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나에게 언제나 현실이었다. 십대 때 갈 곳이 없어서 교회를 다녔고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 성당을 나갔다. 대학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신학대학에 갔고 생존을 위하여 목회를 했다. 목회를 하다가 "이것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빈민현장을 갔다. 빈민현장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호주로 갔다.
그런데 한 번은 미국에 가서 아틀란타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장종식 박사가 "지 목사 님이 가시는 곳에는 바람이 불어요."라고 했다. 어디서 들어 본 말이라고 생각되어 기억을 더듬어 보았더니 35 년 전 부천경찰서 정보과장이 시위 현장에서 나에게 하던 말이었다. 그러면서 "잘 그리면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조심하시요 "라고 했었다.
8,90년대 나는 부천 경찰서 정보과장과 적대적 공생관계이었다. 정보과장의 역할은 부천의 노동자, 빈민 학생들의 동태를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 했고 나는 그들을 대변하거나 보호하는 입장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서로 필요한 정보를 소통하고 협상을 해야 했다. 질이 좋은 서장이 있을 때는 서장과 만남을 주선해서 서장이 출판기념회 같은 나의 개인적인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시장과는 식사를 해본 적은 없어도 서장과는 여러번 자리를 같이 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빌어 먹는’ 목사였기 때문이었다.
몇일 전 민중신학자 김진호 목사를 만나러 30여년 만에 선교초기 카나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지어진 서대문 선교교육원 자리에 갔더니 감회가 새로왔다. 민주화 투쟁 때 온갖 추억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87년 민중 교회 목회자들이 '군부독재타도를 위한 목회자 삭발 단식 기도회'를 했다. 주변에는 교인들이 아니라 전투 경찰 1개 중대가 모여서 지켜보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삭발을 했다. 엄숙을 넘어서 침통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삭발을 하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단식에 참여 하는 것은 소문이 날 리 없지만 감리교, 장로교 소속 목회자들과 달리 꽉 막힌 보수교단 출신인 나에게 밖으로 드러나는 삭발은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에게는 경찰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교단이 무서운 존재였다. 경찰은 수첩에다 이름을 적는 것으로 끝나지만 삭발은 고립을 더 강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교단에서 나는 항상 껄끄러운 존재여서 신학교 동기생들과도 대화가 단절되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소식이 깡통인 신학대학의 학장은 군사 독재 정권 때문에 데모를 하는 학생들을 내가 배후조종을 한다고 교단에 나를 징계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마음 속으로 갈등을 하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의 입장을 잘 아는 허병섭 형이 "아무래도 지 목사는 안 깎는 것이 좋겠다. 성명서에 이름도 넣지 말고"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머리를 깎지 못하고 단식에 참여해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스스로 빠져야 했다.
함께 연대 하는 진보 성향의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나는 외로운 존재였다. 모두 선 후배 사이로 얽혀 있는 관계에서 나 혼자 보수교단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복수 국적자로서 연금을 받는 호주에 대하여 싸가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간간히 호주 뉴스를 본다. 그런데 희귀하게도 한국 뉴스에도 별로 보도되지 않는 삼성파업 뉴스를 크게 전하고 있었다.
이 뉴스를보는 순간 35년전 기억이 되살아 났다.
현대목재 본사에서 사무직 노조를 결성하는데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경찰에 정보가 새면 ‘제 3자 개입 금지’ 조항으로 엮을 가능성이 있어서 비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본사 사무직 직원들은 노조를 만드는 일을 두려워 했지만 드디어 성공적으로 노조를 결성하고 노조결성보고대회에서 격려사를 해달라고 해서 압구정동에 있는 본사로 갔다.
대회장인 현대목재 지하 강당에는 울산공장과 용인공장에서 올라온 생산직 노동자들과 서울지사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사무원들이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어색해 보이고 꼭 자기가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같이 보였다.
불안해하는 표정의 사무직 조합원들에게 아무쪼록 앞으로 그들 앞에 닥칠 시련들을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격려사를 했다. 사실 두렵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오직 용기로서 극복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 그것은 십자가가 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