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 선과 악이 극명한 것 처럼 나타나고 신군부 세력이나 이들에게 굴종하는 국방부 장관이 가볍게 보이고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장관 노재현은 젊은 시절 치열한 군대, 군경력자들과 이북출신이 많았던 특히 포병부대의 장교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고 그에 맞는 경력과 함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인정을 받은 지휘관이었다.
국군이 1949년 2월 38선에서 동해안 기사문리에서 포경도 없는(미군들이 분쟁 위험 때문에 떼어감) 105mm곡사포를 이용 직접조준하여 도발을 한 북한군 초소를 포격하였는데 이 사건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이루어진 포병의 최초의 실탄사격을 한 4월 5일 보다 빨랐고 당시 노재현은 포병병과교육을 받은지 얼마 안된 장교였지만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인물이었다.
이때 사격을 한 이유는 38선을 넘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피해를 주고 위협이 되자 강릉의 10연대는 상부에 도움을 청하고 포병병과가 만들어 진지 얼마 안된 시기 훈련중이던 포병1개 중대를 완편으로 만들어 노재현을 지휘관으로 임명 M3 105mm곡사포와 차량을 멀리 강릉으로 파견한다.
당시 노재현 중위는 강릉의 보병10연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10연대에서도 신경을 쓴다.
초창기 체계가 잡히기도 전에 부대를 편성하여 멀리 강릉까지 어려운 길을 따라 파견된 부대를 지휘하여 실전을 치룬 것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노재현 중위를 위험한 인물로 보고 암살을 시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6.25 동란시 개성방면을 책임진 1사단을 지원하던 6포병대대장으로 치열한 전투를 했고 이후 이 부대는 재편되어 이름이 바뀌고 11포병대대가 되고 3사단을 지원한다.
노재현은 이후 중령으로 진급 10월에 창설되는 포병26대대의 대대장이 되어 새로 만들어진 9사단을 지원하며 다시 이 부대는 5사단을 지원한다.
51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155mm곡사포를 장비한 99포병대대가 홍천에서 창설이 되고 이 부대는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고성에서 화력지원을 하는데 이 부대의 초대 지휘관도 노재현이다.
이후 52년도 제1야전포병단의 초대 대대장으로 금성지구 전투에서 6사단을 지원한다.
이 당시 포병부대를 많이 창설하는데 당시 포병단에는 2개의 대대가 있었다.
이후 사단을 화력지원하는 부대들이 늘게 되고 53년에는 군단에 포병사령부가 만들어 지게 된다.
이후 대령이었던 노재현은 55년도 5사단 포병사령관으로 1개월인가 잠깐 복무하다 1군단 포병사령관으로 1년 복무했다.
56년에는 준장으로 진급 포병학교 교장으로 복무를 하는데 무려 33개월 동안 있었으며 아마 교장으로 최장기 복무자였을 것이다.
중요한 건 당시 육사 11기는 임관한 지 2년 밖에 안되었다.
군복무를 10여년 한 인물이 장군이 31살에 장군이 되었다는 건 아무리 전쟁 시기였지만 대단한 결과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건과 고비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30사단장 7사단장 그리고 2군단장, 군수사령관 , 참모차장, 참모총장등을 역임한 사람이 국방부장관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사건에 대처한 결과는 실망을 넘어 그 위험하고 어려웠던 시기 겁없이 싸웠던 인물이 맞나? 혹시 다른 사람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고 하는데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높은 자리에 너무 오래 있다보니 잃을 것이 많아 자신의 자리가 어떠한 건지 파악을 못했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힘에 굴복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년시절 많은 군경력자 사이에서 계급이 뒤바뀌고 지휘관이 뒤 바뀌어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위의 정치적 판단 보다 자신의 고집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마지막에 가서 너무나 힘없이 무너져 내린 느낌이고 영화나 드라마에선 너무 무기력하고 희화화 된 인물이라 더 실망스럽다.
지금도 나이가 들어 출세를 하면 젊은날의 그 모습과 180도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인사들이 있다면 자신을 더 다스리고 공인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기 어렵다면 야인으로 내려오는 것이 자신과 모두를 위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