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주 부터 목사님이 사탄설교를 4주 동안 하신다고 하시고 첫 번째 설교를 들으면서 너무 마음이 무거워 처음으로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설교를 듣기가 매우 힘든 가운데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를 드리는 마음에서 부터 영성회복이라는 저의 당면한 신앙을 당분간 우리교회가 아닌 타 교회에서의 유랑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백주년기념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은 재정공개의 핫이슈가 되고 있고 어느 분이 백주년기념교회에 가봤냐고, 담임목사님인 이재철목사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그분의 설교 한번, 책 한권 읽어 봤냐는 충고가 마음에 울렸기 때문입니다.
11시 2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에서 9시 50분에 출발하여 합정동 양화진 끝자락에 위치한 백주념기념교회에 도착한 시간은 10시30분. 교회 뒤편에 위치한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 이 땅에 묻힌 선교사의 묘역을 차안에서 둘러본 후에 예배당으로 걸음을 옳겼습니다.
일반 건물을 개조한 듯한 본당이 있는 1층 로비에 무료로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대형 온수기와 주전자가 있어 잠시 차를 마시고 예배당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지하에 위치한 본 예배당은 이미 자리가 없어서 3층으로 예배를 드리러 올라가니 예상대로 프로젝트로 화면을 보며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화면에 보인 본 예배당은 과거 인창동 두레교회를 보는 듯한 좁은 예배당 공간이었습니다. 아니 그 보다 매우 협소해 보였습니다. 성가대석 마저 공간이 부족하여 강단 양 옆으로 배치했고 제가 예배를 드린 공간은 접의자가 약300여개 정도 배열하여 앉아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자리에 앉자 인창동 지하예배당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주보는 A4용지에 복사 수준으로 예배순서, 지난주 헌금집계, 교회소식등 잇었고 특별히 눈에 띤 내용은 담임목사님인 이재철목사님이 암 수술 후 항암치료로 3월 9일 강단에 서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이재철목사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용은 재정공개가 이슈가 되어 인터넷이나 타인에게 전해들은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교회 목회자답지 않게 다른 면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문장목사님이 <깊은데로>의 해명 자료에서 나와 있는 출판사는 1974년 무역회사인 홍성사를 설립해 이듬해부터 출판을 등록하고 인문사회서적을 주로 출판했습니다. 그 후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홍성사는 정애주사모님에게 양도하고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문장목사님께서 <깊은데로>의 해명에서 목회자 사모가 처음부터 출판 등록하여 회사를 설립한 경우와는 다른 경우입니다. 홍성사는 출판업계에서 평판이 매우 좋은 회사이며 정애주대표는 명함에 홍성사 대표사원으로 기재했을 정도로 비록 남편인 이재철목사님이 설립한 회사일찌라도 애정을 가지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계에서는 믿음을 글들이란 시리즈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안요한목사의 간증 글인 <낮은대로 임하소서-이청준지음>, 두레도서관에도 있는 초기 외국선교사 이야기인 <양화진-정연희지음>, 그리고 전임목사님의 <새벽을 깨우리로다-김진홍지음>가 믿음의 글들 시리즈입니다.(저는 겨우 이 세권만 읽어 보았습니다.)
이재철목사님은 정신여고 강당에서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개척 시 10년 목회 하기로한 약속대로 10년 후 사임하고 교단 파송목사로 스위스 한인교회를 2년간 시무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지금의 백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계십니다. 앞에서 이목사님이 항암치료로 지금 강단에 서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우리가 되새겨 볼 것은 목사님이 자녀 결혼식에 교회에 알리지 않고, 축의금을 일절 받지 않고 조용히 치루었던 내용과 암 수술 때문에 3개월간 강단에 서지 못하게 된 이유를 성도들에게는 상세히 설명했다는 내용입니다. 교회의 헌금으로 신수비(사례비)를 받고 사는 목회자가 설교 등 목회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성도들의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교회 목회자들은 신수비(사례비), 자녀학자금(실비), 심방비(유류대, 실비)이외는 일절 제공 받지 않으며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들도 사례비를 받고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담임목사 사례비가 450만원 정도 되고, 부목사들도 차이가 별로 없으며 항목에서 보듯이 세금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재철목사님에 대하여 너무 길게 설명드린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부목사님에 대하여 더 말씀 들릴까 합니다. 백주년기념교회는 부목사라는 용어 보다 전임목사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담임목사, 전임목사(부목사), 전임전도사, 양화진문화원 연구원, 직원 등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담임목사와 부목사간의 철저한 동역자 관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어제 설교를 하신 전임목사님인 정한조목사님은 이재철목사님이 주님의 교회를 사역하실 때부터 스위스 한인교회 이재철목사님의 후임 담임목사 그리고 지금의 교회까지 동역관계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실라, 디모데 등 성경의 목회 동역자의 모습을 이 두 분의 목사님에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현재 두레교회에서 담임목사님에게 해임 당하신 부목사님의 관계에서 이재철목사님과 정한조목사님의 동역자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백주년기념교회의 예배순서중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순서는 설교 등 일부 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깊이 준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성도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모습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정한조목사님도 어눌한 말솜씨였지만 철저하게 원고를 준비하여 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또한 장로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성도가 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목회자, 장로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성도들이 함께하는 예배이고, 교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출석하는 두레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부러웠습니다. 일일이 세 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예배드리는 공간에는 20-30대가 반 이상으로 보였습니다. 투명한 재정뿐 아니라 소박하다 못해 불편하게 예배드리는 건물?, 젊은이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 장사하지 않고 성도들에게 음료, 식사를 제공하며 성도들을 섬기는 교회의 모습을 백주년기념교회에서 보았습니다. 예배 중에 연신 눈물을 흘리는 가족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예수님 보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았나,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위해 교회를 나가지 않았나, 목사님의 명성 때문에 교회를 선택하지 않았나, 봉사보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나, 예수님 사랑 보다 이 모든 것을 더 추구하지 않았나 반성해 봅니다.
저는 백주년기념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오면서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성도들이 함께하는 교회를 두레교회에서 그려봅니다.
첫댓글 참 부러운 교회이군요. 이외에도 이재철 목사님에 대한 일화는 많이 전해져 오고있죠. 미담만 전해져 오는데 두레교회는 미담보다 험담이 더 많으니 교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죠. 자랑할 것이 많은 교회가 되길 바랄뿐입니다. 교인들이 바까에 나가서 진심으로 자랑할 수 있는 교회로 만들어 나가야겠습니다
저런 교회의 모습이 개혁교회의 모습이지요. 두레교회도 인창동 시절에는 그랫는데요. 이문장목사님 부임후
주일 기도도 장로님으로 바뀌었지요. 지금은 아예 두바협 장로님들은 기도에서 빼버리고요. 교회가 불편하여도
영적으로 바로 세워지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반이상이라 하니 소망이 있습니다. 저희도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참배하고 복음에 빛진자의 삶을 살자 결단했었는데 교회 안의 갖힌자가 되어 한치도 못나가게
되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한 자들일까요. 디조님! 좋은 교회 잘다녀오셧습니다. 부럽네요.
많은 부분을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소감문 입니다..
본이되는 교회를 탐방해서 두레교회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성도로서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사전 확인 작업이 불충분했다면 방문한 그 교회의 주보를 통해서,교회외관 치장,담임목사실의 크기,부교역자들과 성도들의 표정,기도자와 설교자의 기도및설교 내용에서 대략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입니다.디조님의 방문 일지는 저에게 좋은 판단 자료가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눈물이 앞을 가림니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만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