생화다. 세상의 어떤 문학교과서에서도 볼 수 없는 감각과 표현이 그의 시에선 늘 타닥거리고 꿈틀댄다. 시인은 번듯한 시 수업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다. 그래서 시인은 여태 길들지 않을 수 있었다. 삶의, 아니 시의 아이러니다”라고 미당문학상 주관사인 <중앙일보> 기사는 적고 있다.
문인 수의 많고 많은 작품 가운데 좀 이색적인 시 한편을 옮긴다. 「장엄송」이란 제목만 보면 무슨 소나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레퀴엠의 묵직한 음악 이야기인 것도 같다.
세 사내는 친하다. 작당이 아니라, 타국에서 만난 모국어처럼/ 어떤 질곡을 빠져나온 합수처럼 친하다. 1955년생,/ 동갑내기에 똑같이 삼형제 중 장남이다. 세 사내는/ ‘오늘의 시’ 동인이다. 어두운 표정이 똑같다./ 나고 자란 이야기가 애솔 같아서 科, 目이 같은 침엽의 그늘이 전신에 예민한 것 같다. 나는/ 세 사내의 성명 첫 글자를 따 ‘장엄송’이라 부른다. 셋 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아버지를 꼭 빼닮았단 소릴 들으며 자라서일까, 예감처럼 전이처럼 그리움처럼/ 아버지를 앗아간 병마가 수도 없이 마음속 문맥을 다녀갔다. 오래 전/ 아버지 나이를 마침내 간신히 넘겼다. 사실, 넘기지 못했다. 수시로, 거울 앞에 선 듯 왈칵/ 받아 입었다 벗었다 한 아버지…, 세 사내는 일견 힘껏, 번듯하게/ 잘 산다. 아이들을 낳아 행복하게 안아 올리곤 하였지만/ 그럴 때 마다 또 한 새끼 덥석 안겨들던/ 제 어린 시절이 남몰래, 가족들도 몰래 따로 딸린 애물단지 같았다. 인생은 과연 단벌일까,/ 세 사내는 쉿!/ 죽음에 대해 평소 구면인 듯한 말투다. 전력처럼,/ 혹은 마중이라도 나갈 것처럼 죽음을 말하곤 한다. 공것인 양, 덤이라도 얻은 양 서둘러 노년을 시작하려는 눈치다. 세 사내는 자주,/ 근처 금호강 본다. 여기까지 여러 굽이/ 자필로 적어내려 가다보면 어머니! 세 사내의 저 목 깊은 소리,/ 묵음의 저녁노을을 나는 ‘장엄송’이라 부른다.
2012년에 나온 문인수 시집 『적막소리』에 포함된 작품이지만, 2005년 『서정시학』 여름호에 발표했던 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넘은 시다. ‘세 사내’는 각자의 성을 따다 붙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장옥관, 엄원태, 송재학 시인이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대구 시단의 긍지이고 대표 시인들로서 동류항에 자주 묶인다. 이때 가나다순으로 하면 송재학, 엄원태, 장옥관이 되고 등단 순으로 쳐도 그렇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순서를 바꾸어도 그들은 불만이 없다. 시에서도 짐작하듯이 그들은 오랫동안 도반이고 ‘절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빼고 대구 문단의 현주소를 말할 수는 없다.
70년대에 등단한 송재학, 엄원태 시인과 달리, 장옥관 시인은 1987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정식 데뷔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76년 신춘문예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응모를 했다. 그러나 투고한 두 신문사 모두 최종심에 올랐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영남일보는 동네친구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김재진 시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김재진은 원래 첼로를 전공한 첼리스트였다. 하지만 고2가 되어서야 뒤늦게 음악을 시작한 관계로 불투명한 장래에 회의를 가졌고, 그 돌파구로 문학을 선택했던 것인데 시가 새로운 활력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장옥관의 입장에서는 낙담이 매우 컸으리라 짐작된다. 시를 작파하고 외면하면서 직장생활에 충실했지만 시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한동안 사진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시에 대한 갈증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10년의 유예기간은 다소 길었지만 그는 결국 시인의 자리를 되찾는다.
한편 대구의 여성 시인들에게 시선을 돌려보면 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시인이라야 박정남, 조행자(작고) 정도였으나, 80년대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적으로 풍성해졌을 뿐만 아니라 중앙문단의 주목을 받는 여성 시인들도 부쩍 늘었다. 2010년 지역의 <만인사>가 대구 여성시인들 20명을 선정해 대표작 5편씩을 엮어 펴낸 『대구 여성시 20인 선집』에는 강문숙, 강해림, 고희림, 권운지, 김기연, 김현옥, 류인서, 박미영, 박소유, 박이화, 박정남, 박지영, 백미혜, 서영처, 송종규, 이규리, 정숙, 정유정, 조행자, 황명자 시인이 이름을 올렸다. 물론 이 선정은 완벽한 객관적인 계량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발간 시점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을 포함하여 그 수를 조금 더 늘리자면 정하해, 황영숙, 장혜랑, 장혜승, 이자규, 김복연, 박주영, 임경림, 이향, 김위숙, 유가형, 이해리, 서하, 박숙이, 사윤수, 이인주, 정이랑, 노현수, 안윤하, 문차숙, 정화진, 박경조, 천영애, 김은령, 윤은희, 윤이산 등의 이름을 추가로 올릴 수 있겠으며, 천수호, 김명리, 최정란, 문성해 등도 대구 출신이거나 대구를 거쳐 간 시인이었다. 이런 형식의 기획이 아쉽고 안타까운 점은 한 시인에 대해 집중 조명할 수도, 작품을 파고들기도 여러 사정상 애매하기 때문에 다만 일괄 거명하는데 그쳐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2000년 이후에 등단한 여성시인 가운데 딱 한 명만 들자면 류인서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데, 등단 이후 꾸준히 그 평가와 성과가 돋보이는 여성 시인이다. 류인서는 2001년 『시와시학』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 2005) 『여우』(문학동네, 2009) 『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 등 세 권의 시집을 냈고, 그 추세로 보아 올해 네 번째 시집을 발간할지도 모르겠다. “임계점을 향해 류인서는 전진한다. 고요를 다스리고, 침묵으로 세계를 조종하고, 도래할 파열의 순간을 기다리는 어떤 짐승의 검은 눈빛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류인서의 힘이다.” 신호대기를 낸 문학과지성사의 서평이다.
대구 시단의 공간적 지형을 넓혀주는 또 다른 자산이 지역에서 출판하는 문예지들이다. 문학 시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여건 아래서 지역의 문예지 발간은 실로 간단치 않은 일이다. 현재 대구에서는 1992년에 창간한 시 전문 계간지 『시와 반시』 1994년에 창간한 종합문예지 『사람의 문학』 한국문협대구지회의 기관지인 격월간 『대구문학』 그리고 2007년에 창간한 계간 종합문예지 『文章』 2010년에 창간된 종합문예지 『영남문학』 지난해 창간한 시 전문 계간지 『시인시대』가 있으며, 시 문학 운동 목적으로 2013년 창간한 계간 『시와시와』 등이 있다. 이들 잡지들은 각자 뚜렷한 성격과 지향을 보이고 있다. 『시와반시』는 창간호에서 “엄정한 눈, 깨어있는 의식, 열린 마음”을 지향한다면서 창간사에서 “서울이 아닌 이 지역에서 창간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되기를 바란다”고 말문을 열었다. 『시와시와』는 순수 문학운동 잡지로써 “시와 함께, 사람과 함께”란 슬로건으로 재수록 중심이긴 하지만 매회 2,500부를 발행하여 그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건재는 지역 시인들을 고무하며 지역 문학을 활성화시켜 나가는데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다. 『시와 반시』는 올 여름호로 통권 100호를 맞는다.
전국적인 현상이겠으나 대구 시단 역시 1990년대 이후 시인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다. 그만큼 다양한 목소리와 뚜렷한 개성을 가진 시인도 탄생하였다. ‘시의 도시’라는 말에 걸맞은 시의 열기가 날로 더해가는 느낌이다. 앞서 이 원고에 대한 아쉬움을 벌충하기 위하여 1980년대 이후 등단한 시인 가운데 한 번도 언급이 안 된 대구의 유력시인들 이름 몇몇을 마지막으로 거명하면서 자료를 정리하고자 한다.
‘홀로서기’열풍으로 80년대를 풍미했던 서정윤, 문학의 전 장르를 넘나들며 최근 아동문학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 박방희, 체험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 사유가 돋보이는 김연대, 출향 시인으로 「大邱」연작시로 잘 알려진 상희구, 『불교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한 서대현 등이 80년대 시인이며, 90년대에는 『시로 그린 인물화』 인물시집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허홍구, 외과 전문의이며 대구시협회장을 지낸 바 있는 박영호, 사업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서도 단단히 시를 벼리고 있는 정훈, 정년 이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박상옥, 황인동, 진로상담 전문가로 더 유명한 윤일현, 시와 문학평론을 겸하고 있는 이진엽, 올해 동시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동원, 시 창작수업을 통해 많은 제자를 길러낸 장하빈, 시집 『고물장수』로 잘 알려진 김창제, 『시와반시』로 등단한 류경무 등이 있으며,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시인들은 최근의 김수상 시인 등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들 가운데 장차 빼어난 성취를 이룰 시인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최근 정치에서도 ‘지방 분권’이 화두가 되고 있지만, 한 나라의 문학 역시 마찬가지로 빛을 발하려면 우선 지방의 문학이 번성해야 한다. 서로 환경이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지방 문학의 특성과 개성이 모이고 어우러져 한 나라의 문학을 꽃피운다. 지방에서 형성된 문학의 특성이나 질적인 수준이 바로 그 나라 문학의 수준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대구지역의 문학이 가볍게 여겨질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한국 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라는 시의 공간은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지금도 시가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 데는 무언지 확실히 짚어내지는 못하겠으나 분명 어떤 에너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권순진 / 2002년 『문학시대』로 등단했으며 시집 『낙법』, 시해설서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1』가 있다. 현재 계간 『시와시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