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의 독살설(毒殺說)과 우리 장문(張門)
박석무
지나간 역사가 모두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전에서 진행되는 현재의 일도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진리나 진실은 숨길 수 없고 언젠가는 정확하게 밝혀진다고 믿으면서도, 세상의 일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 사실은 묻히고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행세하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되는 수도 많습니다. 현재의 일이 그럴진대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일이야 진실이 무엇이었나를 알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역사적 사실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이 더러는 소설적 진실로 떠돌기도 하고, 전설이나 민담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증거나 사실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한 영원한 역사의 미궁으로 빠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실 중의 하나에 바로 1800년 음력 6월에 49세로 세상을 떠난 정조대왕의 독살설이 있습니다.
“만나면 전해져 들리는 말들을 이야기 했으니, 당시의 정승이 역적 의원인 심인(沈鏔)을 추천해서는 독약을 올려 바치게 했건만 우리들의 손으로 그 역적 놈을 제거할 수 없다면서 비분강개하여 눈물까지 흘리곤 했었다.”(相見 言傳聞之說云 時相以逆醫沈鏔薦之 使進毒藥 吾不能手除此賊 爲之忼慷流涕)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기고금도장씨녀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라는 글의 한 구절입니다. 장씨는 영남의 대유(大儒)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의 후손인데 당시의 인동현감 이갑회(李甲會)의 아버지와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張玄慶)의 아버지[장시경(張時景)]가 친척 사이로 자주 만나 당시의 전해져 들려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전해져 들리는 이야기가 바로 정조의 독살설이라는 것입니다. 심인이라는 어의(御醫)는 정조 사후(死後) 약(藥)을 제대로 쓰지 못해 임금을 죽게 했다고 역적으로 처형된 실재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산은 직접화법을 쓰지 않고 이갑회의 아버지와 장현경의 아버지가 자주 만나 전해지는 독살설을 자주 이야기했다는 간접화법을 써서 정조 사후 정조의 독살설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만을 말했습니다. 심인은 바로 처형되었으니 진실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오늘에는 그런 역사적 미궁이 없을까요. 당시 정승이 누구인가도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 정조 의문의 죽음 추적… KBS1 HD역사스페셜 ‘독살설’ 집중분석
2006년 8월 18일 방영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정조. 그는 재위 24년째인 1800년 6월,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절후(癤候: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에 시달렸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KBS1 TV ‘역사스페셜’은 18일 밤 10시 ‘조선 최대의 의문사-정조는 독살됐나?’편을 방송한다. 제작진에 따르면 정조가 사망한 직후, 전국 곳곳에 그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괘서(자신의 의견을 알리기 위해 공공장소에 써 붙인 글)가 나붙었다.
이 뿐만 아니라 경상도 인동(지금의 구미)에서는 장시경(張時景)이라는 선비가 “서울로 올라가 역적을 처벌하자”며 난을 일으켰다. 정조 사후 강진으로 유배 간 정약용도 ‘여유당전서’를 통해 독살이란 표현을 남긴다. 그만큼 정조의 죽음을 단순 병사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실록이 전하는 정조의 사인은 종기와 화병. 제작진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 보름간 어의들이 내린 처방을 살펴봤다. 이 중 ‘연훈방’은 급성수은중독의 가능성이 있는 처방이었다. 결국 연훈방을 처방한 지 사흘 만에 정조는 사망한다.
특히 의학서적과 상반되는 이상한 처방을 내린 어의들과 32가지 처방을 집중적으로 해부했다. 제작진은 또 정조가 죽기 직전에 언급했다는 ‘수정전’의 의미와 흔적 등을 추적했다.
정조를 둘러싼 복잡한 권력 관계 역시 그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정조는 즉위하던 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한다.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돼 자란 그가 굳이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 제작진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된 ‘보복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던 정조가 조정의 주도권을 놓고 기득권 세력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이와 함께 권력을 위해 살인하지 않는 세상,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 모든 백성이 잘 사는 세상을 꿈꿨던 정조의 개혁안과 그의 죽음이 우리 근대사에 끼친 영향도 살펴본다.
(추가)
역사스페셜 내용
정조가 죽은 후 1800년 8월 15일 추석, 장시경과 두 형제는 노비 등 60여 명을 모아 역적 의관이 약을 잘못 써 왕이 죽었으니 역적 의관을 처단하자며, 인동 관아를 습격해 무기와 식량을 갖고 서울로 진격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동 관원들에게 제지를 받아 전세는 역전돼 무리들은 흩어졌고, 삼형제는 인근 천생산으로 달아났으나 추격대에 포위돼 낙수암에서 투신 자결한다.
선비들에게 왕의 의심스런 죽음은 목숨을 걸고 밝혀내야 하는 중요 사안이었다.
족보기록
휘 時景(시경) 字子瞻生辛未卒庚申八月十六日正廟庚申爲地主所掅誣從子錫奎至試龥寃哲宗辛酉伸雪
휘 時晋(시진) 墓南山詩酒軒公墓下丙向
휘 時昱(시욱) 通德郞卒庚申八月十六日 (참조 정미보 2권 606~607쪽)
역사스페셜 내용과 족보기록이 일치함이 확인되며, 특히 휘 시진(時晋) 부군의 4대손(代孫)은 위암(韋庵) 휘 지연(志淵) 부군이십니다.
인동(옥산)장씨 대표카페 Cafe.Daum.Net/JangGround
우리 인동(옥산)장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전 종인이 힘을 모읍시다.
첫댓글 세상의 올바름을 위하여 불의를 바로잡고자 자신을 희생하신 위대한 선비정신을 우리집안 선조님의 사적에서 또 배웁니다... 세분 할아버님을 欽嘆敬慕하여 마지안습니다... 翼昌아재!! 소중한자료를 게시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월인님 말씀이 무시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