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순례자, 불교 문학가 정찬주
계절이 바뀌어 지나도 한참이 지났다....봄 기운이 올라오는가 싶어 남녘 화순으로 내려가던 날,
여전히 쌀쌀함이 옷깃을 파고들어 나선 걸음이 머쓱하고 무안했던 기억이 저 편인채로 어느새 초입의 여름으로 건너간다.
무심의 계절이 지나가는 찰나, 형형색색의 꽃빛으로 잠시 물들었는가 싶더니 완연한 초록이 지천이다.
참으로 오랜 기다림으로 이뤄내는 색깔임이 분명하다.
어디 지천의 자연만 그러하겠는가...저 아랫녘 전남 화순 산자락에 둥지를 튼 불교 문학가
혹은 구도 소설가라고 불리는 정찬주씨 또한 그에 비껴가지 않는다.
무려 50여권의 책을 세상 속으로 내보냈으면서도 여전히
미흡과 미완의 세계를 넘나든다는 그를 만나러 가는 날,
개인적으로 정찬주씨를 좋아한다는 불모거사 김선무씨와 동양화가 김양수씨가 동행을 자청했다.
“耳佛齎에서 쓰여져 전해지는 불교적 소설과 산문을 읽으며 본인의 삶 또한 그처럼 구도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를 되돌아본다면 지금의 자리, 위치는 어디쯤 될까요?”
“글쎄요...특별히 살아내는 일상과 정진의 삶을 의미하는 구도를 나눠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루하루 자연의 순리를 따라 있는 듯 없는 듯 살고자 하는 그런 바람은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 화순 계당산 산중의 허공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섬진강, 영산강에 뒤섞여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내 삶에서 인생의 의미를 담자면 인연의 소중함을 꼽을 수 있겠고 그 인연에 따라 운명이 결정 난다고 본다면
부부라는 것,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도 동행 할 도반이 있다는 것,
살아가면서 방향타로 삼은 지향점을 향해 후회하지 않으며 거침없이 걸어 갈 수 있는 소신까지를 포함한다면
인생의 곡절을 어느 정도 거쳐 나온 자연인으로서 부처를 닮아가는 삶을 향유하고 싶지만
아직은 부처의 자비와 사랑을 채 따라가지 못하는 재가불자의 위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의도가 없는 자연스러운 삶이 그가 가고자 하는 최종의 목적지라면
그가 지나온 길 또한 버리고 비우고 최소한의 것에 자족함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 만큼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왔을 것이다.
쌍봉사...굳이 이불재를 그 곁 자락에 두고 날이면 날마다 오매불망으로 지켜보는 이유 또한
그 치열함으로 달려온 한 부분에서 기인할 터, 하동 정씨 집성촌 쌍봉마을은 그의 할머니가 고향 보성 복내면에서
쌀을 이고 가 불공을 드리던 절이요 그가 동국대 국문과를 다니던 70년대,
소설을 쓰기 위해 얇은 담요 하나를 들고 무시로 들락거리던 오랜 세월의 흔적을 뒤로한 낡고 쇠락한 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를 위해 재워주고 먹여주던 주지스님의 은덕을 잊지 않은 채
영육의 부침을 건너오면서 무수히 지었던 절밥의 빚을 개인적으로 쌍봉사 중창의 불사로 갚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쌍봉사와의 인연은 今生에 겹겹일 뿐만 아니라 煎生에도 있었을 것’ 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런 그가 절대적으로 불교에 입문을 하게 된 계기라면 계기라고 할 대학 4학년 시절,
쌍봉사 주지스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속에 ‘나 이제 세상을 마치려 하오.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다’는 오언절구 한시.
결국 1년 뒤에 絶命詩였음을 절감한 그는 서울에서의 국어교사를 접고
불교와 쌍봉사 주지스님에게 진 빚을 갚을 기회로 조계종이 창간하는 월간 ‘불교사상’으로 1981년도에 옮겨 잡지를 만들고
경전을 읽으며 불교 공부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 후로 깊어지는 불교 공부를 병행하며 1984년에 ‘샘터’사로 자리 이동을 하고
조촐한 소시민의 삶과도 마주하게 되면서 1982년 등단 이래로 간간히 단편 소설을 발표하던 중
1991년에 이르러 암자 순례에 나서게 된다.
이 또한 청정한 공간이요 불법의 나눔 공간으로 당연시 되던 절이 관광지화 되는 것을 보면서 통탄을 금치 못하던 차에
존재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암자로 눈길을 돌리게 된 이래로 10년 동안
400곳의 암자를 돌며 200곳의 암자를 네 권의 책으로 엮어내 세간의 화제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 등장으로 인한 문단의 반응, 불교신자들의 호응을 기반으로
1994년에 만해 한용운의 삶을 엮은 첫 장편 ‘만행’을 출간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던 중
성철 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로 베스트 작가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서 불교 문학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아직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충분히 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는 듯한 불안한 마음의 실체를 찾기 위해
선택한 인도여행에서 충격적인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인도 브라만 계급 귀족들이 쉰을 넘어 자식을 다 키우고 나서 자신이 할 일을 끝내면 숲으로 들어가
나머지 인생을 홀로 지내며 자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林間期를 누리며 사는 삶이 있음을 알고 부러워하는 순간,
화순의 쌍봉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는 말이다.
그리하여 2002년, 서울 생활 30년의 삶을 접게 되는 나이 쉰 살에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솔바람에 귀 씻어 佛을 이루겠다는 이불재를 짓고 홀연히 화순으로 낙향을 하여 쌍봉사를 바라보며
날마다 몸과 마음을 다잡으며 그가 부러워하고 그리워하던 산중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산중의 삶 한켠에는 다행히도 오래 전 1991년 불일암으로 찾아든 정찬주씨에게
저잣거리에 살면서도 물들지 말라 고 ‘無染’이라는 법명을 주시며 재가제자로 삼으셨던
법정 스님의 솔선수범의 구도자의 삶이 기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스님과의 오랜 인연 공덕으로 말미암아 활자 불경의 숲 속에서 헤매는 것이 아닌
진정한 불자로서의 삶에 몰두할 수 있었던 한 부분은 법정 스님을 불가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행운 덕분이요
그로 인한 행복감까지 소유할 수 있었음으로 얻어진 것이요
스스로도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 또한 게을리 하고 싶지 않다는 열망으로
자연스럽게 획득되어진 것 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본의 아니게 그러나 태생적으로 접해지던 불교라는 종교와
대학시절 영역 안에 들어와 인생의 한 부분으로 접하게 된 禪이라는 개념은
‘새는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소설로 깊이를 지니게 되는가 싶더니
어느덧 일상이 되고 참으로 잃지 말아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해 천착하면서도
오다가다 만나는 농부들과의 삶에서 조차 지혜 빌려오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 자연의 뜻에 따르는 자연인 정찬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그를 보면서 공생의 섭리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정찬주씨 그는 和順, 평화로운 자연과 순한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면서
산은 우리가 아는 소나무 몇 그루 때문에 수려한 것이 아니라 수 만 가지의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山色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는 조화로움을 근간으로 하여
탐내고 노여우며 어리석었던 지난날의 三毒을 씻으며 살기를 원한다....아마도 오래도록 그리 할 것이다.
첫댓글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깝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것을
새삼 느낍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목석과 무엇이 다르랴."
19세기를 살던 안성 어느 유학자의 이 말에 공감하면서도
이제는 욕망을 떨어 버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니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 생각됩니다.
그러게요...비운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고
잘 산다는 것, 소신과 주관을 지니고 산다는 것 또한 어려울 이나
그래도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 든든하기 조차 합니다.
알고 있는 것을 몸으로 살아내시는 분이시로군요 ~!
전국 구석구석에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음을 느끼는 요즈음 입니다.
언제 한 번 날아오시죠?
근황이 궁금합니다만...
왜 아닙니까~? 쉬는 시간이 나면 넘 피곤해 집에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답니다. ^ ^
고전중입니다. 몸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니... ^ ^
어쩐답니까?
그래서 오늘 무설재로 찾아든 친구가 보고 싶다는 투정이 있었지만 그냥 보냈습니다.
안부 전해달랍니다..양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