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 朴氏 )의 유래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것을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英)이라고 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되고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 진원 박씨 등
-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 삼척 박씨 등
-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 고성 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 무안 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 춘천 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 이씨, 다음으로 제3위였다
<氏族의 연원>
시조 박항(朴恒)의 자(字)는 혁지(革之)이다.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올라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충주목사(忠州牧使)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하고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의 일곱번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10세손이다. 따라서 박언지를 중조(中祖)로 삼는다.
그가 충렬왕 때 왕을 호종, 元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이 되자 후손들이 춘천(春川)에 세거하면서 춘천(春川)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됐다.
<本貫地 연혁>
본래 맥국(貊國)의 수도인데 선덕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로, 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태조23년에 춘주(春州)라 칭하고, 성종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安邊府)에 예속시켰으며 신종6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같은 해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강등되었다. 태종13년에 춘천(春川)으로 고쳐 군(郡)이 되고, 1415년에 도호부, 고종25년에 유수군(留守郡)을 두었다. 1895년에 관찰부(觀察府)로 되고, 1895년 강원도 관찰사를 두었다. 1910년 도청소재지로 되고, 1917년 춘천군의 부내면(府內面)을 춘천면으로 변경, 1931년 읍(邑)으로 승격, 1939년 주변 6개 동을 병합, 1946년 부(府)로 승격, 1948년 춘천시(春川市)로 개칭,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 朴, 崔, 辛, 許. 金, 林, 尹씨 등이 있었다.
<주요 世居地와 변천>
춘천박씨(春川朴氏)는 일찍이 관향인 춘천에 터를 잡아 세거해 왔던 것 같다.
그러다가 6세 박영기(朴英奇)의 자손들이 양평(楊平), 충주(忠州), 청주(淸州), 제천(堤川), 중화(中和), 황주(黃州) 등지로 옮겨가 이들 지역에 산거(散居)하게 되었으며 2세 박원비(朴元庇)의 자손들은 예천(醴泉), 의성(義城), 상주(尙州), 울진(蔚珍)의 평해(平海), 영덕(盈德) 영해(寧海), 봉산(鳳山), 서흥(瑞興) 등지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1930년경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자손들은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강상면(江上面), 강원도 춘성군(春城郡) 일원, 춘천시(春川市) 일원, 경북 상주군(尙州郡) 모서면(牟西面), 울진군(蔚珍郡) 북면(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현재는 춘천(春川), 춘성(春城), 홍천(洪川), 인제(麟蹄) 등 강원도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氏族史의 개요>
춘천박씨(春川朴氏)는 평장사(平章事) · 판사(判事) 두 공파(公派)의 손(孫)이 14파요, 지금은 36세손까지 내려왔다.
그는 고려 고종조 내직(內職)으로 왕경(王京)에 있다가 몽고 대군이 安陽都護府(春川)를 급습하여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는 급히 고향에 돌아와보니 성(지금의 봉의산성(鳳儀山城)인 듯)은 함락되어 성 아래에는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였고, 공의 부모는 물론 일가족이 모두 학살을 당했었다.
그는 부모의 시체를 백방으로 찾아봤으나 끝내 찾을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부모의 모습과 비슷한 3백여구를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그 후 그는 어머니가 북경(北京)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까지 찾아갔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高麗史列傳'에 보면 온나라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가 부모의 모습과 비슷한 여러 구의 시체를 붇은 무덤과 향교를 짓느라고 그 위쪽에 있는 산소를 모두 이장했고, 또 일제 때는 지금 춘천 세종(世宗)호텔이 자리잡은 곳에 신사(神社)를 짓느라고 강제로 파헤쳐 지금은 온데간데 없이 돼버렸다.
춘천박씨 후손가운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높은관직에 오른 사람이 별로 없다. 그 까닭은 춘천박씨가 고려에 벼슬했던 사람의후손이라는 데서 조선조에서 기피했고, 또 후손들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싫어한때문이라고 후손들은 말한다.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년이 지난 고려 공민왕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이 그의 충효와 애국의 치적을 나라에 상소하여 내리게 한 것이다.
조선에 들어와서 춘성군(春城郡) 동면 감정리 구봉산(九峰山) 아래에 구봉서원(九峰書院)을 설치하고 공의 영령을 모셔왔는데 서원(書院)은 고종 때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당했다.
박정승묘(朴政丞묘, 속칭 머굴터 산소)로 불리는 그의 산소는 지금도 춘성군 신북면 발산리 수지동에 자리잡고 있다.
묘비와 재실(齋室)은 6.25동란 때 없어졌다.
그래서 지금 춘천박씨 문중에선 이를 연차적으로 복구할 계획 아래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지금 인제군 기린면 사무소 뒤쪽 태봉산(泰峰山)에는 박대감(朴大監)이라고 부르는 문의공(文懿公)의 맏아들 평장사(平章事) 박원굉(朴元宏)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묘소가 있다.
이 일대는 높은 산과 좁은 계곡으로 이루어져 항상 구름과 안개에 뒤덮여 본래는 '운무동(雲霧洞)'이라 불렸었다. 그러나 판사공(判事公)의 묘가 이곳에 자리잡은 뒤부터는 산천이 청명해지고 동네 사람들이 더욱 평안해졌다 하여 '청평(淸平)골'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문의공의 14세손인 박익(朴益)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옮길 때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 화살끝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위급함을 알려 구국의 충성을 다하였다.
또 그의 할아버지 박영(朴英)은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 그의 아버지 박언광(朴彦光)은 삼척진영병마절제사(三陟鎭營兵馬節制使)로서 3대가 국란에 봉사하고 전공이 뚜렷하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이퇴계(李退溪) 선생은 문의공 5대손인 사정공(司正公) 박치(朴治)의 외손자다. 그래서 퇴계(退溪) 선생은 가끔 외가가 있는 춘천에 와서 머물렀다.
그곳이 지금의 퇴계동 부근이며 '퇴계(退溪)'라는 동네 이름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춘천에 머무르는 동안 항상 밥상에는 '공지'(고기이름)가 반찬으로 올랐는데 '공지'라는 고기는 지금 남춘천(南春川)과 춘천(春川)시내 사이를 흐르는 냇물(지금의 공지천)에서 잡혔는데 공지천(孔之川)이란 이름도 이에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공지'라는 고기는 성인이 있는 곳에서만 사는 것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멸종되고 말았다.
문의공은 이역만리 중원(中原)에 사자(使者)로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더불어 애국의 충성과 고향생각을 달랠 길 없어 노상시(路上詩)를 지었는데 그것이 '춘천유림(春川儒林)들에게 보내는 詩'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박씨(朴氏)부인/춘천박씨, 퇴계의 어머니
퇴계의 어머니, 춘천박씨 부인은 고난의 일생을 살았지만 또한 영광의 일생을 엮어 나갔다. 고난의 일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6남1녀를 혼자 길러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느라고 고생이 막심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며, 영광의 일생을 엮어나갔다는고 하는 것은 퇴계와 같은 대학자를 길러 내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퇴계 연보(年譜)에는 그가 지은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묘갈(朴氏墓碣)을 인용해서 고생스러웠으나 영광스러웠던 생애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선군(先君)이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에 큰형이 겨우 장가들었고 그 나머지 어린 것들이 앞에 가득할 뿐이었다. 부인은 자식은 많고 일찍 홀몸이 되어 장차 집안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뼈아프게 염려해서 더욱 더 농사짓기와 양잠일에 힘을 써서 옛 살림을 잃지 아니하였고,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게 되자 간난한 중에도 학비를 내어 먼 데나 가까운데나 취학을 시켜서 매양 훈계하였으니, 무릇 문장에만 힘쓸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항상 재삼 간절히 타이르기를 세상에서는 보통 과부의 자식을 옳게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욕을 할 것이니 너희들이 남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비평을 면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것을 보면 선생은 비록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 학문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어머니에게 얻은 바가 많았다』 퇴계연보에 퇴계 어머니의 훈도가 퇴계의 생애를 절대적으로 결정했던 사실을 공인해 주고 있다.
퇴계가 8세였을 때 퇴계의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다쳤다. 퇴계가 형을 붙들고 우는 것을 어떤 부인이 말했다. 『너희 형은 손을 다쳤는데도 출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퇴계가 대답하기를 『형이 비록 울지 아니하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퇴계는 온순하고 공손하고 겸손하여 어른에게 태만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밤중에 깊이 잠이 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서 대답하기를 매울 겸손하게 하였다. 6,7세 때부터 그렇게 하였다고 했다. 그 품성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물론 어머니 훈도가 퇴계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퇴계는 어머니 춘천박씨의 내력을 묘갈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머니 박씨는 춘천이 고향이다. 고려말에 원비(元庇)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은 판사(判事)였다. 이 분이 광정(光廷)을 낳았고, 경상도 용궁현 대죽리(大竹里)로 이사하였으니 곧 어머니의 고조부 이다. 증조의 이름은 농칠(農漆)인데 현감을 지냈다. 조부는 효전(孝佃)이고 아버지는치(緇) 인데, 숨은 덕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어머니은 월성이씨로 생원 시민(時敏)의 딸이다. 대사헌을 지낸 승직(繩直)의 후손이다. 경인년 서기 1470년 3월 18일에 타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아리따웠으며 자라서 우리 아버지의 계실(繼室)로 들어왔다. 돌아가신 어버지는 뜻이 돈독하고 옛 것을 좋아하였으며 경사(經史)에 탐닉하였다. 또 과거공부는 곁일로 여겼으며 가사에 등한 하였다.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성심껏 섬기면서 조상을 받들었고 안살림을 근검으로 다스렸다.』어머니로서의 직분과 며느리로서의 직분을 이 이상 더 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하는데 부지런함이나 아랫사람을 대하는데 인자함이나 조선시대 여성의 그 표준이 되고 모범이 되었다.
32세에 홀로된 퇴계의 어머니는 남편의 3년상을 마치자 제사일은 맏이에게 맡기고 그 옆에 방을 지어 거처하면서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쳤다. 갑자년(연산군 10년, 1504)과 을축년(연산 11년)에는 부역과 세금이 혹심하여 많은 사람들은 살림 결단났는데도 박씨부인은 능이 먼 앞날을 내다보고 환란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옛 가업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고 했었다. 박씨부인이 손발을 걷어 붙이고 집안일을 경영하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었다. 집안 일을 경영하는 한편 자식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독려하고, 또 공부하도록 글방에 보냈다.
『여러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멀고 가까운 스승을 쫓아 공부하도록 학자금을 마련하였다. 언제나 훈계하시기를 다만 문예만 할 것이 아니라 몸가짐을 삼가는 것이 귀하다 하였고 사물에 알맞은 비유로써 가르침을 하였다. 언제나 간절히 경계하시기를 세상에서는 과부의 아들은 배움이 없다고 말하니 너희들이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웃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뒤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니, 어머니께서 영진(榮進)이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늘상 세상의 환란을 근심하였다.』고 퇴계는 기록하고 있다. 퇴계의 어머니는 글 공부나 과거급제를 단순히 출세로 보지 않고 인간됨의 길로 보았다.
실제로 퇴계는 사마시(司馬試·진사시험)에 합격한 뒤에 과거보는데 뜻이 없었다. 형 대헌공(大憲公)이 어머니에게 여쭈어 허락을 받고 퇴계가 과거에 나간 것은 32세 때였다. 이 해에 문과 별시의 초시에 2위로 퇴계는 합격했다. 퇴계 형제의 학문은 어머니의 독려와 뒷받침으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34세 되던 3월,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하여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휴가를 얻어서 시골집으로 내려와 근친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그런 아들이었다. 퇴계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긴다. 그 어머니의 모습이야말로 퇴계를 기르고 가프쳤고 성공시킨 장한 모습이었다. 『문자를 배운 적은 없으나 평소에 늘 들은 아버님의 정훈(庭訓)과 여러 아들이 서로 강습하는 것을 들어서 가끔 깨우쳐 이해하는 바가 있었으며, 의리로 비유하여 사정을 밝게 하는 지식과 생각은 마치 사군자(士君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만 지니고 있을 뿐 겉으로는 항상 조용하고 조심할 뿐이었다. 정유년(서기 1537년) 10월15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수는 68세였다.』
춘천박씨부인, 퇴계의 어머니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고있던 지식과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실천궁행케 했던데 있었다. 퇴계 어머니 박씨부인이 퇴계형제들을 교육한 방법은 외양보다 내실을 닦게 했고, 또 그것을 보통의 어머니로서 실천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는 또 다른 조선시대 여성의 교육의 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