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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잠언 강의 잘 들으셨습니까?
오늘은 예언서를 좀 보고자 합니다.
아마 한 강의 가지고는 안 될 것 같고 두 강의 정도로 나눠서 해보려고 합니다.
예언자를 우리들은 선지자라고도 같이 씁니다.
하느님의 대변자, 또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자,
하느님과 백성과의 진실한 인간관계를 바로 세우도록 가르치는 자,
미래를 예언하는 자, 이렇게 여러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서라고 불리는 부분에는 선지자들의 말과 행동이 수록되어 있지요.
보편적으로 예언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소위 4대 예언서라 하면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다니엘서입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미카,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 즈카리야, 말라키, 이것을 소예언서라고 얘기합니다.
소예언서와 대예언서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는 아니고요. 양적인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훨씬 분량이 많습니다.
그 밖에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라고 하는 위대한 예언자도 등장하지만,
예언서로 묶어놓은 이 책 안에는 그 선지자들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예언서에 보면 이렇게 많은 선지자들의 말과 행동에 관한 것이 적혀있는데,
아마 그중에서 읽기 쉽고 유머러스한 것이 요나서가 아니겠는가.
이 요나서는 각자의 신앙에 따라서 무한히 뜻깊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죠.
어느 날 선지자 요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 니네베로 가서 외쳐라. 죄악이 하늘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요나는 명령을 따랐습니까? 안 따랐죠.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타르시스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타르시스로 가는 도중에 그가 탄 배가 폭풍을 만나죠.
자기 때문에 폭풍이 일어난 것을 알고, 선원들에게 자기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폭풍이 뚝 그칩니다.
그러나 요나는 큰 물고기가 삼켰다가 나중에 토해냅니다.
그런데 요나가 떨어진 그 땅은 놀랍게도 니네베 성이었습니다.
니네베를 피해 도망칠 작정이었는데 니네베로 보내졌던 거죠.
‘하느님의 명령은 땅끝까지 도망쳐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가 첫 번째 교훈입니다.
하느님 명령에 순명치 않고 아무리 도망쳐 봐야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거죠.
부처님 손바닥이라 그러죠.
니네베에서 요나는 다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지리라.’
그래서 요나는 야훼의 말씀대로 니네베 성에 외칩니다.
이 니네베 성은 정말 큰 도시였고 크게 번성하였었죠.
그래서 멸망이라고 하는 단어와는 전혀 관계 없이 영원히 번성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많은 곳에는 악도 또한 만연한 겁니다.
그런데 요나 말을 안 들을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니네베 사람들은 겁에 질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단식하고 참회합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아,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람이나 짐승, 소띠나 양띠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 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마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 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은 모두 버려라.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를 멸하시려던 뜻을 돌이키실지 아느냐?’
니네베 성이 전부 다 일어나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
니네베 성을 멸망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거두셨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제 니네베 성을 멸망시키려다, 왕을 비롯해 모든 백성이 정말 마음 깊이 회개하고 통회하는 것을 보고
그 벌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고 요나는 몹시 화가 많이 납니다.
왜냐? 자기가 예언한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예언하고 외친 그대로 니네베가 멸망해야 하는데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지자로서 수치스러웠던 겁니다.
그러니까 화가 났던 거죠.
그러면서 요나는 야훼께 ‘내 이럴 줄 알았어.’ 하면서 투쟁하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초막을 짓고 그 그늘에 앉아 장차 성읍이 어찌 되는가 볼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야훼께서 멸망시키는 것을 거뒀다고 하는데, 아니야 멸망시킬 수도 있어, 어찌 되나 보자.’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으로 초막 밑에 앉아서 니네베를 쳐다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햇볕이 내리쬐어 무척 무더웠죠.
그때 하느님은 요나를 위해서 아주까리를 밤새 키워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들 아주까리가 뭔 줄 아십니까?
저도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아마 박넝쿨 같은 종류가 아닐지 생각합니다.
아무튼 아주까리 그늘을 만들어서 아주 시원하게 첫날을 지내게 하죠.
그런데 또 그다음 날 어떻게 됩니까?
벌레들이 들끓어 아주까리 이파리를 다 갈아 먹고 땡볕을 쬐게 합니다.
그리고 열풍을 불게 해 더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하십니다.
이렇게 시원했다가 벌레한테 당하고 또 뜨거운 햇볕에 당하고, 이런 것을 맛보게 합니다.
야훼 하느님이 자기를 마치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요나는 죽고 싶어서 뭐라고 그럽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투덜거리죠.
그때 하느님이 요나에게 타이릅니다.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른다고 나옵니다.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될 말이냐?’ 하니 요나가 대답하죠.
‘어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하고 야훼께 대답합니다.
그때 야훼가 하신 말씀은 참 감동적입니다.
‘요나야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워하느냐?
네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저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이 말을 듣고 난 다음에 그제야 요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아예 하느님의 말씀 선포를 거절하였죠.
그래서 배를 타고 도망쳤던 겁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을 거절하는 모습은 특별히 요나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요.
성서 읽어보면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말씀 전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선지자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 성서 첫 번째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도 야훼께 명령받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해서 데리고 나와라.’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아주 쉽게 ‘네, 제가 하죠.’ 이랬겠습니까? 아니죠.
모세 입장에서는 목동으로 장가가서 아무튼 잘살고 있는데 다시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하니까 될 법한 얘기겠습니까?
그리고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놈이었죠.
다시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나오라고 하니, 결코 그 입장이면 누구라도 쉽게 대답할 수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누구길래 파라오에게 갑니까? 그리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해서 끌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강하게 거절하는 것이 모세의 첫 번째 반응이었습니다.
뒷걸음치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아마 내가 가도 이집트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절대 믿지 않을 것이고, 내 말 듣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모세 너한테 하느님이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고 분명히 얘기할 겁니다. 그러니 내가 간다고 그 일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하죠.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나타나셨다는 표징으로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힘과
손이 문둥병에 걸리게도 하고 또 고치기도 하시면서 모세에게 무엇이나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도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주님 저는 본래 말을 잘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여전히 제가 말을 잘 못하니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것이 바로 제 처지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이제 자기 말을 못 한다, 이거죠.
안 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이렇게 뺀질뺀질 말 안 듣는 모세에게 야훼는 인내심을 갖고 또 얘기하죠.
‘모세야,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나 야훼가 아니냐,
그러니까 나만 믿고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같이 있을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도 모세는 뭐라고 그럽니까?
‘주님 저 말고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이렇게 거절하면서 나중에 하느님의 질책을 받죠.
여러분들 지금 제가 얘기한 것을 성경 읽으시면서 유심히 살펴보셨습니까?
아무튼 안 가려고 별의별 핑계를 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도 아무튼 야훼는 인내심을 갖고 모세에게 명령조가 아니라 설득하고, 타이르고,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어린애 같은 모세를 이해시킵니다.
또 그다음에 또 유명한 예레미야도 비슷하죠.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너를 나는 선택하였고 구별하였고, 너를 이방인의 선지자로 내가 내세웠다.’
이런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예레미야는 뭐라고 그럽니까?
‘야훼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릅니다. 어떻게 말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모세처럼 선뜻 ‘네’ 하고 순명을 첫 번에 못 합니다.
아마 모세, 예레미야, 요나, 이들이 느꼈던 공통적인 곤혹은 어느 선지자도 겪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왜 이런 선지자들이 하느님의 말씀 전하기를 주저하였을까?
그리고 회피하고 두려워하였을까?
여러분 생각에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그 입장이라면 무엇이 제일 두려웠겠습니까?
책임감 때문이죠.
너무도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었던 거죠.
하느님의 말씀을 중재한다는 것, 중개한다는 것은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두려움이 커지는 겁니다.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미친놈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또 조소를 받기도 하고,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증오를 당하죠.
바른 소리에 귀가 거슬리는 사람들은 바른말 하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동료에게조차도 우리는 충고받으면 기분 상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에 대해서 선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가도 없이 중개해야 합니다.
선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제사장들과 왕자들을 벌할 것이다.’ 이런 예언을 합니다.
아모스는 ‘궁궐들을 불사르리라.’
또 에제키엘은 ‘내가 너를 칠 것이고 전무후무하게 벌을 내릴지라.’
이런 등등의 선언을 해야만 하는 것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말들을 듣고 왕이나 관리들이 분노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
그리고 포악하면 포악할수록 이런 말을 듣고 격분할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선지자들의 대다수가 최후에는 살해당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상숭배에 저항하고 못된 왕을 향해 맹렬히 경고한 엘리야는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죠.
또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진 자도 있었고,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일 등등,
성서 안에는 선지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겪는 상상도 못 할 고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선지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들의 삶을 보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야훼가 명령을 내릴 때 주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언서 첫 번째 강의는 이 정도로 하고, 다음 주 수요일 예언서를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다음 주 수요일까지 예언서를 좀 한번 쭉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팍팍 꽂히는 게 있으면 형광펜 같은 걸로 줄을 쫙쫙 그어놓으시면,
나중에 성경을 휙 보다가 내가 줄을 그어놓은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신부님 강의 들으면서 내가 예언서 정독하면서 와닿았던 것이었구나, 이렇게 생각이 나겠죠.
아무튼 여러분들 주일 잘 지내시고 이제 벌써 6월을 맞이하죠.
벌써 1년의 반 문턱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저도 6개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건강하시고, 여러분들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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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