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에 폭염, 후쿠시마 오염수에 양평 서울 고속도로를 놓고 사사건건 시시비비 싸움박질에 민초들은 지쳐 힘들어 허덕이는 데 거짓 선동에 정쟁만을 일삼는 정치패거리들도 복날이라고 몸보신은 할까? 글쎄다 우째든 인간 모두를 위해 뜨거운 국물 속 여물지 않은 몸뚱이를 뚝배기에 담그고 수청 드는 지극한 정성들이 있다.
○ 삼계탕
저것이 날갯깃이 더 자라 엉덩잇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랐다면 좋은 짝 만나 운우지정 알고 죽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중생을 위해 온갖 보양식 품고 숭고하게 희생하니 아 슬픈 현실이여! 그저 명복을 빌 뿐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 제 팔자가 자식될 알마저 불판에 던져야 하는 끝없는 공양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닭은 스스로 배려라는 온혈의 유전자를 퍼뜨리며 본능의 진리 따라 사방에 가득한 천한 입을 위해 또 그들의 허기짐을 채워주기 위해 자기의 생을 던지는 큰 비움이 운명이라 여기는 것이리라
왜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해 자연의 품속에서 날개짓 하면서 살지 못하는 것인지 왜 새벽 울음으로 잠든 세상 깨우다 가는지 횟대 위 떨어지는 소박한 붉은 볏 하나 말이 없다.
○ 영양탕
복날에 육신 공양을 하는 것이 어디 그 뿐이더냐 애초에 어설픈 두 발로 허둥대는 인간의 꼴이 안쓰러워 초원 들판에서 다가와 동굴 속 뒹구는 벗은 인간이 추워 보이자 제 털로 한기를 녹이려 덮어 주고 잠자리를 같이 하며 혀를 내밀고 꼬리 치던 충복이 바로 너였었다.
내 유년의 칠월 매운 더위에 혓바닥 내밀고 댓돌 베고 누웠던 삽사리가 개울가에 고사리와 깻잎이 한 광주리 풀어지고 화덕에 걸린 가마솥에서 끓는 물소리가 나면 불안해진 마음 뒤란 누렁이를 찾아 눈곱 낀 눈을 핥아 주던 그모습이 생각난다.
저는 살아도 황구의 죽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몸 공양하면 혼이 돌고 돌다가 생으로 환생 하다는데 엎드릴 복(伏)자에 개 견(犬)이 사라지면 사람(人)은 남으니 필시 좋은 세상 오면 공양의 공덕에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잘 익는 고사리 지팡이 짚고 이승을 떠나는 누렁이의 황천길 땡볕을 피해 미루나무에 숨어든 매미가 저도 그리 슬픈가 처량한 장송곡을 한다.
맴! 맴! 맴!...
질긴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그어진 철망 속 갇혀 퍼덕이는 애처로운 소망 비상을 품고 앉았던 횟대에 한 움큼의 좁쌀에 감사하며 진하게 덧칠을한 배설물을 밟고서 꼭두새벽마다 맑은 기를 담아 목청 돋구어 외쳤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공전의 축에 꿰어져 모든걸 화덕에 얹힌 채 타들어 가는 생의 자락이 가상하다.
타력에 끌려 자전하며 떨구는 허무한 삶의 진액으로 인간을 위해 공양하는 게 그누구의 만찬을 위해 구속된 날개요 울부짓음이던가? 개만도 못한 인간이 즐비한 웃픈 세상에 오늘도 이렇게 헛소리 하면서 살고있는 삶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