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벽구멍 속으로'라는 소설이 입선을 했다. 얼마 후 시상식장에 나타난 수상자를 보고 심사위원들은 깜짝 놀란다. 교복을 입은 서울고등학교 2학년생이 나온 것이다. 그 때서야 당선자가 고등학생이라는 걸 안 신문사는 궁여지책으로 이름만 신문에 내고작품은 내지 않았다. 고등학생 이름은 최인호였다.
소설 '상도'라는 대형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 최인호(57)는 한국문학을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코드' 중 하나다. 그의 문학 없이는 70년대 '청년문화'를 논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은 늘 당대 젊은이 사이에 필독서였다.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겨울나그네' '깊고 푸른밤' 등 지금도몇몇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화 원작이 최인호 소설이었다.
작가로서 누구와도 다른 매력있는 문학세계를 구축해온 최인호도 이제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논객이 됐다. 그의 문학과 삶을 탐구해 본다.
-'상도'를 쓰기 시작한 직후 IMF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작품에 어떤영향을 미쳤는지.
*작품 창작에 커다란 동기를 제공해 줬다. IMF 위기는 도(道)가 없어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료를 통해 만난 거상 임상옥의 면모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IMF 경제위기는 반도체 수출부진이나 유가 상승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도덕 때문에 온 것이다. IMF 위기는 나에게 소설 '상도'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줬다.
-상인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같은데.
* 임상옥은 장사를 통해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실천한 사람이다. 어쩌면 현대사회를 가장 적합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계층이 바로 기업가들이다. 그래서 결심했고 쓰게 됐다.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상인이 아니다. 경제는 바로 사람의 일이다.
임상옥은 또 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탐하지 않은 도인이었다. 홍경래가 쿠데타를 일으켜 손을 잡자고 했을 때도 그는 거절했다.솥을 받치고 있는 세 다리처럼 인간에게는 명예 권력 재물 등 세 가지욕망이 있는데 그 것을 다 가지려 하면 다리는 없어지고 솥만 쓰러진다는 노자의 말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상인이기 전에 욕망의 한계를 아는도인이었다.
-상도가 얼마나 팔렸는지 그리고 근황은 어떤지.
* 전부 250만권을 넘었다. 20억원 정도 벌었다. 임상옥이 그랬듯 나는돈을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작가로서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이다.
강연과 인터뷰 등으로 사실 정신없이 지낸다. 그래도 매일 청계산에오르는 게 큰 즐거움이다. 산에 가면 무기력증을 이겨낼 수 있어 좋다.
-드라마 '상도'에 대해 평을 내린다면.
* 생각했던 것보다 원작에 충실하고 있고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드라마는 원작을 그대로 재현할 필요는 없다. 필요에 따라 드라마적인요소를 가미하는 것은 제작진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한이다.
어차피 훌륭한 한 상인을 통해 상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길을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소설로 50부작 드라마를 만든 제작진의 전문성과 상상력에 감사하고 싶다.
-'상도' 작가로서 기업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언젠가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정승처럼 벌어야 정승처럼 쓴다'는말을 기업인들에게 해주고 싶다. 기업인들은 탁월한 예술가가 돼야 한다. 창조적인 감각으로 미래형 기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위기대처 능력을 강조하고 싶다. 김우중 대우 회장은 바로 위기대처에서 실패했다. 하지만 임상옥은 위기를 돌파했다.
중국 상인들이 조선인삼 불매운동을 하자 임상옥은 인삼을 불질러 버렸다. 중국 상인들은 기겁을 했고 임상옥에게 무릎을 꿇었다.
-한국 사회를 성숙한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 맞다. 조금 과격한 비유지만 간디는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원칙없는 정치, 인간성을 잃은 과학, 양심을 잃은쾌락, 도덕없는 경제, 희생없는 종교다. 가만히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자.
문제가 보일 것이다. 정치는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과학은 하루가 멀다하고 신의 섭리를 어기는 신약ㆍ신기술을 발표한다.
쾌락은 온사회의 도덕을 무너뜨리고 있고, '무슨 무슨 게이트'니 해서경제는 혼란스럽다. 일부 종교인의 원칙을 벗어난 행동도 눈에 띈다. 우리 모두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 다양성이라는 미명 아래 용납해서는 안될 것까지 용납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그 동안 상도가 아닌 상술(商術)이 지배했다. 성숙해지기위해서는 먼저 분배의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돈을 벌 궁리를 한 만큼 돈을 분배할 궁리도 해야 한다.
임상옥은 이미 200년 전에 분배를 실현한 인물이다. 사회가 존재해야새롭게 돈을 벌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가 붕괴한 다음에 돈이 있으면뭐 하겠는가.
-친하게 지내는 기업인들이 있는지.
* 주변에 기업인이 많다. 우선 최정호 세계기업경영개발원 원장이 형이다. 형은 젊은 시절 산업은행에서 일했고 대우가 동유럽에 진출할 당시 폴란드 대우법인 사장으로 일했다. 형도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소설 '겨울나그네' 제목을 지은 것도 형이다.
정준명 삼성전자 일본본사 사장과 윤윤수 휠라코리아 사장이 서울고동기고 친한 친구다. 이수억 아더앤더슨 대표와도 친하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하고는 10년 전쯤 만나 친해졌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 미친 듯이 일만 하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의 열정을 보면서 매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 소설 '잃어버린 왕국'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작업을 도와준 분도 김 전회장이었다.
-최근 어떤 강연에서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관심을 피력했는데 소설로 쓸 생각인지.
* 언젠가는 쓸 것이다. 장보고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당시 보기 드물게 경제적 감각을 갖춘 인간이었고 세계화를 실천한 세계인이었다.
장보고는 서기 9세기 무렵 동아시아 무역지도를 바꾼 인물이다. 오죽했으면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라이샤워가 장보고를 '상업제국의 왕자'라고 했겠는가. 장보고에 대한 자료를 꾸준히 찾고 있다.
-곧 새로운 장편이 나올 예정이라던데.
* 중ㆍ단편집을 모은 5권짜리 전집이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오고 2년전 써놓았던 장편소설 '영혼의 새벽'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다.
6ㆍ25전쟁 때 공산주의자들이 외국인 성직자들에게 강요한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한 시각장애인 수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오랜 숙제인 이념과 인간, 남북 갈등, 독재 등 문제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데 종교가 창작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하다.
* 80년대 후반 가톨릭 신자가 됐다. 종교를 갖기 전 내 작품과 종교를믿기 시작한 다음 작품은 많이 다를 것이다. 종교를 믿기 전에는 좋은작품을 쓰려는 생각만 했지만 지금은 좋은 작품보다 먼저 좋은 사람이되기 위해 노력한다. 소설가도 인간이다.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작가로서 예수를 평가한다면.
?작가적 관점에서 예수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세상에 나와 3년밖에 살지 않았던 한 목수가 세상을 온통 뒤바꿨으니 말이다. 내년 가을에 예수 발자취를 찾아 유럽 일대를 여행할 예정이다.
'상도'를 팔아 번 돈으로 가는 것이다. 아마 상당히 긴 여행이 될 것이다. 다녀와서 '최인호 복음'을 쓰고 싶다.
-후배 문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문학은 정치가 아니다. 그냥 문학이다. 요즘 소설들은 너무 어렵고와닿지가 않는다. 공부하지 않고 손끝으로만 써서 그렇다.
소설은 또 큰 흐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소설이 자기고백에 불과하다면 일기장도 모두 소설이 될 수 있다.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문학을 권력화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너무 일찍 작가를 키운다. 그런 작가들은 오래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