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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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나무라셨다. (루가 19,45-48)
Jesus entered the temple area and proceeded to drive out those who were selling things, saying to them, “It is written, My house sha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thieves.”
말씀의 초대
박해에 항거하던 마카베오 가문의 형제들은 이교 제사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새롭게 봉헌한다. 기원전 164년 12월 14일에 벌어진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에서 ‘봉헌’이라는 뜻의 ‘하누카’라고 불리는 큰 축제로 기념하고 있다(제1독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다. 성전의 용도를 왜곡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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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 가운데 어디를 가장 많이 찾으실까요? 하느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르시는 곳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당신을 간절하게 찾는 곳’이 아닐는지요? 성당 안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을 찾는 간절함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길거리일지라도 그곳에 하느님을 절실히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장사하는 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집에 대한 용도를 왜곡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집에서 소외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더럽혀진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이스라엘은 많은 희생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지는 상황 속에서 엘아자르라는 율법 학자가 희생당했고,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 그들을 따르는 유다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전을 정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장사치들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시고 날마다 가르치시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기로 작정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요컨대, 오늘 말씀에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려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시 성전에서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장사치들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성전에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으시는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까?
바게트(baguette) 빵을 아십니까? 프랑스빵의 일종으로 길고 딱딱한 원통형의 하드 타입 빵입니다. 고소한 맛에 사람들이 즐겨 먹는 빵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그렇게 즐겨 먹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빵을 먹다가 입천장이 벗겨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빵을 먹는 방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딱딱한 부분은 혓바닥 쪽으로, 그리고 부드러운 부분은 입천장 쪽으로 두고 먹으면 입천장이 다치지도 않으면서 빵의 본래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냥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먹으면서 ‘입천장을 다치게 하는 질기고 딱딱한 이 빵을 도대체 왜 먹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동시에 이제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평과 불만이 다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렇게 빵 하나도 먹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방법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요? 방법도 모르면서 또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불평불만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런 행동을 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고 또한 예수님을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군인신학생이 휴가를 나왔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년 사이에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의젓해지고 말 하는 것도 많이 자신감이 생긴 것 같더군요. 이렇게 1년 사이에 바뀐 이 군인신학생을 보며, 저는 과연 1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그 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었고, 그럼으로 인해 내 자신을 얼마나 변화시켰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성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가리키시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평불만만을 일삼으며 사는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 끊임없이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러셀).
우리 마음의 성전
-안승태신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시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그러한 성전에서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 마음에 흡족한 제물을 바쳐드려야 한다는 여러 율법 규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과 동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로 성전 마당은 여느 시장을 연상하게 되는 풍경이었을 것이고, 세속적인 속임수도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장사치들의 거짓됨을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시기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매주 또는 매일 미사를 드리는 성당에만 머물러 계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어 주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성전은 외적인 건물이 아닌 내적인 우리 마음, 우리의 일상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예수님의 꾸짖음을 들었던 예루살렘 성전처럼 우리 마음의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거처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욕정과 탐욕이 가득한 마음이라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려는 침묵의 태도 안에 주님의 성전은 아름답게 우리 안에서 지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실종될 때 강도의 소굴과 똑같아진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그 소굴은 종종 정의로운 곳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문명’이라는 착각도 마찬가지다.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현대 문명과 세계체제가 근본적인 벽에 부딪혔다고 말한다. 정의를 가로막는 것은 이제 가부장제와 성차별, 인종차별, 인권 경시, 빈부 격차 뿐만 아니라 군비경쟁과 군수 무역, 불공정 무역, 거대 기업의 독점과 횡포다. 또 속도와 팽창만을 앞세우는 경제성장과 행복관이 강도의 소굴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더 잘 보게 된다. 특히 비서구세계에서 이러한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 평화를 정의의 열매라고 말씀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열매가 우리의 일상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국제체제를 정의롭게 개조해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세계와 문명의 전환은 오늘날 지구촌 정의 구현의 첫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 힘든 여정의 첫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까? 아픔을 아는 사람들, 고통의 현장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통의 공유가 정의구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통해 연대를 이끌어내는 원천이 바로 슬픔이다. 슬퍼하는 마음 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연대할 수 없다. 서로 깊이 연관된 세계에서 나 자신이 진정 홀로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면, 이 세계의 슬픔은 끊임없이 나와 우리를 만들어 내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슬퍼하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고통은 나눌수록 줄기도 하지만 나눌수록 힘과 자유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귐은 적고 일이 너무 많다.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셨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바뀌었다고 분노하시며 정화를 하십니다. 그리고선 성전을 차지하시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주님을 없애려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뭐가 뒤바뀌어도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수석사제들은 없애야 할 잡동사니들은 놔두고 오히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주객을 뒤바꿔놓는 것은 백성의 지도자와 수석사제들만이 아니라 저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선물 받은 꽃다발을 제 방에 갖다 놓으려다 제 방이 아니라 성당에 갖다놓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성당 제대 앞에 꽃다발을 갖다놓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갸륵하다는 생각이 한 편 들면서도 다른 한 편 뭔가 더 중요한 것을 빠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뭘까 생각해보니 꽃은 성당에 갖다놓고 저는 성당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꽃을 봉헌한 것 분명 저의 기도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성전에 주님과 꽃만 있고 제가 성전에 없다니, 그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저는 꽃을 갖다놓은 것으로 기도를 다했다고 하고는 꽃에게 ‘이제 네가 내 대신 주님을 모셔라.’고 하는 듯하였습니다. 성전에 물론 주님이 계시고 꽃도 있어야지만 저도 꼭 있어야 하지요.
그래도 이것은 낫습니다. 어떤 때 제 마음성전은 이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제 마음성전에 주님이 아니 계십니다. 주님 대신 잡동사니들이 있으며, 어떤 때는 기도와 헌신의 영은 없고 온갖 계획들과 근심 걱정들만이 가득합니다. 기도와 헌신의 영이 없기에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 대신 성전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잡동사니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니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은 밀어내고 잡동사니를 끌어들인 겁니다.
주님과의 만남이나 사귐은 적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 마음속 성전
- 김수만 신부-
가끔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냇물은 흐르기 때문에 큰 강이 되고 큰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담아내고 또 비워낼 줄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쉽게 안주하려 합니까! 또 얼마나 쉽게 나태함과 교만에 빠지게 됩니까! 잠깐 쉬어갈 수 있지만,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희망을 되새기면서, 계속해 그 큰 바다로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강물을 닮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십니다. 왜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렸을까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이익에 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예수님은 볼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되게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가 오늘 우리의 마음 안에도 일어났으면 합니다.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어떤 영양분이 더 좋은지가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군가를 위해 내 몸은 과연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그리고 머리에게 물어봅니다. 아파트 평수, 통장의 돈, 자동차 배기량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자신의 가슴에게 물어봅니다. 세상의 것을 얼마나 품고 살아가는지가 아니라 어떤 감동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깃들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이 ‘현재 진행형’인지 아니면 ‘현재 완료형’인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내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하느님을 마음과 중심에 두고 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집착·이기심·명예·탐욕 등은 그분께 맡겨드리고, 당신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마카베오 항전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성전 재건과 수호를 통해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주님이 머무시는 성전과 우리 마음의 성전에 큰 사랑과 노력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가 내 마음의 성전에 하느님 사랑이 가득 들어찬, 기쁘고 즐거운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능동적인 신자
-안문기 신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성전에서의 상행위와 환전행위 등을 비판하셨습니다. 당시 제관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합법적인 권한이었는데 그 안에서 비리와 부정부패가 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행위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성전인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관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청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 사람은 우선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당에서 드리는 최고의 찬미와 감사제는 미사입니다. 성경을 알고, 능동적으로 미사 전례에 참례하면 비록 성당에서 지상의 전례에 참례하고 있지만 천상의 전례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몰아내야 할 것들!
-김찬선신부-
저는 성가를 즐겨 부르고 부를 때 가사를 많이 음미하며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가사들에 대해 가끔 시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사의 그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나의 생명 드리니 모두 받아주소서.”하는 가사에 대해 생명이 과연 나의 것인가 하고 시비를 걸고, “내 마음은 주님이 지어내신 작은 궁전”이라는 가사에 대해서는 “주님이 계시면 다 큰 궁전이지 작은 궁전이 어디 있어!” 하고 시비를 겁니다.
사실 궁전이 궁전인 것은 외양이 크고 재질이 고급이어서 궁전인 것이 아니라 임금님이 머무시기에 궁전인 것입니다. 궁전의 본질이 임금님이라면 성전의 본질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껍데기는 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런 면에서 너무도 과격하셔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이 산이다, 예루살렘이다’ 하고 예배드릴 때 어느 특정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고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영적으로 어디든지 자유로이 계시니 어디서고 영적으로 예배를 드리면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주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과 사람들에 대해 오늘 왜 그렇게 분노하시며 치워버리셨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런 생각과 태도에 대해 주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신 것이지 예루살렘 성전이 필요 없다고 부정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 장소로 삼지 않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성전이 아닌 곳에서도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드려야 한다면 성전에서는 더더욱 영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성전의 본질이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영적으로 예배드리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다 허접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성전에 하느님은 아니 계시고 허접스런 다른 것들이 성전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불교에서 경전이 집착하게 하면 경전을 태워버리듯 하느님보다 더 집착하게 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가린다면 그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성화와 성상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꽃 장식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촛대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도 치워버리니 성전을 복마전으로 만드는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전에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패거리 짓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성전을 사교장으로 만드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성전을 자기 활동 무대로 만드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성전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탐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근심걱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허영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수없이 많은 계획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What else?
마음을 깨끗이
-전삼용신부-
오늘 대전교구 유 라자로 주교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대학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 동정 부부 순교자인 유정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두 성인은 서로 명문가와 부잣집에서 태어나 첫 영성체를 하며 그 깨끗한 마음을 오롯이 그리스도께만 드리기로 서원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 것을 처음부터 결심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문가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수치였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님께서 혼인을 주례하시고 두 사람은 서로 오누이로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10번 가량 동정을 잃을 위기가 닥쳤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서원을 지킬 수 있었고 서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이 두 분은 동정의 순결함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함과 동시에 부부로서의 인간적인 사랑 또한 지니고 살았던 보기 드문 케이스의 분들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박해 상황이 아니니 이런 혼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 참다운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임을 삶으로 보이신 분들입니다. 이순이 루갈다 성녀는 14세 때 첫영성체를 하고 정결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으며, 20살에 순교하였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의 옥중 편지는 항상 어머니와 누이들을 걱정하는 말들뿐이었습니다. 휘광이가 그녀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스스로 옷을 벗고 칼을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든 것들이 영원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주교님은 단순한 교리만 배웠지만 이러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던 한국의 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보면 많은 신학을 배웠으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시는 당신 자신이 부끄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 곳에 함께 참석하였던 신학을 배우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순교자들은 단순한 교리만 가지고도 그렇게 큰 믿음을 지닐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많이 듣지만 이유는 바로 땅에 있을 것입니다. 씨는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그 열매는 서로 다르게 맺혀집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풀 위에 내린 똑 같은 아침 이슬이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이단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인들이 잡으려 하였지만 군중들 때문에 잡지 못하였고 당신이 사랑하시던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배반함으로써 잡히시게 되었습니다. 그 유다도 배우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뱀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만 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의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우리 각 개인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사시고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이 안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운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안다고 교만해진다면 공부를 포기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배우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올바른 의도를 지녔다면 다시 시작해도 됩니다. 그러나 무작정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공부만 한다면 영리한 악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중요한 손님이 오실 때 안 쓰던 커다란 상을 꺼냅니다. 잘 보관해 놓아서 먼지도 없는 것 같은데 음식 그릇을 놓기 전에 먼저 행주로 상을 닦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면 정말 더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세한 먼지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릇을 놓은 다음에 닦는 것은 더 어렵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미사 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미리 죄의 고백을 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닦아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기도 해야 합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성전이>
-양승국신부-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구나" 하고 나무라시는 예수님의 질타를 묵상하면서 참된 성전이란 과연 어떤 성전이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대성전은 기본이고 몇 개나 되는 부속성전, 친교의 공간, 휴식공간, 기타 서비스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진 성전 역시 좋은 성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짱짱한 음향설비는 물론이고, 사방이 휘황찬란한 고가 예술품으로 장식된 품위 있고 고상한 성전 역시 기도하는 분위기가 나는 좋은 성전이겠습니다.
매주 수 만 명이나 되는 미사참례자들이 줄을 잇고, 매주 수 천 만원의 거액이 오고가는 초대형 본당 역시 좋은 성전입니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조건들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한 성전이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 각자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거나 열악할지라도 기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진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참된 성전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 복음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복음을 몸으로 직접 살려는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한 봉사와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곳, 구성원간의 상호 원활한 의사소통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복음 정신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나눔이, 이웃과의 사심 없는 빵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참된 성전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편적인 인류애가 구현되는 공동체, 인간 중심의 육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영적인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자신의 욕구나 의지대로만 살지 않고 이웃의 의지,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생활 전체를 맡기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들의 존재 자체, 삶 자체로 선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 각자 각자가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로 서고자 염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그러자 환자가 온몸을 찌르며 대답합니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아무래도 제가 죽을병에 걸린 것 같아요.”
한참 이것저것 검진하던 의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손가락 끝이 약간 삐었을 뿐입니다.”
아픈 손가락을 건드리면 온몸이 아픈 듯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즉,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삐딱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온통 삐딱하게 보이고, 또 반대로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세상으로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바라보는 것이 당연히 내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숫자만 봐도 잘 알 수가 있지요. 그 숫자가 1만 3천여 명에 달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거의 3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혹시 이 순간에도 자살을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은 아니겠죠?). 이런 현상은 우리 마음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말씀에 가슴이 아파옵니다. 주님의 성전이 되어야 할 내 마음을 정화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 또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기도하는 집, 즉 주님을 소중히 모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모실 때, 행복도 역시 함께 우리 마음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군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렇게 거대한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음... 저렇게 크니 절대 빗맞을 일은 없겠다.” 긍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마세요.
내적 성전 관리
-이승준 신부-
하느님께 찬미와 경배를 드려야 하는 성전이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는 요한 복음에서는 그분의 행동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에 따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요한 2, 17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성전이 본래 가져야 하는 신성함과 경외심을 가지기보다 자신만의 이익과 안위를 얻으려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과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 19) 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작은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얼마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잃으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예수님의 질책을 받게 되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쁜 세상을 살면서도 주님을 잊고 나만의 안위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께 의탁하는 삶, 짧지만 진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이들
- 원영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나라를 가나 중세 이래 건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문화유산의 풍요로움을 실감할 수 있다. 관광객다운 호기심 충족보다 성지를 순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경외심을 새롭게 하는 은혜로운 경험을 한다. 열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는 그림 같은 마을에 십자가 첨탑을 높이 세운 교회가 긴 세월 동안 이정표이며 구심점이었음을 본다. 큰 도시의 대성당은 너른 광장을 앞에 펼치고 우뚝 솟아 시민들의 자긍심을 북돋우며 위용을 자랑한다. 성화와 조각상 등 예술 작품을 품은 다양한 양식의 건축이 날렵한 현대식 건물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어우러져 있다. 그 고풍스런 자태 속에 위대한 신심 표현이 이어진다. 그런데 막상 육중한 성당에 들어서면 미사시간에도 신자들보다 두리번거리는 관광객이 더 많아 주객이 뒤바뀐다. 성당이 개신교 예배당으로 바뀐 건 그럴 수 있다 싶지만 대부분 도서관이나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현실이다. 심지어 성당 내부를 개조해 나이트클럽으로 탈바꿈한다니 서구 사회의 세속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벗어나고 있는 오늘의 유럽에서는 지난날 찬란하게 꽃피웠던 신심이 역사를 등지고 쇠락하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랄한 꾸짖음을 듣는 유다인들의 폭력적 위선은 이 시대 서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신심의 황폐화보다 증상이 더 심각한 듯하다. 하늘의 선택받은 백성이란 자부심을 가진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팽개치다 못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니! 성전이 거룩하다는 것은 건물의 웅장함이나 장식의 아름다움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 말씀과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모인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등한시하는 세속화의 현장이 될 유혹에서 과연 자유로운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몰아내고 세상 권력으로 지배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칼날 같은 틈을 엿보고 있다. 마음을 열어 예수께 집중하는 일만이 우리가 그분을 지켜드릴 수 있는 길이다. 성전을 가리켜 ‘기도하는 집’이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장소는 어디나 성전이 될 수 있다. 유럽 여행 도중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심성당(Sacre Coeur)을 밤늦게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아름다운 성당 안에서 은은한 촛불 빛을 받으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영혼을 들어 올려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 된 듯 깊이 빠져 있는 모습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참된 기도의 힘으로 성전을 밝히는 신앙인들이 있는 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구원의 사명을 다하게 되리란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쇠약해가는 서방 교회는 외적인 모습일 뿐, 그 너머에 성전을 지키는 이들의 믿음을 하느님은 보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날마다 날마다
-장재봉신부-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그른 길을 그르다고 선포하며
속지 말 것을 당부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그리고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날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었음을 밝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마음에 감동을 받는 무리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도리어 역행하는 무리가 있는
이 아이러니의 소용돌이는
지금 세상에서도 여전합니다.
과연 자신의 자리는 어느 쪽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구성정보가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단답형의 답을 알려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근본이
인간이 느끼는 절망적인 삶의 문제에 있는 까닭이라 싶습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답은 하나 일 수 있다는 뜻이라 짚어봅니다.
모세가 홍해를 만났을 때에는 물이 많아서 문제였지만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는
오히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삶의 들쑥날쑥한 문제이며 고민이 아니겠는지요?
인생이 겪는 숱한 난관들이
미궁처럼 혼미하고
미로처럼 복잡할 수 있지만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고
참을 알고 따를 수 있는
‘가치의 확신’이 필요한 이유이리라 믿습니다.
+++
사도 요한이 하늘의 천사에게 받아먹은 말씀은
입에서 꿀같이 달콤했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일이
너무 너무 행복하고 달콤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쓰고
아프고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날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주님께서는
쓰고 아프고 괴로운 처지야말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위대한 과정이라
이르십니다.
당시 기득권층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 응징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날마다 날마다 ‘속지 마라’고 이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듣느라고
날마다 날마다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는 우리들이
세상을 지킵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아멘
기도는 곧 성전 정화
-김찬선신부-
어제 저의 말씀 나누기에서 오류가 있었음을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대목이 한 곳 뿐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도 눈물을 흘리셨지요. 정정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론하는 것이 그래서 겁나고 더욱이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참으로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지식상의 오류를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그릇되는 것이겠지요. 성전이어야 할 내가 복마전이 된다면 그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성전(聖殿)과 복마전(伏魔殿). 이것이 갈리는 것은 껍데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속 내용에 의해서입니다. 건물의 재료를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건물의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주님께서는 그 돌들이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 예언하십니다(루카 21,5-7). 재료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써 성전을 잘 지었어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으로 성전이 가득 차 있다면 파괴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성전 청소를 하지 않으면 성전 파괴는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은 성전 청소를 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잡다한 물건들은 깨끗이 치어지고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집, 머무시는 분과 데이트가 이루어지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성전의 정화입니다. 그런 다음 깨끗해진 성전에 주님을 모셔 들임입니다. 날숨, 들숨과 같습니다. 날숨으로 내 안의 모든 악령적인 것을 토해내고 들숨으로 내 안에 성령을 들이키는 것, 이렇게 하느님을 숨 쉬는 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성전정화 사건 -홍금표 신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중 하나가 선거입니다. 그러나 과거 비자금 정국을 보면 선거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좀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의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가지는 많은 문제가 선거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돈 문제만이 아니라, 결과를 우선하는 가치관의 혼란, 법과 규정 보다는 집단의 힘과 큰 목소리가 우선하는 모든 것들이 선거와 무관치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차단된 상태에서의 선거란 좋은 이상이겠습니다만,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때 우리가 좀 더 발전된 사회를 위해서는 뭔가는 모르지만 이러한 부정적 모습을 차단하면서 선거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대중 투표가 아닌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제도 보완을 검토해야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정화 사건을 전해 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만 들어가는 이스라엘 마당과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방인 마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고 환전상들이 있던 장소는 이방인의 마당이었습니다.
여기서 상인들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환전을 해주었는데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한 점이 있는 제도였습니다.
첫 번째 편리한 점은 순례자들이 먼 곳에서부터 살아있는 제물을 가져 올 필요가 없이 가까운 곳에서 제물을 구입하여 봉헌할 수 있기에 이는 경제적 시간적으로도 매우 편리한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환전도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당시 통용되던 로마은전과 그리스 은전에는 인물상과 황제 숭배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성전세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은전인 세겔로만 성전세를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유일신 신앙을 지켜 갔고, 이러한 결과가 환전이 필요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전과 상행위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두 가지 모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행위와 환전 자체에서 오는 어두움입니다. 환전과 상행위의 이면에는 이익창출이라는 마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익창출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요, 인간 삶의 필수 불가결한 무엇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익이라는 면만이 강조되고 여기에 자제되지 않은 인간의 욕심이 가세할 때 너무나 많은 폐해가 발생합니다. 이익만을 탐하는 자리에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과 신심이 차지할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검은 관계입니다. 성전에서 장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허가받은 자들의 몫입니다.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임대차와 관계하여 검은 돈들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오가게 되고, 또 사제들과 성전관리자들은 성전시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구입한 예물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적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전 시장의 독점을 가져오게 만들고, 검은 공생관계에서 얻어지는 이득은 검은 거래의 당사자들이 나누어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전과 성전시장은 편리와 실용이라는 그럴싸한 포장 뒤에 인간의 물욕과 검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부정부패의 장소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질타하고(마태 21, 13)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배경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상행위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이기심과 간사함에 대한 경고요 동시에 인간이 가지는 끝없는 욕심으로부터 성전을 정화하여 성전이 가지는 첫 의미의 회복,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구원을 체험하는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전의 본 의미를 회복하고 싶은 당신 열정의 표현입니다..............◆
새벽을 열며
할머니와 손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자가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를 부릅니다.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손자에게 조용히 말씀하세요.
“얘야,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먹어야 한단다. 밥 먹을 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복이 달아는 거야.”
그리고는 계속해서 조용히 식사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손자도 할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했지요. 식사 후 할머니가 묻습니다.
“그래. 아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이니?”
손자는 아깝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합니다.
“이미 늦었어요. 할머니 국에 파리가 빠졌는데 이미 할머니 뱃속으로 들어갔어요.”
어른은 아이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요. 그러다보니 아이들 앞에서는 항상 자신의 지혜로움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처럼 항상 어린이보다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어른도 한 명의 인간으로 실수할 수 있고, 어리석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지혜가 느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고집만 느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허락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에 흠집이 났지요. 또 한 가지는 장사를 허락함으로써 거둬들였던 물질적인 이익을 더 이상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이 무서워서 차마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없앨 방법만 함께 모여 찾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없앨 방법만 찾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선 이야기처럼 참된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고집만을 내세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와 고집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들지요.
우리 역시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즉, 사람들에게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위와 고집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달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현대에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입니다.
내가 드러내려고 하는 권위와 고집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제는 그 권위와 고집은 조용히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세우고 있는 권위와 고집은 무엇입니까? 조용히 내려놓으세요.
빠다킹신부
하느님과의 소통
-서현승 신부-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고 할 때, 그?소통 안에는 입으로 하는 말뿐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몸짓, 분위기 등이 포함되곤 합니다. 실상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상대는 말 없는 것 자체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대화를 하지만 서로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머무는 경우도 있을 테고, 혹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상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심전심의 소통 또한 있을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모든 소통의 관계 안에는 서로간의 마음이 열려 있느냐 없느냐에 있겠죠. 하느님과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를 향해 열려 계신 하느님의 마음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도이겠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십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온갖 거래와 모략들을 일거에 제거하시는 예수님의 분노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얼마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기도할 때는 사실 내 청을 아뢰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성전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을 열고 내 삶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럼으로써 알아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그분의 ‘표현’들을 하나씩 내 삶 안에서 깨우쳐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삶의 성전인 것입니다
나의 집
-정애경 수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 치시는 모습을 전해 준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는 동안 제물로 바칠 짐승한테 상처가 생기면 상처 나지 않은 짐승과 교환하기 위해, 또는 미처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로마 돈을 성전화폐로 바꾸어야 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환전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익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성소를 지배하게 되었고 성전에서 물건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사장과 짜고 물건을 파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제사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장사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좋은 마음과 선한 동기로 시작한 일을 이해관계로 그르친 적은 없는지, 탐욕에 눈이 멀어 더 큰 욕심을 부린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내 마음의 성전은 어떠한가? 나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사는가? 혹시 내 마음 안에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이기심, 명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이제는 주님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도록 자리바꿈해야겠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신 후 백성들을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며, 악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ㄴ)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성전
-최금자-
나는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서 구절을 읽으면서 두 성전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나는 바티칸 교황청이 있는 널따란 베드로 광장을 지나 처음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웅장함과 경건함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대리석으로 지은 성전은 긴 세월에도 변함없이 웅장한 자태를 지니며 기나긴 교회사의 사건을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성전 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 예수를 가슴에 안고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피에타 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그리고 성전 여기저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순례객들을 보면서 이곳이야말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최근에 읽은 「나가사키의 노래」에 등장하는 우라카미 성당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방사선과 의사이며 그 자신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린 나가이 다카시는 성전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우라카미 성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삼종기도를 바치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원폭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는데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믿음을 지녔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사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성전이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격려하십니다.
교회의 희망
-백광현 신부 -
1998년 여름 파리 세계 청소년 대회 때 어떤 신문 기자가 한 젊은이에게 “당신은 왜 파리에 갑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젊은이는 “교황님을 만나러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는 “당신의 교황은 저렇게 늙고 지치고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매력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갑니까?” 하고 묻자, 젊은이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갑니다. 교회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를 만나기 위해서 파리에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속화된 세상은 교회를 없애 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내놓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교회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이세형 신부-
형제자매 여러분, 불굴의 의지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제가 인사말에서 불굴의 의지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가슴에 불덩어리를 지니고 사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불덩어리와 인간을 사랑하는 불덩어리입니다. 저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저를 구원하시는 주님인 동시에, 제가 본받으며 살아가야 할 인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소망을 헛되게 만든 영적인 눈멂으로 고생하였습니다. 이미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아 예언자에게 하셨던 말씀이 마음을 두드립니다. “너는 나를 우습게 여겼다..... 너는 등을 돌리고 나를 떠나갔다가 내 손에 맞아 죽게 되었다. 너를 불쌍히 보아 주는 것도 나는 이제 싫증이 났다.”(예레 15,6)
예수님은 곧장 성전으로 들어가셨는데, 성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목적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누리는 특권의 모든 것은 시온산 위에 있는 성전 덕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십니다. 요한복음은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합니다.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쫒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꾸짖으셨다.”(요한 2,15-17)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거래상들과 이 거래를 허용하고 그럼으로써 이익을 챙기는 유대 당국자들은 성전을 “도둑의 소굴”(예레 7,11)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써뿐 아니라 특히 행위로써 예언자들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 날이 오면 다시는 만군의 야훼의 전에 장사꾼이 있지 못하리라.”(즈가 14,21)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그 올바른 자리로 되돌려지고 재물을 섬기는 일이 배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로 인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하느님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 중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신 분이 있습니다. 윤지충(바오로)입니다.
윤지충(바오로)은 당시 전라도 진산군(현재 : 충남 금산군 진산면) 출신의 유학자로서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과는 외사촌 사이였습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였다는 죄로 그의 먼 일가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사형을 받게 되면서 당시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고 조선후기의 역사에, 그리고 한국천주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상의 제사를 금한다는 것은 초기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엄청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유교적인 윤리와 관행을 끊는다는 것은 효도를 가장 기본적인 윤리로 강조하던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대부분 신자들은 제사를 포기하기보다는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대로 윤지충(바오로)에게도 선택을 강요하였습니다. 그에게 신앙을 권유하였던 외사촌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도 이미 교회를 떠났으며, 이승훈과 그 외의 중심인물들도 그러했습니다. 윤지충(바오로)으로서도 천주교 신앙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그도 커다란 갈등에 빠졌었겠지만 그래도 윤지충(바오로)은 신앙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명령대로 부모님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처럼 그가 제사를 폐하고 신앙을 선택한 행위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의 행위였으며, 부모에의 효성을 나라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하였던 당시에는 반역의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윤지충(바오로)는 1791년 음력 10월경에 체포됩니다.
유림에서는 그를 사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파격적 행위가 국가적으로 큰 물의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그들은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있었지만, 정작 윤지충은 조금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윤지충(바오로)는 전라 감사 정민시의 문초에 응하여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천주를 공경하고 높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사대부 집안의 나무로 만든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죽을죄를 얻을지라도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 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사대부가 아닌 서민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도 엄히 금하는 일이 없으며, 가난한 선비가 제사를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물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이며 나라의 금법도 어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윤지충(바오로)이 전통적인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로서도 무척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으로 그가 사형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가족과 친지들과 이웃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하였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 결정 하나로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도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신앙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윤지충(바오로)은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상 세상의 법과 천주의 법이 정면에서 상충될 때 천주의 법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증거자였으며, 그 대가로 그는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제사문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의 가르침 가운데 그 어떤 요인들이 윤지충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을까?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땅에서 만큼은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쉽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해서 윤지충(바오로)처럼 극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기로 결단을 내렸으면서도, 이전의 나와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런 신앙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제사문제가 일단락되었지만, 그 대신 지금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서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과의 결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예로 돈, 명예, 자존심, 이기심, 안락함,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는 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부정한 짓도 서슴지 않는 태도 등을 청산하라고 신앙이 요구한다면 그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신앙인의 정화
-이재화 신부-
교구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한 해에 예닐곱 개의 크고 작은 성전을 신축하고 있습니다. 성전 신축을 하려면 예산문제·설계·건축 등 많은 것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지만 담당 신부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가장 필요한 것은 신자들의 신앙과 일치입니다. 곧 건물을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건물을 사용할 교우들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몇몇 본당에서는 성전을 지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갈라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름다운 건물은 훌륭한 건축사와 시공사가 지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건물을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명동성당에서 예비신자들을 담당할 때의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분들께 이 성전이 아름다운 진정한 이유는 100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 기도하고 위로받고 회심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성전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키면서 성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건물의 정화가 아닌 ‘신앙인의 정화’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기준에 맞추어 정화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
-강영구 신부 -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그대에게
옥봉성당은 근대문화재 15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80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성당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이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꾸며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큰 나무, 사철 피는 꽃들이 성당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온갖 인생풍랑을 겪으면서 자신을 깎고 다듬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른 어르신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분들은 젊거나 싱싱하지는 않지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압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다소곳이 기도하는 어르신들에게서 은총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저는 생기발랄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우리 성당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금은보화보다 고귀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우리 성당의 꽃이자 보배입니다.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고, 강도의 소굴이 기도하는 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강도의 소굴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높이 치켜세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일지라도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욕망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드나들면 그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초라한 천막이지만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드나들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당신이 당신의 성당을 아름다운 성전으로 만듭니다.(一明)
너희가 곧 성전이다.
-박상대신부-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상혼(商魂)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 바, 요한복음은 성전정화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당일(當日)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 있듯이 루가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원전(原典)에 비해 대폭 축소하여 보도하면서,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서에 없는 ‘성전 안에서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날마다 가르치셨다.’(46a절)고 한다. 루가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의 활동 사건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오셨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옆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베레아, 유다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장도(長途)의 목적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당일(當日), 곧바로 상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루가 2,49)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 집에 예수께서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성화(聖化)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은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웅장한 벽돌과 아름다운 치장으로만 하느님의 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 수십억의 돈을 들여야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살면서도 웅장한 성전건립을 위해 기금을 내고 약정을 한다. 성당이 분가되어 겨울에 떨고 여름에 찌는 비닐하우스나 군대막사 같은 가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신자들이 모이면 그곳은 성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려 모여든 공동체가 곧 하느님의 집이며,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고린 3,1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성전은 우리 공동체가 거룩해질 때 함께 거룩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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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