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관음기도 때의 식광과 마장
공삼매(空三昧)
서울에서는 비구 대처가 한창 다툴 무렵이었고,
나 개인적으로는 강화도
보문사에 가서 기도를 마치고 난 뒤 입니다.
나는 부산 연등사에서 여름 석달 동안 지장기도를 하였는데,
기도하는중간에 또 식광의 고비가 나타났습니다.
어느날 오전 시간에 '지장보살'을 부르는 지장정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는 순간에 눈 앞에 계시던 부처님도 없고 벽도 없고 집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펼쳐졌습니다.
분명히 눈을 뜨고 쳐다보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변광야처럼 환하게 텅 비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전까지는 목탁을 치고 지장보살을 불렀는데,
그 순간에는 내가 목탁을 계속 치고 있었는지
'지장보살'을 계속 부르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끝낸 다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분명히 목탁도 계속 쳤고 지장보살도 계속 불렀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맑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계속 정근을 했다는데,
내 자신은 그것까지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공간에 그런 상태에서,
나 자신도 의식을 못한채 두시간 내지 세시간을 그대로 보낸 것입니다.
포마(怖魔)
연등사에서 지장기도를 마친 나는 사천 다솔사로 갔습니다.
그때는 강원의 학인들이 비구 대처 싸움 때문에
강원에서 경전조차 제대로 펴지를 못할 때였으므로,
다솔사에 가서 한철 살면서 백일관음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2시 40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다기물을 떠서 법당에 들어가려고 법당문을 열었는데,
순간적으로 온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그때의 느낌은 내 몸의 털 하나 하나에
한 사람씩 붙어 잡아당기는 것 같 았습니다.
머리털부터 시작하여
몸 위쪽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털 한 개씩을 위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고,
아래로도 수많은 사람이 털 한 개씩을 아래로 잡아 당기는 같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법당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기 싫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억지로 들어가서 예불을 드리고
'관세음보살'정근을 마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법당을 쳐다보기도
싫은 상태가 며칠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두려움의 마구니인 포마의 시련을 겪은 경우인데,
이러한 고비를 경험하고 나서는,
지금까지 그러한 경우를 다시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느 날 저녁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은사 스님께서는 내가 법당에 있는 동안은 잘 찾지 않으시는데,
그 날은 분명히 법당 밖에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기도를 하다말고
--- "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계속 기도를 하였습니다.
은사 스님은 세 번을 부르다가 화가 나셨는지,
법당문을 발로 '쾅'차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은사 스님의 목소리요 행동이었습니다.
정근을 마친 다음 나는 은사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제가 기도하고 있을 때 법당 밖에 오셔서 저를 부르셨는지요?"
"안 불렀다. 네가 기도하는 도중에 언제 너를 부른 일이 있었느냐.
법당 쪽으로는 가지도 않았다."
이처럼 기도정진을 하다보면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분이 나타나
방해를 함으로써 기도를 중단시켜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중단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중단을 하게 되면 업장을 녹이지 못하여
원성취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희마(喜魔)
다솔사에서 관음기도를 하면서 먼저 포마를 겪은 다음에는
희마 경계가 찾아왔습니다.
희마가 찾아오면 하염없이 기쁘고 좋아,
자꾸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태가 됩니다.
나는 아무런 좋은 일이 없는데도 웃음이 났습니다.
혼자 있어도 웃음이 터져나오고,
무엇을 쳐다보기만 하여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는 사람을 보면서도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근하는 도중에도 웃음이 터져나오고,
천수를 지다가도 혼자서 웃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스님께 불려가서
---- "무엇이 그렇게 좋아 실성한 놈처럼 싱글벙글거리고
다니느냐?"며
꾸중을 듣는 그 자리에서도 계속 싱글벙글거렸습니다.
하지만 이 희마의 상태는
일주일가량 이어지다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비마(悲魔)
희마가 사라지자 그 다음에는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비마를 경험한 것입니다.
처음 비마의 경계가 찾아온 것은
오후 2시간을 정진할 때였습니다.
법당에 들어가서 천수를 마치고 다기를 연 다음
---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대자 대비관세음보살'하면서
정근 목탁을 치기 시작한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정근을 마칠 시간쯤 되어서 보면,
목탁은 이쪽으로 떨어져 나가 있고
목탁채는 저쪽으로 떨어져 나가 있으며,
나는 나대로 좌복에 엎드려 얼마를 울었는지
좌복이 눈물에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왜 이렇까? 정신을 차려야지."
낮시간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기물을 올리고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대자대비관세음보살'부를 때까지만 의식이 있고,
그 다음의 동작은 전혀 기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한 일주일쯤 계속 되더니,
언제 어떻게 그치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그런 상태가 없어졌습니다.
희마에 휩싸일 때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비마의 차원은 지금까지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을 만큼 슬픔에 깊이 빠졌습니다.
이렇게 비마의 상태가 지나가고 난 다음
소름이 끼치는 상태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경험한 포마의 경우처럼
심한 두려움의 상태가 아니라,
수시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었습니다.
두렵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소름이 몇번씩이나 찾아오는 그런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별다른 장애없이 정진을 잘하여
백일 관음기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결국 나는 다솔사에서의 백일 관음기도를 통하여
두려움의 마구니, 기쁨의 마구니,
슬픔의 마구니가 왔다가는 체험을 고루고루 다 겪었습니다.
옛어른들의 말씀대로라면,
--- '모든 업장을 소멸하고 원결이 풀어지는 고비'를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계는 개개인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근기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적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겪어나가는 과정에서 비슷비슷한 마장들이 나타나므로,
이러한 경계를 체험하고 나면
후학들에게 그런 고비가 있을 때 흔들리지 말고
극복을 해나가는 이야기를 자신있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한 단계를 극복하고 나면 극복한 만큼 향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보통의 경우에는
희마, 비마, 포마의 경계를 넘어서고 난 다음에
식광의 고비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나처럼 식광이 먼저 나타나고,
희마, 비마, 포마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예는 별로 없습니다.
어른들의 체험담을 들어보고 종합해보면,
희마, 비마 등의 고비를 넘어가고 난 다음에
식광의 차원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장을 극복하면 그만큼 빨리 해탈한다
실로 수행 도중에 장애가 붙을 때,
그 장애를 잘못 생각하면 속아서 엉뚱한 결과가 오게 됩니다.
약 삼십년 전 남해 보리암에서 준제진언을 외우며 기도를 하다가
영영 불구자가 된 스님의 얘기를 나는 가끔씩합니다.
그 스님은 눈 앞에 나타난
보살의 환영을 보고 환희심에 도취되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애를 쓰니까 보살님께서 직접 시현을 하셨구나.
그리고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내 신심을 시험하시는구나'.
이렇게 환희심에 도취되어 마구니의 수단에 빠져 들었고,
스스로 성기까지 절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 두려워 수행을 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림없이 정진하기만하면 마장이 수행을 도와줍니다.
마장이 극복되면 그만큼 깨달음도 커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우리 불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마장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능엄경에는
'50종변마사(五十種辨魔事)'라하여 공부할 때 나타나는
50가지 마구니의 길을 상세하고 설하고 있지만,
이는 비마, 희마, 포마 곧 슬픔, 기쁨, 두려움의
세가지 종류에 다 포함됩니다.
참선, 염불, 주력 등의 공부를 하다가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객관의 관계를 긍정하지 말고
부정을 해버리는 쪽으로 밀어부쳐야 합니다.
만약 객관의 세계를 긍정하기 시작하면
마구니의 수단에 휘말려 버리고 맙니다.
물론 객관의 세계를 긍정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그 수단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다솔사에서 관음기도 중에 겪은
비마의 경험은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보통 7일 내지 길어도 보름이면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이 경계에 흔들려 기도를 그만두게 되면
그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한평생을 비감 속에,
슬픔 속에 빠져 공부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한평생을 이상한 사람처럼 웃음 속에서 넘기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마, 비마, 포마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념으로 노력하여 그런 고비를 넘기고 나면,
망상 속에서 살던 그 전의 상태를 넘어서서
언제나 편안하고 아름답고 기쁜 상태가 됩니다.
또한 일상생활이나 수행정진을 통하여 체험하는 경계가
훨씬 더 너그러워지고 넓어지고 커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장과 관련하여 꼭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마, 비마,포마의 경계나 식광의 경계
모두 공부를 지어 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비일 뿐,
이것이 전체도 공부가 끝난 자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법 공부에는 '적당히'가 통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다 익어지고 나야 그 살림살이가 내 살림살이가 됩니다.
수행도중에 아무리 신통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마에 불과합니다.
실로 중간 과정에서
겪는 것은 믿을 것도 없고 소용도 없습니다.
완전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우주 그대로를 집으로 삼고
대우주 그대로를 내 몸으로 삼아 사는 차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부디 부처님의 차원에 도착할 그때까지
임시로 나타나는 식광이나 시험의 상태에서
벌어지는 것들에 대해 집착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 경계를 경험하면서
--- '이제 내 공부가 다 되었다.'고 받아들이면
돌이킬 수 없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부가 완전히 익어 내 살림살이가 될 때까지,
내가 하던 공부를 흔들림없이
꾸준히 지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잘 명심하시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를 성취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