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을 찾는 맹거기 산우들을 위한
정조 이야기
조선후기 최고의 군주로서의 빛나는 업적을 남긴 정조대왕의 탄생과 어린시절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의 인생은 집권 당파인 노론과의 관계 및 갈등, 암살위협, 부친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어머니에 대한 효성, 애민사상 등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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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2대 왕 정조 이산은 1752년(영조 28년) 음력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 홍 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으로 호를 정하였다. 그리고 의소세손의 장례를 치른 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755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특별히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외어보도록 하였다. 이 때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 10자를 외고 부모 두 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 번 본 사람들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김종수를 세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시켰다.
세손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의 왕과 세자는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학습을 하였는데, 왕이 하는 것은 경연이라 하였고, 세자가 하는 것은 서연이라고 하였다. 세손 역시 세자와 같이 서연을 열었고, 서연을 전담하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던 기관인 세자익위사의 문관들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서연에서 강론된 책은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과 같은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하여 소학, 대학, 논의, 맹자, 중용의 경서를 강론하고 10세 이후로는 사략, 강목과 같은 역사서를 별도로 강연하였고, 17세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와 같은 것을 하루에 세 번 서연을 열었다. 당시로는 많은 양의 학습이었다.
정조는 경학 못지않게 무예를 단련하였다. 그는 특히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한발은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과녁을 맞히지 않았다고 한다. 가히 명사수의 실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정조의 모습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기록은 정조 실록의 정조행장이다. 여기에 따르면 정조의 첫 번째 이미지는 책과 종소리이다. 정조는 유난히 책을 좋아해서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를 보면 금방 좋아라.” 했고, “첫돌이 돌아왔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소곳이 앉아 그저 책만 읽었다.”고 한다. 영조실록에 기록된 고전에 대한 소년 정조의 해박한 지식은 책을 좋아하는 그의 타고난 성벽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행장을 보면 정조의 목소리는 마치 큰 종소리 같이 우렁차고 낭랑했다고 한다. 정조의 목소리는 크고 맑았던 듯, 스승 박성원은 “세손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유난히 제왕학 공부에 신경을 썼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와 달리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질문에 대해 막힘없이 대답을 잘하는 세손 정조를 더없이 어여뻐 했다.
한 예를 들면 1761년 정월에 영조는 “어진 사람이 늘 좌우에 있으면서 너를 권면하면 고달프지 않겠느냐?”라고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어진 이가 저로 하여금 어질게 하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들어야만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해, 영조로부터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 해에 또한 영조는 정조를 데리고 처음으로 운종가에 나와 백성들을 만나보게 한 뒤 “오늘 구경 나온 사람들이 네게 무엇을 기대하더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조는 “선을 행하기를 바랐다.”고 대답했다. 이어 영조가 “선을 행하기기 그리 쉬운 일이더냐”고 물었다. 정조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쉽다고 생각해야만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다.”고 대답해 “영조를 더할 수 없이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정조 행장)
정조는 또한 어린 시절부터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정조는 네 살 때부터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독서에 들어갔다. 혜경궁이 그의 독서열이 너무 지나친 것을 염려해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르자 정조는 “그때부터는 남이 모르게 등불을 가리고 세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태종이 아들 충녕대군의 건강을 염려해 책을 치우자 충녕은 아버지 몰래 책을 읽었다는 것과 같았다.
정조의 또 다른 자기관리법을 보면 “너덧 살부터 늘 꿇어앉기를 좋아하며 언제나 바지의 무릎 닿는 곳이 먼저 떨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평소 수기(修己)를 강조한 영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항상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자신의 지저분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그는 할아버지 영조를 기쁘게 하려고 노심초사 하였는데, 심지어 정조가 아파 누워 있을 때에도 영조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다.
1765년 겨울 어느 날 영조는 병중에 있는 정조로 하여금 칸막이 너머에서 신하들과의 소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면서 정조의 반응을 살폈다. 그 때 신하들 좌우에서 “세손이 그 소리를 듣기 좋아한다.”고 하면, 영조는 기뻐서 “세손의 마음가짐이 강해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신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을 편케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성군의 자질을 보인 정조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1764년 강관으로부터 삼남지방의 백성들이 굶주려 얼굴이 누렇게 떴다는 말을 들은 정조는 그날 저녁식사 때 고기를 들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묻는 영조에게, 그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젓가락이 차마 가질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 해에도 정조는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농사 때를 빼앗지 않으면 됩니다.“라고 대답해 영조의 칭찬을 들었다.
너무나 수명이 길어 재위기간이 길었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와 세손인 정조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사도세자와 정조는 불과 17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영조는 후계자를 놓고 나름대로 저울질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유전학자들에 의하면 아들은 어머니의 유전을 70%닮는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면 정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은 대비된다. 사도세자의 친모는 인물은 빼어났지만 궁녀출신인 영빈 이씨였고, 정조의 친모는 사대부 집안에서 정식으로 간택을 받아 세자빈이 된 혜경궁 홍씨였다. 혜경궁 홍씨는 궁중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룬 한중록을 기술한,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춘 여성이었다. 유전학에서는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유전을 70%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정조는 단순하게 보면 70%의 어머니의 뛰어난 학문적 자질과 30%의 아버지가 지닌 무인적 자질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영조는 아들의 강한 무인적 자질보다는 당시 유교국가인 조선의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가진 손자를 더 선호하게 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나이가 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 아들과는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지게 되지만, 그보다 훨씬 아래인 손자에게는 자연적으로 부드러움과 애착과 정이 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이 아들과는 점점 사이가 멀어지게 하고,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모범적인 인간형인 손자 정조에게 더욱 더 가까이 하게 하였다.
무인적 자질을 가진 태종이 같은 성격인 첫째 아들 양녕대군 보다는 절제되고 선비적 자질을 가진 충녕을 더 선호하게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 전기 최고의 군주인 세종은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배우기 좋아하는 것, 호학불권(好學不倦)과 뛰어난 의견 제시능력, 헌의(獻議)”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아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최고의 군주로 평가되는 정조도 학문능력과 그에 기초한 토론능력, 선대(善對)를 인정받아 할아버지 영조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의 화성 융건릉 능행차 할때 거쳐간 과천현
삼남 옛길과 온온사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