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에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묵동마을 어래산 미륵불>을 쓰면서 주덕읍 삼방마을과 괴산군 불정면 삼방마을 유래에 의심(疑心)을 가졌고, 주덕읍 어래산(御來山)의 유래도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고려말 조선초 배극렴과 관련하여 유래를 풀이하나 배극렴의 행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에 배극렴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 봅니다.
《배극렴 신도비명》은 조선후기 인물인 박성양(朴性陽, 1809년(순조 9) ~ 1890년(고종 27))의 《운창집(芸窓集)》에 있는데 원본(原本)이고, 이를 바탕으로 보태어 쓴 것이 지금 서있는 《배극렴 신도비》입니다. 그 자세한 것은 아래에 썼습니다.
2002년에 어느 교수님이 펴낸 책을 참고하고 그 내용도 올렸는데 서명(書名)과 성함(姓銜)은 생략합니다. 번역문에 조금 문제가 있는데 20년도 더 전에 나온 책을 시비하는 것은 좀 그렇고 한문 원문이 제대로 실렸다면 다행이고 번역문은 실수가 있다고 봅니다. 번역문은 일부 손을 보았습니다.
배극렴은 널리 알려져 있고 기록도 많이 남아 있는데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책봉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뒤에 태종에 의해 폄하(貶下)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폐(廢)하고 새 임금을 추대한 사실로 유교의 윤리(不事二君)를 어긴 인물로 낙인 찍혀 조선시대 내내 제대로 대접을 못받았습니다.
비문에도 부정확한 내용이 눈에 띄입니다. 그리고 어래산(御來山)과 삼방리(三訪里)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그동안 이 유래(由來)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궁금했었습니다. 훗날 끼어든 자료인데 이는 낭설이라고 봅니다.
◇차례
1. 박성양(朴性陽) 《운창집(芸窓集)》
<星山伯裵公克廉 神道碑銘> 원문, 표점정리, 번역문.
2. 박성양(朴性陽) 《운창집(芸窓集)》
<星山伯裵公克廉 神道碑銘> 이미지 파일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3.《성주배씨제공사실(星州裵氏諸公事實, 1922년)》
정절공(貞節公) 원문, 표점정리,번역문.
4. 《성주배씨제공사실(星州裵氏諸公事實, 1922년)》
정절공(貞節公) 이미지 파일.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5. 현 <배극렴 신도비> 원문, 표점정리,
번역문1, 번역문 2.
6. 《조선왕조실록》배극렴 관련기사.
7. 지호(芝湖) 이선(李選, 1632 ~ 1692) 의
《승국신서(勝國新書) 배극렴 관련자료.
이미지 파일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원문, 표점정리, 번역문.
성산배씨보록(星山裵氏譜錄)에 실려 있는
《貞節公事實》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배극렴 신도비 모습.
인터넷 자료.
<원문>
박성양(朴性陽) 《운창집(芸窓集)》 卷之八
비갈명(碑碣銘)
<星山伯裵公克廉 神道碑銘>
墓道之有樹經古也 苟有一善一能罔不備載 庸圖傳後 况(況)星山伯裵公勳業(문집에는 業의 訛字로 되어있다.)紀在盟府 而至今五百年 尙未聞一片石堪與語 余嘗怪之 一日公之裔濟弘謁余不朽之托顧玆老洫
非但久閣筆硯其於杞宋無徵何哉 且念尤庵先生不肯撰韓信齋文字以其革除推戴之際難於遣辭也 藐余後生 其何敢滋筆於是濟弘悶然而退乃以行狀來示 寅善君鄭文源所撰也 此可以籍手而無愧耶 按 公諱克廉字量可系出星山新羅功臣韓祗部長 諱祗沱其鼻祖也 屢傳至太師諱玄慶 爲麗祖元勳諡武(문집에는 文으로 되어 있으나 武가 맞으므로 고친다. 武烈公)烈公歷五世至諱天龍 封星山君後孫 諱實 壁上功臣後孫諱位俊 壁上功臣四傳 至諱 仁經封興安君 卽公之六代祖也 曾祖諱恪祗侯 祖諱勁伸宰臣 考諱賢輔衛尉少尹 妣星山李氏典客副令千年女也
公生于忠肅王乙丑(문집에는 乙亥로 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관련기사를 보면 乙丑 충숙왕 12년(1325)이 맞으므로 고친다.)志在經濟 智略過人 家在星州西門外樹柵壅川 民蒙其利 至今稱裵川裵野云 與我太祖同庚 宿有布衣之契 太祖薦爲晉州都元帥植柏衙北 晉人慕其惠名之曰侍(원문에는 傳으로 되어 있으나 侍中栢이 맞으므로 고친다.)中栢鄭公以吾爲之序
又表爲慶尙都巡撫使 使擊倭屡(屢)捷蒙鞍馬之賜 尋以門下贊成赴 天朝賀正至壬申七月 與一二同僚推戴 我太祖 當時協贊謨猷著在國乘可攷而知也 命策開國一等元勳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封星山伯 食邑千戶及其率也
賜諡貞節禮葬于淸安縣頭陀山大雅峰南麓負癸之原 配金海金氏祔葬于墓左丑坐生一男一女
男糽女適潘自(문집에는 白으로 되어 있으나 潘自建이 맞으므로 고친다.)建 糽生致禎 致禎生綉光咸安郡守 綉光生紏正 號筆菴有遺集 後孫散在嶺湖不能
悉記 噫 公以龍潛舊契依附日月之光 多少謀畫
宐(宜)有可傳者 而文獻零替殆無攷據之所抑又何哉
苐(第)見芝湖李公選所撰勝國新書 有曰 性廉謹持身勤儉 牧晉州尙州(원문에는 公州라 써있는데 尙州가 맞으므로 고친다.)又尹鷄林和寧 皆有惠政出師合浦築成開隍安集流亡 善於守禦但戰勝攻取非所長及前朝之季歸心於
上與趙俊等推戴 遂爲首相 壬申七月 上登極
公以左侍中策開國勳一等 封星山伯 十一月卒(조선왕조실록 배극렴 졸기를 보면 11월 26일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11월로 고친다.)年六十八 輟朝三日 素饌七日 諡貞節 命有司禮葬 十二月 上親臨殯次 命門下侍郎金士衡行祭 上悲痛殊甚 召主喪者吊之其姊之外孫安純主喪
云李公此書 藏在巾衍而世皆稱之以信筆
公之顛末可謂略而盡矣 以余謏陋又何必贅
加一辭也
銘曰
以羈旅臣 逢堯舜理 范老憂畏 公亦云爾 漢祗華冑
武烈肖孫 際會風雲 奕世元勳 遙遙千載 鏡攷斯文
<표점정리>
《운창집(芸窓集)》 권지8 비갈명(碑碣銘)
星山伯裵公克廉 神道碑銘 (성산백 배공 극렴 신도비명)
墓道之有樹, 經古也. 苟有一善一能, 罔不備載, 庸圖傳後. 況星山伯裵公, 勳業紀在盟府, 而至今五百年, 尙未聞一片石堪與語, 余嘗怪之.
一日, 公之裔濟弘, 謁余不朽之托. 顧玆老洫, 非但久閣筆硯, 其於杞宋無徵, 何哉? 且念尤庵先生不肯撰韓信齋文字, 以其革除推戴之際, 難於遣辭也. 藐余後生, 其何敢滋筆於此? 於是濟弘悶然而退, 乃以行狀來示, 寅善君鄭文源所撰也. 此可以籍手而無愧耶!
按: 公諱克廉, 字量可, 系出星山. 新羅功臣韓祗部長諱祗沱, 其鼻祖也. 屢傳至太師諱玄慶, 爲麗祖元勳, 諡武烈公. 歷五世至諱天龍, 封星山君. 後孫諱實, 壁上功臣. 後孫諱位俊, 壁上功臣. 四傳至諱仁經, 封興安君, 卽公之六代祖也. 曾祖諱恪, 祗候. 祖諱勁伸, 宰臣. 考諱賢輔, 衛尉少尹. 妣星山李氏, 典客副令千年之女也.
公生于忠肅王乙丑. 志在經濟, 智略過人. 家在星州西門外, 樹柵壅川, 民蒙其利, 至今稱裵川裵野云.
與我太祖同庚, 宿有布衣之契. 太祖薦爲晉州都元帥, 植栢衙北. 晉人慕其惠, 名之曰「侍中栢」, 鄭公以吾爲之序. 又表爲慶尙都巡撫使, 使擊倭, 屢捷, 蒙鞍馬之賜. 尋以門下贊成, 赴天朝賀正.
至壬申七月, 與一二同僚推戴我太祖. 當時協贊謨猷, 著在國乘, 可攷而知也. 命策開國一等元勳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封星山伯, 食邑千戶. 及其卒也, 賜諡貞節, 禮葬于淸安縣頭陀山大雅峰南麓負癸之原. 配金海金氏, 祔葬于墓左丑坐. 生一男一女: 男紆, 女適潘自建. 紆生致禎, 致禎生繡光咸安郡守, 繡光生糾正, 號筆菴, 有遺集. 後孫散在嶺湖, 不能悉記.
噫! 公以龍潛舊契, 依附日月之光, 多少謀畫, 宜有可傳者, 而文獻零替, 殆無攷據之所, 抑又何哉?
第見芝湖李公選所撰《勝國新書》, 有曰:
"性廉謹, 持身勤儉. 牧晉州、尙州, 又尹鷄林、和寧, 皆有惠政. 出師合浦, 築城開隍, 安集流亡, 善於守禦, 但戰勝攻取, 非所長. 及前朝之季, 歸心於上, 與趙浚等推戴, 遂爲首相. 壬申七月, 上登極, 公以左侍中策開國勳一等, 封星山伯. 十一月卒(조선왕조실록에 11월 26일 卒한 것으로 나온다. 원문에는 九月卒로 나오나 잘못이다. 고친다.), 年六十八. 輟朝三日, 素饌七日, 諡貞節, 命有司禮葬. 十二月, 上親臨殯次, 命門下侍郎金士衡行祭, 上悲痛殊甚, 召主喪者吊之, 其姊之外孫安純主喪云."
李公此書, 藏在巾衍, 而世皆稱之以信筆. 公之顛末, 可謂略而盡矣. 以余謏陋, 又何必贅加一辭也?
銘曰: 以羈旅臣, 逢堯舜理. 范老憂畏, 公亦云爾. 漢祗華冑, 武烈肖孫. 際會風雲, 奕世元勳. 遙遙千載, 鏡攷斯文.
<번역문>
성산백 배공 극렴 신도비명 (星山伯裵公克廉 神道碑銘)
운창 박성양(芸窓 朴性陽)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온 일이다. 진실로 한 가지 선행이나 한 가지 능(能)함이라도 갖추어져 있으면 모두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성산백(星山伯) 배공(裵公)의 공훈과 업적은 공신록(盟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오늘날 500년이 지나도록 아직 한 조각 신도비도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나는 일찍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尙未聞一片石堪與語 余嘗怪之)
하루는 공의 후손인 제홍(濟弘)이 나를 찾아와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의 늙고 비루함을 돌아보건대, 단지 오랫동안 붓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근거할 만한 문헌(杞宋無徵)도 부족하니 어찌하겠는가? 또한 우암 선생(尤庵 宋時烈)께서 한신재(韓信齋: 韓尙敬(1360~ 1423)의 글을 지어주지 않으셨으니, 이는 여말선초 역성혁명과 추대의 과정에서 말을 가다듬기가 어려웠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미천한 후생(後生)인 내가 어찌 감히 이에 붓을 대겠는가?
이에 제홍(濟弘)이 답답해하며 물러갔다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는데, 인선군(寅善君) 정문원(鄭文源, 조선시대 후기에 鄭文源이란 인물이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寅善君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이 지은 것이었다. 이 정도면 의지하여 손에 쥐고 지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극렴(克廉)이고 자(字)는 양가(量可)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신라의 공신인 한지부장(韓祗部長) 휘 지타(祗沱)가 비조(鼻祖)이시다. 여러 대를 전하여 태사(太師) 휘 현경(玄慶)에 이르러 고려 태조의 원훈(元勳)이 되시어 무열공(武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5대를 거쳐 휘 천룡(天龍)에 이르러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고, 그 후손 휘 실(實)은 벽상공신이 되었으며, 후손 휘 위준(位俊) 또한 벽상공신이었다. 4대를 전하여 휘 인경(仁經)에 이르러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으니, 곧 공의 6대조이시다. 증조의 휘는 각(恪)으로 지후(祗候)이며, 조부의 휘는 경신(勁伸)으로 재신(宰臣)이고, 아버지는 휘 현보(賢輔)로 위위소윤(衛尉少尹)이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전객부령(典客副令) 천년(千年)의 딸이다.
공은 충숙왕 을축년(충숙왕 12년(1325)에 태어났다. 뜻이 경세제민(經濟)에 있었고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집이 성주(星州) 서문 밖에 있었는데, 울타리를 치고 개울을 막아 물을 모으니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입어 지금까지도 '배천(裵川)', '배야(裵野)'라고 부른다.
우리 태조(이성계)와 동갑(同庚, 이 부분도 맞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는 생몰년대(1335년 ~ 1408년)가 이므로 동갑이 아니다.)으로, 일찍부터 평민(平民) 시절의 두터운 친분(布衣之契)이 있었다. 태조의 추천으로 진주 도원수(晉州都元帥)가 되어 아사(衙舍) 북쪽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진주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사모하여 그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불렀으며, 정공 이오(鄭公 以吾)가 이를 위해 서문을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진주목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시중백(侍中柏): 정이오의 시중백 시의 서문에, “시중백이란 것은 개국공신 좌시중(開國功臣左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심은 것이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공이 진주에 목사로 와서 일으키고 세운 것이 많았다. 고을에 온 다음 해에 산중에서 어린 잣나무를 옮겨다가 관아 북헌(北軒)에다가 심었다. 그가 임기가 차서 갈려 간 뒤에 진주 백성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았다. (侍中柏。鄭以吾《侍中柏詩序》:“侍中柏者,開國功臣、左侍中裵克廉之植也。至正癸卯公出牧于晉,多所樹立,明年移稚柏于山中,植公衙北軒。及瓜而去也,晉之民慕公之德,愛其柏若召公之甘棠焉。)]
또한 상소하여 경상도 순무사(慶尙都巡撫使)가 되어서는 왜구를 치게 하여 여러 번 승전(勝戰)하였으므로 안장 얹은 말을 하사받았다. 이어 문하찬성(門下贊成)으로서 명나라 조정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임신년(1392년) 7월에 이르러 한두 동료와 함께 우리 태조를 추대하였다. 당시 계책을 함께 도모하여 도운 공로가 국사(國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으니 고찰하여 알 수 있다. 개국 1등 원훈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에 책록되어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식읍 1천 호를 받아 그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다.(封星山伯 食邑千戶及其率也)
공이 세상을 떠나매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청안현(淸安縣)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 남쪽 기슭 계방(癸方, 계좌정향(癸坐丁向) )을 등진(頭陀山大雅峰南麓負癸坐之原)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부인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묘 왼쪽 축좌(丑坐: 축좌미향(丑坐未向))에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배우(裵紆)이고 딸은 반자건(潘自建)에게 시집갔다. 배우(裵紆)는 배치정(裵致禎)을 낳았고, 치정(致禎)은 함안군수인 배수광(裵綉
光)을 낳았으며, 수광(綉光)은 규정(糾正)을 낳았으니 호는 필암(筆菴)이고 유집(遺集)이 있다. 후손들이 영남과 호남에 흩어져 살아 모두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아! 공은 임금이 될 분과의 옛 친분으로 해와 달 같은 빛에 의지하여 많은 모책을 내었으니 마땅히 전할 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문헌이 떨어지고 없어져 고증할 곳이 거의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
다만 지호(芝湖) 이선(李選,1631~1692)은 조선 후기 숙종 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공이 지은 《승국신서(勝國新書)》를 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성품이 염철하고 삼가며, 몸가짐이 근검(勤儉)하였다. 진주와 상주 목사, 계림과 화녕 부윤을 지낼 때 모두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다. 합포에 군사를 끌고 가 성을 쌓고 해자(垓子)를 파서 유망민을 안집시키고 방어를 잘하였으나, 다만 싸워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는 것은 장기(長技)가 아니었다.(出師合浦築成開隍安集流亡 善於守禦但戰勝攻取非所長)
고려 말에 마음을 태조에게 기울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추대하여 마침내 재상(首相)이 되었다. 임신년(1392) 7월 태조가 등극하자 공은 좌시중으로서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성산백에 봉해졌다. 11월(조선왕조에 11월 26일에 卒했다. 원문에는 九月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다.)서거하니 나이는 68세였다. 사흘간 조회를 폐하고 이레 동안 소선(素膳)을 하였으며, 시호를 정절이라 하고 유사에 명하여 예장하게 하였다. 12월에 임금이 친히 빈소에 임하여 문하시랑 김사형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임금의 슬픔이 매우 심하여 상주를 불러 위로하였으니, 그의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主喪)을 맡았다고 한다."
이공(李公)의 이 책은 보물처럼 간직되어 오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믿을 만한 글이라고 칭송한다. 공의 전말이 대략이면서도 다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나같이 비루한 자가 어찌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보태겠는가? 단지 한 마디 말을 남길 뿐이다.
명(銘)하여 가로되:
나그네와 같은 신하의 몸으로
요순(堯舜) 같은 성군을 만났도다.
범려(范蠡)의 근심과 두려움처럼
공 역시 그렇게 처신하였네.
한지부장의 화려한 후손이자
무열공의 훌륭한 자손이라.
풍운의 운회를 타고나서
대대로 이어지는 으뜸 공신 되었네.
아득히 먼 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이 글을 거울삼아 고찰하리로다.
(以羈旅臣, 逢堯舜理.
范老憂畏, 公亦云爾.
韓祗華冑, 武烈肖孫.
際會風雲, 奕世元勳.
遙遙千載, 鏡考斯文.)
박성양(朴性陽)의 운창집(芸窓集) 권지팔(卷之八)
비갈명(碑碣銘)에 나오는
<星山伯裵公克廉 神道碑銘> 원문.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
《성주배씨제공사실(星州裵氏諸公事實, 1922년)》
<원문>
貞節公
公諱克廉字量可星州館下里禮洞卽故基也 公志存濟世智略 兼人素興 我 太祖有布衣之交焉
禑時爲晉州都元帥植栢于衙北晉人慕其惠
比之甘棠而名之曰侍中栢有鄭以吾序文 又爲副元帥慶尙道 都巡使擊倭屢捷嘗受鞍馬衣酒之賜歷開城府使尋以門下贊 成事如明京賀正及禑犯遼時以助戰元帥屬我 太祖贊回軍之舉以
副元帥築城于合浦李詹爲之記恭護朝歷門 下評理叅錄 我 太祖威化回軍之功爲楊廣道察理使監修漢陽宮闕三年爲中軍 摠制使四年守門下侍中與侍中沈德符等上疏請罷諸道觀察 復按廉使罷節制經歷都事復掌務錄事罷新定監務諸驛承資 瞻楮化庫人物推辨都監東西遞運所水站及戶口成籍牛馬烙 印州郡鄕社里長等物又諸司有受稟事皆直報都
堂勿隷六曹 尋爲右侍中時麗朝政亂民散
我太祖勳德旣隆中外歸心公與忠義君鄭道傳判三司趙浚率國 人奉國寶詣潛邸塡咽街巷 太祖閉門不納公排門直入置寶廳事上羅拜呼千歲扶擁入壽昌宮合辭勸進卽位卽 洪武壬申七月十六日也 甲戌奠鼎漢陽 錄開國功一等首爲大匡輔國崇祿大夫兼經 筵事議政府領 議政封星山伯載丹書鐵券又有 聖祖龍興九五最初攀龍附 鳳三傑得人之贊公嘗與趙浚金士衡鄭道傳
南誾等啓曰王子 諸君服御 騶從不可不備用度不可不足乞於本科外加賜田 太祖曰本科百餘結亦不至飢寒若又加賜則人必謂予私已子也 不從且公於禮洞古庄木棚壅川民蒙其利鑄衡稱土墾田至今稱裵川裵野裵里裵峴
太宗贊功臣詩曰漢封十八大功臣
刱(創)業當年勞此人有吾甲楔 三七人三角山崩義不泯受敎中又曰周之恭和漢之蕭曹 太宗受禪以時平立嫡世亂先功之言天意不解悟減死一等安 置淸安未久蒙 宥因退居忠州之野 太宗三訪不起故至今號其村曰三訪里號其山曰御來山公卒 諡貞節 命禮官葬享于羅州草洞書院金堤鳳棲書院
표점정리(標點 整理)
貞節公
公諱克廉, 字量可, 星州館下里禮洞, 卽故基也.
公志存濟世, 智略兼人, 素與我太祖有布衣之交焉.
禑時爲晉州都元帥, 植栢于衙北, 晉人慕其惠, 比之甘棠而名之曰侍中栢, 有鄭以吾序文.
又爲副元帥、慶尙道都巡使, 擊倭屢捷, 嘗受鞍馬衣酒之賜.
歷開城府使, 尋以門下贊成事如明京賀正.
及禑犯遼時, 以助戰元帥屬我太祖, 贊回軍之舉.
以副元帥築城于合浦, 李詹爲之記.
恭廢朝, 歷門下評理, 叅錄我太祖威化回軍之功.
爲楊廣道察理使, 監修漢陽宮闕.
三年爲中軍摠制使, 四年守門下侍中, 與侍中沈德符等上疏, 請罷諸道觀察, 復按廉使; 罷節制經歷都事, 復掌務錄事; 罷新定監務, 諸驛承資、瞻楮化庫、人物推辨都監、東西遞運所、水站, 及戶口成籍、牛馬烙印、州郡鄕社里長等物. 又諸司有受稟事, 皆直報都堂, 勿隷六曹.
尋爲右侍中. 時麗朝政亂民散, 我太祖勳德旣隆, 中外歸心.
公與忠義君鄭道傳、判三司趙浚, 率國人奉國寶詣潛邸, 塡咽街巷.
太祖閉門不納, 公排門直入, 置寶廳事上, 羅拜呼千歲, 扶擁入壽昌宮, 合辭勸進卽位, 卽洪武壬申七月十六日也.
甲戌, 奠鼎漢陽. 錄開國功一等, 首爲大匡輔國崇祿大夫、兼經筵事、議政府領議政, 封星山伯, 載丹書鐵券.
又有聖祖龍興, 九五最初, 攀龍附鳳, 三傑得人之贊.
公嘗與趙浚、金士衡、鄭道傳、南誾等啓曰: “王子諸君服御騶從, 不可不備, 用度不可不足, 乞於本科外加賜田.”
太祖曰: “本科百餘結, 亦不至飢寒. 若又加賜, 則人必謂予私己子也.” 不從.
且公於禮洞古庄, 木棚壅川, 民蒙其利. 鑄衡稱土墾田, 至今稱裵川、裵野、裵里、裵峴.
太宗贊功臣詩曰: “漢封十八大功臣, 創業當年勞此人.” 有吾甲楔三七人, 三角山崩, 義不泯.
受敎中又曰: “周之恭和, 漢之蕭曹.”
太宗受禪, 以“時平立嫡, 世亂先功”之言, 天意不解悟, 減死一等, 安置淸安.
未久蒙宥, 因退居忠州之野. 太宗三訪不起, 故至今號其村曰三訪里, 號其山曰御來山.
公卒, 諡貞節, 命禮官葬, 享于羅州草洞書院、金堤鳳棲書院.
번역문
정절공(貞節公)의 휘(名前)는 극렴(克廉)이고, 자(字)는 양가(量可)이다. 성주(星州) 관하리(館下里) 예동(禮洞)이 곧 그의 옛 터전이다.
공은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고 지혜와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이 우리 태조(太祖)와 벼슬 없는 평민 시절부터 깊은 교유(布衣之交)가 있었다.
우왕(禑王) 때 진주 도원수(晉州都元帥)가 되어 관아 북쪽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진주 사람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여 이를 ‘감당나무(甘棠)’에 비유하며 ‘시중백(侍中栢)’이라 이름 붙였으니, 정이오(鄭以吾)가 쓴 서문이 남아 있다.
또 부원수(副元帥) 및 경상도 도순사(慶尙道都巡使)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여 여러 번 승전하였으며, 일찍이 안마(鞍馬: 말과 안장), 의복, 술을 하사받았다.
개성부사(開城府使)를 거쳐 얼마 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명나라 수도(明京)에 가서 하정사(賀正使)로 하례하였다.
우왕이 요동을 공격하려 할 때,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우리 태조에게 속하여 회군(回軍)의 거사를 찬성하였다. 부원수로서 합포(合浦)에 성을 쌓았는데, 이첨(李詹)이 그 기문(記文)을 지었다.
공양왕이 즉위한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우리 태조의 위화도 회군의 공을 기록(참록)하였다.
양광도 차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의 궁궐 감독 및 수리를 맡았다.
3년(1391년)에 중군 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었고, 4년(1392년)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시중 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다음을 청하였다.
[각도(各道)의 관찰사를 폐지하고 안렴사를 복원할 것, 절제·경력·도사를 폐지하고 장무·녹사를 복원할 것, 신정감무를 폐지할 것, 제역승자·첨저화고·인물추변도감·동서체운소·수참 및 호구성적·우마낙인·주군향사리장 등의 제반 업무를 개혁할 것, 또한 여러 관청에서 아뢸 일이 있으면 모두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하고 육조(六曹)에 속하게 하지 말 것.]
얼마 후 우시중(右侍中)이 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의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이 흩어졌으나, 우리 태조의 공훈과 덕망이 이미 높아 온 나라 안팎의 민심이 돌아왔다.
공은 충의군(忠義君) 정도전(鄭道傳),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준(趙浚)과 함께 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국보(御寶)를 모시고 태조의 잠저(潛邸)로 가니 거리가 메워질 정도였다.
태조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자, 공이 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가 어보를 대청 위에 놓은 뒤 줄지어 절하고 천세(千歲)를 불렀으며, 태조를 부옹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모시고 입을 모아 즉위를 권하니 곧 홍무(洪武) 임신년(1392년) 7월 16일이었다.
갑술년(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어 첫 번째로 대광보국숭록대부·겸경연사·의정부 영의정에 올랐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단서철권(丹書鐵券)에 기록되었다.
또한 "성조(聖祖)께서 드높이 일어나시어 주역의 구오(九五)와 같은 최고의 자리에 오르실 때, 가장 먼저 세운 '삼걸(三傑)'의 인재를 얻으셨다"라는 찬사가 있었다.
공이 일찍이 조준, 김사형, 정도전, 남은 등과 함께 아뢰기를,
"왕자와 여러 군(君)들의 복식, 수레, 종자(騶從)를 갖추지 않을 수 없으며, 소요되는 경비가 부족해서는 안 되니, 본과(本科) 외에 과전을 더 하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본과의 100여 결(結)로도 굶주리거나 춥지 않다. 만약 또 더 하사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내가 내 자식에게 사사로움을 베푼다고 말할 것이다."
하며 따르지 않으셨다.
또한 공은 예동(禮洞)의 옛 농장에서 목책과 둑을 쌓아 하천을 막아 백성들이 그 이익을 보게 하였다. 저울을 만들고 토지를 측정하여 밭을 개간하였으니, 지금까지 그곳을 '배천(裵川)', '배야(裵野)', '배리(裵里)', '배현(裵峴)'이라 부른다.
태종께서 공신을 찬양하여 지은 시에 이르기를,
"한나라에서 봉한 18명의 큰 공신처럼, 창업하던 그해에 이 사람이 수고하였네."
라 하였으며, 오갑설(吾甲楔) 21인(三七人)이 있어 삼각산이 무너져도 그 의리는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교서(受敎) 안에서 또 이르기를, "주나라의 공화(恭和)요, 한나라의 소하와 조참(蕭曹)이로다."라 하였다.
태종이 선위를 받을 때, 공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적장자를 세우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공이 있는 자를 먼저 세운다(時平立嫡, 世亂先功)"라는 말을 한 것에 대해, 왕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 감형되어 청안(淸安)에 안치되었다.
오래지 않아 사면을 받아 충주(忠州)의 들녘으로 물러나 살았다. 태종이 세 번이나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그 마을을 ‘삼방리(三訪里)’라 부르고, 그 산을 ‘어래산(御來山)’이라 부른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예관(禮官)에 명하여 장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나주의 초동서원(草洞書院)과 김제의 봉서서원(鳳棲書院)에 배향되었다.
《성주배씨제공사실(星州裵氏諸公事實, 1922년)》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
배극렴
星山伯 貞節公 星州人 裵克廉(충숙왕 12년(1325)~ 태조 1년(1392))의 神道碑는 高宗 25年(1888) 增坪邑 松山里 송오리(松五里) 大雅峯에 있는 그의 묘소 아래에 세웠는데 碑文은 朴性陽이 짓고 글씨는 李垠鎔이 썼으며 題篆은 安秉宙가 썼다.
원 문
《有明朝鮮國奮忠仗義同德開國靖難定社功臣大匡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事封星山伯諡貞節裵公神道碑 》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兼 經筵官書筵官 潘南 朴性陽 撰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 兼 經筵參贊官手撰官 完山 李垠鎔 書
通訓大夫弘文館修撰 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恩津 宋秉宙 篆
墓道之有樹經古也 苟有一善一能罔不備載 庸圖傳後 況星山伯裵公勳業紀在盟府 而至今五百年尙未聞一片石堪與語 余嘗怪之 一日公之裔濟弘謁余不朽之托顧玆老洫 非但久閣筆硯 其於杞宋無徵何哉且念 尤庵先生不肯撰韓信齋文字以其革除推戴之際難於遣辭也
藐余後生 其何敢滋筆 於是濟弘悶然而退 乃以行狀來示 寅善君鄭文源所撰也 此可以籍手而無愧耶 按 公諱克廉 字量可系出星山新羅功臣韓祗部長 諱祗沱其鼻祖(也, 운창집에는 있으나 신도비에는 빠졌다.)屢傳至太師諱玄慶 爲麗祖元勳諡武烈公歷五世 至諱天龍 封星山君後孫 諱實 壁上功臣後孫位俊 壁上功臣 四傳 至諱 仁經封興安君 卽公之六代祖也 曾祖諱恪祗侯 祖諱勁伸宰臣 考諱賢輔衛尉少尹 妣星州李氏典客副令千年女也
公生于忠肅王乙丑(乙丑, 원문에는 乙亥로 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면 충숙왕 12년, 1325년乙丑年이 맞다. ) 志在經濟 智略過人 家在星州西門外 樹柵壅川 民蒙其利 至今稱裵川·裵野·(裵里·裵井,운창집에는 없다.)云. 與我太祖同庚(태조 이성계의 생몰년대는 1335년 ~ 1408년이다. 재위기간은 1392년 ~ 1398년인데 《조선왕조실록》태조 1년 11월 26일 <배극렴 졸기>를 보면 卒年六十八이라 했다. 따라서 1325년 태어난 것이 맞다. 동경(同庚) 즉 동갑이 아니다.)
宿有布衣之契, 太祖薦爲晉州都元帥, 植柏衙北, 晉人慕其惠, (與召(원문은 菜이나 召의 誤字이므로 고친다.)公柏同比於甘棠, 與召公伯同比於甘棠은 운창집에는 없다) 名之曰 侍中栢 鄭公以吾爲之序 又薦(운창집에는 表爲로 되어 있다.) 慶尙道都巡撫使
(使, 운창집에 使字가 있다.)擊倭屢捷 蒙鞍馬之賜 尋以門下贊成 赴天朝賀正 至壬申七月 與一二同僚 上奏天時( 운창집에 上奏天時가 없다.)推戴 我太祖 當時事實(운창집에 當時協贊謨猷라고 나온다.)
著在國乘可攷而知也 上登極公以左侍中(운창집에는 上登極公以左侍中 글자가 없다.) 命策開國一等元勳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封星山伯 食邑千戶(及其率也, 운창집에는 있으나 신도비에는 없다.)
[載丹書鐵券 太宗受禪以時平立嫡世難元功之言 天意解悟減死一等 安置淸安 未幾蒙宥 因退去忠州之野 太宗訪不赴 故至今 號其村曰 三訪里 號其山曰 御來山 太宗贊功臣受敎中特曰 裵克廉 周之恭和 漢之蕭曹 辛巳(태종 1년 1401년) 九月 八日卒 年六十七 輟朝三日素膳七日]
(이 구절은 운창집에는 없고 신도비에 있다. 배극렴이 사망한 것은 1392년 태조 1년 11월 26일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맞지 않는다. 배극렴 졸기에 나온다.)
賜諡貞節 (命官, 신도비에만 나온다.)禮葬于淸安縣(近西, 신도비에만 나온다.)頭陀山大雅峰南麓負癸坐之原
[上悲痛殊甚 親臨殯次命門下侍郞金士衡行祭
配貞敬夫人 順興安氏 平章事興寧府院君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원문에는 俯字이나 府자가 맞으므로 고친다.)事集賢殿太學士宗源女]
(이 구절도 운창집에는 없고 신도비에만 있다. 다만
上親臨殯次 命門下侍郎金士衡行祭 上悲痛殊甚
召主喪者吊之其姊之外孫安純主喪란 구절이 운창집에 보인다.)
配金海金氏祔葬于公墓左丑坐 生一男一女 男紆 女適潘自建 紆生致禎 俱不仕 蓋公所命 致禎生綉光 咸安郡守 綉光生糾正 號草庵有遺集後孫散在嶺湖 屢經兵燹不能悉記 噫 公以龍潛舊契依附日月之光多少謀畵(畫)宜有可傳者 而文獻零替殆無攷據之所抑又何哉 第見芝湖李公選所撰勝國新書 有曰 性廉謹 持身勤儉牧晉州尙州又尹鷄林和寧皆有惠政 出師合浦築成開隍安集流亡善於守禦云 公之顛末可謂略而盡矣 以余謏陋 又何必贅可一辭也
銘日
以羈旅臣 逢堯舜理
范老憂畏 公亦云爾
韓祗華冑 武烈肖孫
際會風雲 奕世元勳
遙遙千載 鏡考斯文
崇禎五戊子 八月 日
<표점정리>
배극렴 신도비문(裵克廉 神道碑文)
有明朝鮮國 奮忠仗義同德開國靖難定社功臣 大匡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事 封星山伯 諡貞節 裵公神道碑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兼 經筵官書筵官 潘南 朴性陽 撰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 兼 經筵參贊官手撰官 完山 李垠鎔 書
通訓大夫弘文館修撰 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恩津 宋秉宙 篆
墓道之有樹, 經古也. 苟有一善一能, 罔不備載, 庸圖傳後. 況星山伯裵公勳業紀在盟府, 而至今五百年, 尙未聞一片石堪與語, 余嘗怪之.
一日, 公之裔濟弘謁余, 以不朽之托. 顧玆老洫, 非但久閣筆硯, 其於杞宋無徵何哉? 且念尤庵先生不肯撰韓信齋文字, 以其革除推戴之際難於遣辭也. 藐余後生, 其何敢滋筆? 於是濟弘悶然而退, 乃以行狀來示, 寅善君鄭文源所撰也. 此可以籍手而無愧耶!
按: 公諱克廉, 字量可. 系出星山. 新羅功臣韓祗部長諱祗沱, 其鼻祖也. 屢傳至太師諱玄慶, 爲麗祖元勳, 諡武烈公. 歷五世, 至諱天龍, 封星山君. 後孫諱實, 壁上功臣; 後孫諱俊, 壁上功臣. 四傳至諱仁經, 封興安君, 卽公之六代祖也. 曾祖諱恪, 祗侯; 祖諱勁伸, 宰臣; 考諱賢輔, 衛尉少尹; 妣星州李氏, 典客副令千年之女也.
公生于忠肅王乙丑. 志在經濟, 智略過人. 家在星州西門外, 樹柵壅川, 民蒙其利, 至今稱裵川·裵野·裵里·裵井云. 與我太祖同庚(同庚者誤), 宿有布衣之契. 太祖薦爲晉州都元帥, 植柏衙北, 晉人慕其惠, 名之曰侍中栢, 鄭公以吾爲之序. 又表薦慶尙道都巡撫使, 擊倭屢捷, 蒙鞍馬之賜. 尋以門下贊成赴天朝賀正. 至壬申七月, 與一二同僚上奏天時, 推戴我太祖. 當時事實, 著在國乘, 可攷而知也.
上登極, 公以左侍中命策開國一等元勳, 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封星山伯, 食邑千戶, 載丹書鐵券.
(太宗受禪, 以時平立嫡世難元功之言, 天意解悟, 減死一等, 安置淸安. 未幾蒙宥, 因退去忠州之野. 太宗訪不赴, 故至今號其村曰三訪里, 號其山曰御來山. 太宗贊功臣受敎中特曰: "裵克廉, 周之恭和, 漢之蕭曹." 辛巳九月八日卒, 年六十七, 輟朝三日, 素膳七日.)
賜諡貞節, 命官禮葬于淸安縣頭陀山大雅峰南麓負癸坐之原. 上悲痛殊甚, 親臨殯次, 命門下侍郞金士衡行祭.
配貞敬夫人順興安氏, 平章事興寧府院君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事集賢殿太學士宗源女. 配金海金氏, 祔葬于公墓左丑坐.
生一男一女: 男紆, 女適潘自建. 紆生致禎, 俱不仕, 蓋公所命. 致禎生綉光, 咸安郡守; 綉光生糾正, 號草庵, 有遺集. 後孫散在嶺湖, 屢經兵燹, 不能悉記.
噫! 公以龍潛舊契, 依附日月之光, 多少謀畫, 宜有可傳者, 而文獻零替, 殆無攷據之所, 抑又何哉? 第見芝湖李公選所撰《勝國新書》有曰: "性廉謹, 持身勤儉. 牧晉州·尙州, 又尹鷄林·和寧, 皆有惠政. 出師合浦, 築城開隍, 安集流亡, 善於守禦" 云. 公之顛末, 可謂略而盡矣, 以余謏陋, 又何必贅一辭也?
銘曰:
以羈旅臣, 逢堯舜理. 范老憂畏, 公亦云爾. 韓祗華冑, 武烈肖孫. 際會風雲, 奕世元勳. 遙遙千載, 鏡考斯文.
崇禎五戊子 八月
----------------------------------------------
<번역문1>
배극렴 신도비문(裵克廉 神道碑文)
유명조선국(유명조선국) 분충장의동덕개국정난공臣 대광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사 봉성산백 시정절 배공 신도비 (조선국 분충장의동덕개국정난공신 대광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사 성산백에 봉해지고 시호는 정절이신 배공의 신도비)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경연관 서연관 반남 박성양(朴性陽) 짓다.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수찬관 완산 이은용(李垠鎔) 쓰다.
통훈대부 홍문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은진 송병주(宋秉宙) 전액을 쓰다.
묘도(묘로 통하는 길)에 비석을 세우는 것은 예부터 내려온 옛 도리이다. 진실로 한 가지 선행이나 한 가지 능력이 있더라도 빠짐없이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성산백(星山伯) 배공(裵公)의 공훈과 업적은 공신록에 기록되어 있거늘, 지금까지 500년 동안 비석 한 조각도 제대로 서서 말을 전하지 못했으니, 나는 일찍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하루는 공의 후손인 제홍(濟弘)이 나를 찾아와 불후의 글(신도비문)을 부탁하였다. 이 늙고 병든 몸을 돌아보니 오랜 세월 붓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의 문헌이 부족함(杞宋無徵)과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게다가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께서 한신재(韓信齋)의 글을 차마 짓지 못하셨으니, 이는 왕조가 바뀌고 왕을 추대하는 즈음의 일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임을 생각했다. 아득한 후생인 내가 어찌 감히 함부로 붓을 대겠는가?
이에 제홍이 답답해하며 물러갔다가, 이내 행장(行狀)을 가져와 보여주었는데 인선군(寅善君) 정문원(鄭文源)이 지은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바탕으로 삼아 글을 지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 여겨졌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 이름)는 극렴(克廉)이요, 자(字)는 량가(量可)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신라의 공신이자 한지부장(韓祗部長)인 휘 지타(祗沱)가 그 비조(鼻祖: 시조)이다. 여러 대를 전하여 태사(太師) 휘 현경(玄慶)에 이르러 고려 태조의 원훈(元勳)이 되셨으니 시호는 무열공(武烈公)이다. 5대를 지나 휘 천룡(天龍)에 이르러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후손 휘 실(實)은 벽상공신이며, 후손 위준(位俊)도 벽상공신이다. 4대를 전하여 휘 인경(仁經)에 이르러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으니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각(恪)으로 지후(祗侯)요, 할아버지의 휘는 경신(勁伸)으로 재신(宰臣)이며, 아버지의 휘는 현보(賢輔)로 위위소윤(衛尉少尹)이다. 어머니 성주 이씨는 전객부령 이천년(李千年)의 딸이다.
공은 충숙왕 을해년(乙亥: 1325년)에 태어났다. 뜻은 경세제민(經濟)에 있었고 지략이 사람보다 뛰어났다. 집이 성주 서문 밖에 있었는데, 울타리를 치고 냇물을 막아 제방을 쌓으니 백성들이 그 이익을 보았으므로 지금까지 '배천(裵川)·배야(裵野)·배리(裵里)·배정(裵井)'이라 부른다. 우리 태조(이성계)와 나이가 같아(同庚: 오류이니 마땅히 고증해야 함), 일찍부터 신분을 가리지 않는 깊은 교분(布衣之契)이 있었다.
태조가 추천하여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가 되었을 때 관아 북쪽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진주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여 소공(召公)의 잣나무가 감당나무(甘棠)에 비견되듯 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불렀고, 정공(鄭公: 정문원)이 나를 위해 서문을 지어주었다.
또한 추천되어 경상도도순무사(慶尙道都巡撫使)가 되어 왜구를 쳐서 여러 번 승리하였으므로 안장 얹은 말을 하사받았다. 얼마 뒤 문하찬성(門下贊成)으로서 명나라 조정에 부사로 가서 하정사(賀正使) 역할을 다했다. 임신년(1392년) 7월에 이르러 한두 동료와 함께 천시(天時)를 상주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였다. 당시의 사실은 국사(國乘)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증하여 알 수 있다.
태조께서 등극하시자 공은 좌시중(左侍中)으로서 개국1등원훈에 책록되어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의 호를 받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식읍 1천 호를 받고 단서철권(丹書鐵券)에 기록되었다.
(태종께서 선위를 받으신 후, '시운이 평정되었을 때 적장자를 세우는 것은 세상의 어려움이자 으뜸가는 공'이라는 말에 천의를 깨달아 [공의 후손 죄를] 사형에서 1등 감형하여 청안에 안치하였다. 머지않아 사면을 입고 충주의 들판으로 물러나 사셨다. 태종께서 찾아오셨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그 마을을 '삼방리(三訪里)', 그 산을 '어래산(御來山)'이라 부른다. 태종께서 공신을 찬양한 교서 중에 특별히 가로되 "배극렴은 주나라의 공화(恭和)요, 한나라의 소하와 조참(蕭曹)이다"라 하셨다. 신사년(1401년) 9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조정은 3일간 조회를 거두고 7일간 소식을 하였다.)
이 부분은 박성양이 지은 《배극렴 신도비명》에 훗날 끼워든 자료이다. 배극렴은 1392년 태조 1년에 사망했으니 태종운운은 사실무근인 셈이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기사를 태종 이방원이 한 것처럼 써놓았다.
이병연(李秉延)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1934년) 충주군지(忠州郡誌) 산천(山川) 항목에
「御來山在郡西 三十里 ○ 俗云昔裵克廉隱居此山 朝鮮太祖三次御來訪故山之得名以此山下村稱三訪里者亦以是也」라고 나온다.「 어래산(御來山)은 군(郡) 서쪽 30리에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배극렴이 이 산에 은거하였는데, 조선 태조가 세 번이나 친히 방문했기 때문에 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산아래 마을을 '삼방리(三訪里)'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 때문이다. 」라는 뜻이다.
이 내용도 사실무근임을 알 수 있다. 배극렴은 죽기 얼마전까지 현직에 있었다. 아래 첨부한 《조선왕조실록》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관원을 보내 청안현(淸安縣)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 남쪽 기슭 계좌(癸坐: 북북서향)의 언덕에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태조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친히 빈소에 임하셨고, 문하시랑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부인 정경부인 순흥 안씨는 평장사 흥녕부원군 보국숭록대부 판문하부사 집현전태학사 안종원(安宗源)의 딸이다. 부인 김해 김씨는 공의 묘소 왼쪽 축좌(丑坐)에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우(紆)요, 딸은 반자건(潘自建: 백건)에게 시집갔다. 우는 치정(致禎)을 낳았는데 모두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니 대개 공의 뜻이었다. 치정은 휘광(綉光)을 낳았으니 함안군수였고, 휘광은 규정(糾正)을 낳았으니 호는 초암(草庵)으로 유집(遺集)이 있다. 후손들이 영남과 호남에 흩어져 살며 여러 번 전란을 겪었기에 다 기록할 수 없다.
아! 공은 태조의 용잠(龍潛: 임금이 되기 전) 시절 옛 교분으로 태양과 달 같은 밝은 빛에 의지하여 수많은 모책을 내셨으니 마땅히 전해질 만한 것이 많을 터인데, 문헌이 떨어지고 없어져 거의 고증할 곳이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
다만 지호(芝湖) 이공선(李公選)이 지은 《승국신서(勝國新書)》를 보니, "성품이 청렴하고 진실하며, 몸가짐이勤儉(근검)하였다. 진주와 상주 목사를 지내고 계림과 화녕의 윤(尹)을 지낼 때 모두 은혜로운 정치를 펼쳤다. 합포로 출정해서는 성을 쌓고 해자를 파서 유망민을 안정시키고 방어를 잘했다" 고 하였다. 공의 시작과 끝이 대략 다 갖추어졌다 할 수 있으니, 나의 보잘것없는 지식으로 어찌 굳이 한마디를 더 보태겠는가?
[명(銘) 번역]
명(銘)하여 이르기를,
타향의 객(羈旅)과 같은 신하로서,
요순 같은 성군(태조)의 치세를 만났네.
범려(范蠡)처럼 근심하고 저어함에,
공 또한 그러했도다.
한지부장의 화려한 후손이요,
무열공(배현경)을 닮은 자손이라.
풍운의 기회를 만나
대대로 으뜸가는 원훈(元勳)이 되었도다.
아득히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 비문을 거울삼아 밝혀 고증하리라.
숭정 五 무자년(1888년, 고종 25년) 8월 일 세움.
<번역문2>
有明朝鮮國奮忠仗義同德開國靖難公臣大匡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事封星山伯諡貞節公裵公神道碑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兼 經筵官書筵官 潘南 朴性陽 撰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 兼 經筵參贊官手撰官 完山 李垠鎔 書
通訓大夫弘文館修撰 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恩津 宋秉宙 篆
묘소의 길에 나무가 있는데 오래됐다. 진실로 하나의 선(善)과 하나의 능함이 있는데, 실어두려고 갖추어놓지 않으면, 어찌 후세에 전해지는 것을 도모겠는가? 하물며 성산백(星山伯) 배공(裵公)은 훈업이 맹부(盟府)에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 5백년에 오히려 한 조각 돌에 감당할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내가 일찍이 괴상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공의 후예 제홍(濟弘)이 나를 찾아와서 썩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돌아보니 이 노인이 머리가 비어있고, 각(閣)에 필연(筆硯)이 오래됐을 뿐 아니라, 기·송(杞·宋)과 같아 고증할 수 없으니¹⁶⁾ 어찌 할까? 또한 생각해보니, 우암선생이, 그 제거하고 추대할 때에 관련된 한신재(韓信齋)¹⁷⁾ 문자(文字)를 찬(撰)하는 것을 긍정하지 않았으니, 말을 지어보내는 것이 어려움이 있다. 아득한 나와 같은 후생이 어찌 감히 붓을 적시겠는가? 이에 제홍이 민망하게 여기고 물러갔다.
이에 행장을 가져와서 보여주는데 인선군 정공(寅善君 鄭公)이 찬한 것이다. 이는 손수 적은 문서이니 부끄러움이 없다. 살펴보니 공의 휘는 극렴(克廉)이요 자는 양가(量可)이다. 가계는 성산(星山)이요, 신라 공신 한지부장(韓祗部長)이니 휘 지타(祗沱)가 그 시조요. 여러 대를 전해내려와 태사(太師) 휘 현경(玄慶)이 고려태조 원훈(元勳)이 되어 시호를 무열공(武烈公)이라. 5세를 내려와 휘 천룡(天龍)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후손 휘 실(實)이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됐으며, 후손 위준(位俊)이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인경(仁慶)에 이르러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지니 즉 공의 6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각(恪) 지후(祗候)요, 할아버지는 휘 경신(勁伸) 재신(宰臣)이요, 아버지는 휘 현보(賢輔) 위위소윤(衛尉少尹)이다. 어머니는 성주 이씨로 전객부령(典客副令) 천년(千年)의 딸이다.
공은 충숙왕 을해에 태어나서 뜻을 경세(經世)에 두었는데, 지략(智略)이 남을 뛰어넘었다. 집은 성주 서문밖에 있었는데, 목책으로 시내를 둘러쌓아 백성들이 그 이득을 입었다. 지금 배천(裵川)·배야(裵野)·배리(裵里)·배정(裵井)이라 일컬어진다. 우리 태조와 더불어 동갑인데, 본디 포의(布衣)의 묵계(默契)가 있었는데, 태조가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에 천거했는데, 잣나무를 관아 북쪽에 심었다. 진주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여 소공(召公)¹⁸⁾의 잣나무가 감당나무(甘棠)¹⁹⁾에 비견되듯 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불렀고, 정공(鄭公: 정문원)이 나를 위해 서문을 지어주었다.
-----------------------------------------
※원문각주
16)『論語』 「子罕」, 夏禮吾能言之, 杞不足 , ...... 文獻不足故也, 足 吾能徵 矣. 하나라의 예에 대해서 나는 말할 수 있으나, 기나라에 대해서는 고증(考徵)할 수 없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족하다면 나는 그것을 고증할 수 있다.
17)한신재(韓信齋) : 한상경(韓尙敬1360~1423)의 호. 본관은 淸州 시호는 文簡.
18)소공백동(召公栢同) : 원문이 與召公栢同比於甘棠이다. 詩經 國風 召南 甘棠에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란 구절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 古跡조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시중백(侍中柏) 정이오의 시중백 시의 서문에, “시중백이란 것은 개국공신 좌시중(開國功臣左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심은 것이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공이 진주에 목사로 와서 일으키고 세운 것이 많았다. 고을에 온 다음 해에 산중에서 어린 잣나무를 옮겨다가 관아 북헌(北軒)에다가 심었다. 그가 임기가 차서 갈려 간 뒤에 진주 백성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았다. (侍中柏。鄭以吾《侍中柏詩序》:“侍中柏者,開國功臣、左侍中裵克廉之植也。至正癸卯公出牧于晉,多所樹立,明年移稚柏于山中,植公衙北軒。及瓜而去也,晉之民慕公之德,愛其柏若召公之甘棠焉。)》
19)감당(甘棠): 팥배나 팥배나무의 총칭. 『詩經』 「國風 召南」의 편명. 召伯을 사모한 노래.
20)정이오(鄭以吾1354~1434) :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粹可, 호는 郊隱·愚谷, 본관은 진주,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1410년(태종 10) 『太祖實錄』 수찬에 참여했다. 1413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지공거를 겸했으며, 찬성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文定이고, 저서로는 『郊隱集』, 『火樂庫記』 등이 있다.
-------------------------------------
데, 왜적을 쳐서 여러 번 이겨, 안장과 말을 하사받는 영광을 입었다. 곧 문하찬성으로 중국에 정초의 축하사절로 나아갔다. 임신년 7월에 이르러 한 둘의 동료들과 더불어 상주(上奏)하기를, 하늘의 시기가 아 태조(我 太祖)를 추대한 다했으니, 당시 사실이 국승(國乘)에 저술되어 있어, 상고하여 알수 있다. 임금이 등극하자 좌시랑(左侍郞)으로, 개국일등순적덕병의보조공신(開國一等元勳 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에 책봉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식읍 천호(千戶)를 받았으며, 단서철권(丹書鐵券)에 실려있다. 태종이 선위를 받자, 시대가 태평할 때는 적자(嫡子)를 옹립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을 으뜸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하늘의 뜻이 풀어주고 깨우침을 주어, 죽음에서 한 등급 줄여, 청안에 안치되었다. 머지 않아 죄를 사해주는 은혜를 입었는데, 이로 인해서 충주(忠州)의 들²¹⁾에 물러나 살았다. 태종이 방문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 마을을 불러 삼방리라하고, 그 산을 부르기를 어래산이라 한다. 태종이 공신을 찬양하고 교지를 주는 가운데 특별히 말하기를 “배극렴은 주(周)의 공화(恭和)이며, 한(漢)의 소조(蕭曹)²²)이다.”라고 했다. 신사년(辛巳年 1401년) 9월 8일 졸하니 67세라 조회를 3일간 철회하고 소선(素膳)을 7일 간 먹었다. 정절(貞節)이라 시호를 내리고, 관청에 청안현(淸安縣) 가까운 서쪽 두타산 대아봉(頭陀山 大雅峰) 남쪽 기슭 계좌(癸坐)의 언덕에 예장하라 명했다. 임금이 비통해하심이 자못 심하여, 친히 빈소를 찾았으며, 문하시랑 김사형(金士衡)에게 제사를 시행하라고 명했다.
배필은 정경부인 순흥 안씨로, 평장사 순흥부원군 보국숭록대부 판문하부사 집현전 태학사 종원(宗源)의 딸이다. 배필은 김해김씨로, 공의 묘 좌측에 부장(祔葬)했다. 1남 1녀를 낳았다. 남아는 우(紆)이며, 딸은 반자건(潘自建)에게 시집갔다. 우(紆)는 치정(致禎)을 낳았으며, 함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대개 공이 명했기 때문이다. 치정(致禎)은 수광 함안군수(綉光 咸安郡守)를 낳았다. 수광(綉光)은 두정(糾正)을 낳았으니 호는 초암(草庵)이요 남긴 문집이 있다. 후손은 영남 호남에 흩어져사는데 여러 번 전쟁의 화재를 입어 다 기록할 수 없다. 아! 공이 용잠(龍潛)²³⁾의 옛 묵계(默契)를 가지고, 해와 달의 빛에 의지하고 붙어, 다소 모색하고 계획했던 것이, 마땅히 전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나, 문헌
-‐------------------------------------------
※원문 각주
21)충주의 들: 지금의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당시 여기가 충주목에 속해있었음.
22)소조(蕭曹): 漢 高祖의 功臣인 蕭何와 曹參.
23)용잠(龍潛): 임금이 될 사람이 아직 즉위하기 전을 일컬음.
--‐------------------‐-------------------
이 없어지고 없어져서 거의 고증할 만한 것이 없으니 문득 어찌하리오? 다만 지호(芝湖) 이선(李選)²⁴⁾ 공이 찬한 『승국신서(勝國新書)』²⁵⁾를 살펴보면 “성품이 청렴하고 삼가하며, 자신을 처신하는데 근검하다. 진주(晉州)와 상주(尙州)의 목사를 했다. 또한 계림(鷄林)과 화녕(和寧)의 윤(尹)을 했는데, 모두 은혜로운 정치를 했다. 합포(合浦)에 군사를 보내 성을 쌓고 성황당을 열어(
원문은 築城開隍인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황당(城隍堂)의 황(隍)은 城을 둘러싼 못인 해자(垓子)를 말한다. 따라서 城을 쌓고 垓子를 팠다는 뜻이다.)
유랑하고 도망다니는 사람을 편안히 모아 지키고 방어하는데 잘 활용했다. 공에 대한 전말은 대략 일컬어 모두 다한 것이리라. 내가 소루(謏陋)하게 또 어찌 한 마디 말을 군더더기로 추가하랴?
명(銘)하여 이르노라.
나그네 신하(羈旅之臣)²⁶⁾의 몸으로,
요순(堯舜) 같은 태평성대를 만났네.
범중엄²⁷⁾(范老)이 나라를 근심하고 삼갔듯,
공(公) 또한 그렇게 말씀하셨네.
명문가의 화려한 후손이요,
조상의 무공(武功)을 쏙 빼닮은 훌륭한 후손이로다.
풍운(風雲)의 운회를 만나,
대대로 이어질 으뜸가는 공훈을 세웠네.
아득히 먼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이 글을 거울삼아 비추어 보리라.
(以羈旅臣, 逢堯舜理. 范老憂畏, 公亦云爾. 韓祗華冑, 武烈肖孫. 際會風雲, 奕世元勳. 遙遙千載, 鏡考斯文.)
숭정기원후 다섯번째 무자년(1888년) 8월 일
-------‐---------------------------------
※원문 각주
24)이선(李選 1632~1692): 조선 문신. 본관은 全州. 시호는 正簡. 저서 『芝湖集』.
26)승국신서(勝國新書) :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과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돼있음.
27)기려(羈旅)의 신하: 남의 집에서 손님대우를 받으면서 부하가 되어있는 사람.
28)범노우(范老憂): 범자(范子)는 송(宋)나라의 어진 재상 범중엄(范仲淹). 그는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선비는 천하의 걱정을 먼저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한다.(其必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했다.
-----‐---------------------------------------------
※《조선왕조실록》 배극렴 관련기사
■태조실록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2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먼저 이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태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001) 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는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중[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廢)해졌던 것입니다. 우(禑)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廢)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公)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 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위태로운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미혹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본국(本國)002) 이 이미 배반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본국(本國)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疏)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이색·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禍)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하여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정창군(定昌君)003) 은 인아(姻婭)의 관계라는 이유로써 법을 굽혀 두호(斗護)하여 언관(言官)을 곤장을 쳐서 쫓으니,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黨)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變)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책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사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人望)을 수습하고자 하여, 다만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곡진히 더 탁용(擢用)하였으니, 《서경(書經)》의 이른바, ‘달아난 죄수를 수용하는 괴수가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듯, 짐승이 숲에 모이듯 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서 왕을 세울 계책을 결정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으며,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것으로써 말한다면 덕택이 백성에게 가해졌는데도, 이에 좌우에 있는 부인(婦人)과 환자(宦者)의 참소를 지나치게 듣고서 반드시 죽을 곳에 두려고 하고, 사람들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죄를 주니,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들이 뜻대로 되고, 충성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기(氣)가 꺾여져서,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그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요얼(妖孽)004) 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 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註 001] 시좌궁(時坐宮) : 그 당시에 왕이 거처하던 궁전.
[註 002] 본국(本國) : 고려.
[註 003] 정창군(定昌君) : 공양왕.
[註 004] 요얼(妖孽) : 재앙의 징조.
■태조실록1권, 태조 1년 7월 28일 정미 5/5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홍영통·안종원·배극렴·조준·이화·윤호·정도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문하부(門下府)에 교지를 내려 홍영통(洪永通)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안종원(安宗源)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배극렴(裵克廉)을 익대 보조 공신 문하 좌시중(翊戴補祚功臣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으로, 조준(趙浚)을 좌명 개국 공신 문하 우시중(佐命開國功臣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으로, 서제(庶弟) 이화(李和)를 좌명 개국 공신(佐命開國功臣)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도절제사(都節制使) 의안백(義安伯)으로, 윤호(尹虎)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김사형(金士衡)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판팔위사(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判八衛事) 상락군(上洛君)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 봉화군(奉化君)으로, 정희계(鄭熙啓)를 좌명 공신(佐命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팔위 상장군(八衛上將軍) 계림군(雞林君)으로, 이지란(李之蘭)을 보조 공신(補祚功臣) 참찬문하부사 의흥친군위 절제사(節制使) 청해군(靑海君)으로, 남은(南誾)을 좌명 공신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佐命功臣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의령군(宜寧君)으로, 김인찬(金仁贊)을 보조 공신 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中樞院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익화군(益和君)으로, 장사길(張思吉)을 보조 공신 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知中樞院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화녕군(和寧君)으로, 정총(鄭摠)을 보조 공신 첨서중추원사(補祚功臣僉書中樞院事) 서원군(西原君)으로, 조기(趙琦)를 보조 공신동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補祚功臣同知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은천군(銀川君)으로, 조인옥(趙仁沃)을 보조 공신 중추원 부사(補祚功臣中樞院副使) 용성군(龍城君)으로, 황희석(黃希碩)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남재(南在)를 좌명 공신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의성군(宜城君)으로 삼았다.
■태조실록1권, 태조 1년 8월 20일 기사 1/3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서자 이방석을 왕세자로 정하다>
어린 서자(庶子) 이방석(李芳碩)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李芳蕃)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아들이 조금 낫겠다."
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라고 물으니,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여 세자로 세웠다.
■태조실록2권, 태조 1년 11월 24일 신축 1/1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문하 좌시중 배극렴이 병으로 사직하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이 병으로 사직하였다.○辛丑/門下左侍中裵克廉以病辭職。
■태조실록2권, 태조 1년 11월 26일 계묘 1/1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201)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202) 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203)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마음을 돌려 조준 등과 더불어 서로 모의하여 임금을 추대하고는,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었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功)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
○癸卯/門下左侍中星山伯 裵克廉卒。 上輟朝三日, 素膳七日, 命有司禮葬。 克廉, 京山府人, 衛尉少尹玄甫之子。 性廉謹, 持身勤儉。 牧晋、尙二州, 又尹雞林、和寧, 皆有惠政; 出帥合浦, 築城開隍, 安集流亡。 善於守禦, 但戰勝攻取, 非其所長。 及前朝衰季, 歸心於上, 與趙浚等, 協謀推戴, 遂爲首相。 然不學無術, 無所建白, 至於建儲之議, 乃阿上意, 請立幼孼, 自以爲功, 識者歎之。 卒年六十八, 諡貞節。 無子。
[註 201] 소선(素膳) : 어육(魚肉)을 쓰지 아니한 반찬.
[註 202] 경산(京山) : 성산(星山).
[註 203] 계림 윤(鷄林尹) : 경주 윤(慶州尹).
■태조실록2권, 태조 1년 12월 2일 무신 1/1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친히 배극렴의 빈소에 가서, 장례를 주관하던 안순을 불러 조문하다>
임금이 친히 배극렴(裵克廉)의 빈소(殯所)에 나아가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임금이 슬퍼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고 주상(主喪)하는 사람을 불러서 조문(弔問)하였다. 배극렴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누이의 외손(外孫)인 안순(安純)이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戊申/上親臨裵克廉殯次, 命門下侍郞贊成事金士衡行祭。 上悲慟殊甚, 召主喪者弔之。 克廉無子, 姊之外孫安純主喪。
----------------------‐------------------
《승국신서》 배극렴 기사
출전: 국립중앙도서관.
원문
裵克廉 京山府人 衛尉少尹玄甫之子 性廉謹 持身勤儉 牧晉州尙州 又尹鷄林和寧 皆有惠政 出師合浦 築城開隍 安集流亡 善於守禦 但戰勝功取 非其所長
及前朝之季 敎心於上 與趙浚等 推戴 遂爲首相 壬申七月 上登極 克廉以左侍中 策開國勳一等 封星山伯 九月卒 年六十八 輟朝三日 素膳七日 諡貞節 命有司禮葬 十二月 上親臨殯 次命門下侍郞即金士衡 行祭 上悲慟殊甚
召主喪者吊之 克廉無子 [缺]婦之外孫安純 主喪
(박성양의 《신도비명》에는 召主喪者吊之其姊之外孫安純主喪라 써있다. 따라서 [缺]婦는 其姊 같다 .)
克廉在相府 不學無術 所建白至於建儲之議 乃阿 上意 請立幼子 而自以為功 識者歎之
표점정리
裵克廉,京山府人,衛尉少尹玄甫之子。性廉謹,持身勤儉。牧晉州、尙州,又尹鷄林、和寧,皆有惠政。出師合浦,築城開隍,安集流亡,善於守禦,但戰勝功取,非其所長。
及前朝之季,傾心於上,與趙浚等推戴,遂爲首相。壬申七月,上登極,克廉以左侍中,策開國勳一等,封星山伯。九月卒,年六十八。輟朝三日,素膳七日,諡貞節,命有司禮葬。十二月,上親臨殯,次命門下侍郞即金士衡行祭,上悲慟殊甚。
召主喪者吊之。克廉無子,[缺]婦之外孫安純主喪。
(박성양의 《신도비명》에는 召主喪者吊之其姊之外孫安純主喪라 써있다. 따라서 [缺]婦는 其姊 같다 .)
克廉在相府,不學無術。所建白,至於建儲之議,乃阿上意,請立幼子,而自以為功,識者歎之。
번역문
배극렴(裵克廉)은 경산부(京山府) 사람으로, 위위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몸가짐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와 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지내고, 또 계림(鷄林)과 화령(和寧)의 윤(尹)이 되었는데 모두 은혜로운 정치를 펼쳤다. 합포(合浦)로 출정하여 성을 쌓고 해자를 파서 유망민(流亡民)을 안집시켰으나, 방어하고 수비하는 일에는 잘하였으나 단지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을 취하는 것은 그가 잘하는 바가 아니었다. (出師合浦,築城開隍,安集流亡,善於守禦,但戰勝功取,非其所長。)
고려 말기에 이르러 상(太祖 李成桂)에게 마음을 기울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추대하여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었다. 임신년(1392년) 7월, 상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배극렴은 좌시중(左侍中)으로서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9월에 사망하니 나이는 68세였다.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 菜食)을 하였으며,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로써 장사 지내게 하였다. 12월에 상께서 직접 빈소에 임어하셨으며, 이어 문하시랑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셨는데, 상(上)의 슬퍼함과 애통함이 매우 심하였다.
상주(主喪者)를 불러 조문하셨는데, 배극렴은 아들이 없어 [결락된 문맥: 딸/부인] 외손자인 안순(安純)이 상주가 되었다. (召主喪者吊之。克廉無子,[缺]婦之外孫安純主喪。)
(박성양의 《신도비명》에는 召主喪者吊之其姊之外孫安純主喪라 써있다. 따라서 [缺]婦는 其姊 같다 .)
배극렴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배움이 없고 식견이 없었다(不學無術). 건백(建白, 建議)한 바 중 세자를 세우는 논의(建儲之議)에 이르러서는 곧 상의 뜻에 아부하여 어린 아들(방석)을 세우기를 청하고 스스로 공으로 삼았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