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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묵상글 ( 주님 부활 대축일. - 영원의 문을 여는 주님 부활,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 부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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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영원의 문을 여는 주님 부활,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 부활
오늘 저는 강론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영원의 문을 여는 주님 부활,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 부활"
그런데 저는 저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으로 강론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부끄러움이란 제가 아직도 육신 형제들의 영향을 더 받는 점,
그러니까 육신의 형제건 아니건 똑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점입니다.
죽음이 저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게 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지인들의 죽음과 수도원 선배들의 훌륭한 죽음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죽음들에게서 영적인 교훈은 많이 얻었지만,
저의 어머니 죽음에서처럼 죽음이 제게 가까이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이제 저의 육신 형제들이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 있습니다.
누나, 매형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이번엔 제 형이 암수술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니까 그런가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남의 일이 아니었지요.
마침 형의 수술 날이 그저께 성금요일이었습니다.
성금요일에 수술하였으니 주님 부활 대축일에 다시 살아나길 기대했고,
그런 마음으로 성금요일 저는 여느 해처럼 걷는 십자가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걸으며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부활이 고작 육신의 부활이야?!
고작 육신만 치유되는 부활이란 말이야?!
그래봤자 몇 년 더 살다가 죽는 거잖아?!
사실 암은 의사도 고칠 수 있는 겁니다.
요즘은 로봇이 더 잘 수술할 수도 있다지요.
그래봤자 몇 년 더 사는 것이고, 영원히 사는 부활은 아닙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서 어제 로마서를 읽으니 다음 구절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가 바라고 기도해야 할 것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 그 자체가 아니고,
하느님 없이도 기사회생하는 부활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이 부활 대축일에 가장 바라고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서 부활하시는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가 오늘 로마서가 얘기하듯 바로 이것이지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냐고 묻는데 저는 또 한 번 부끄러움 느꼈습니다.
솔직히 제가 그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정도로 알았지
주님과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아주 밀접하고 인격적인 세례는 아녔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죽고 이렇게 부활해야 주님과 함께 영원히 부활하게 되겠지요.
사실 하느님의 창조와 주님의 강생과 우리의 세례와 부활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다가 끝나라고 창조하지 않으셨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라고
오시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고, 죽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고,
그것만을 위해 주님이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내려오실 필요가 없지요.
주님께서 오시고, 가르치시고, 죽으신 것은, 이 세상에서는 물론 저세상까지,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영원히 우리가 행복하게 살라심이며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으니” “저 위의 것을 추구하라.”고 얘기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하늘과 영원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 세상에서 하늘과 영원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영원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고 하늘의 문을 열어주셨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을 갈망하고 저 위의 것을 추구합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내 옆에는 지금 누가 있습니까?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지금 한창 푸르러지는 나무들보다 더 활기차시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들보다 더 아름다운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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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고대 동방의 자연 종교에서 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신화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집트의 신화 오시리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탐무즈, 가나안의 신화 바알, 그리스 신화 아도니스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신들의 드라마는 대자연의 순환 현상에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종교 의식은 이런 신들의 소생을 성스러운 표현으로 현실화함으로써 유목민과 농경민들에게 더 없이 중요한 자연의 생명력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계시는 처음부터 이런 신화와 종교의식과는 무관합니다. 부활에 대한 성서적 개념은 불사(不死)에 대한 그리스적인 개념과는 다릅니다. 그리스적 개념에 따르면 사람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썩지 않는 것이어서, 죽음으로 인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신적인 불사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반면에 성서적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전 인격체가 현상태로는 죽음의 지배하에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혼은 저승의 포로가 되고 몸은 무덤에서 썩는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렇지만 이 상태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치 묻혀 있던 땅에서 다시 일어나듯이, 깊은 잠에서 다시 깨어나듯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구약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고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맏이로(콜로 1,18) 부활하신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희망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구렁에서 건져내시고(시편 103,4)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시편 41,3; 80,19). 즉 사람들의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몸을 썩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시편 16,10-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인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것을 단순히 믿는 데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의 신비가 하느님께로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받고 있는 당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이 권능을 여러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나타내셨습니다. 즉 야이로의 딸(마르 5,21-43; 마태 9,18-26; 루카 8,40-56), 나인의 과부의 아들(루카 7,11-17), 예수님의 친구 라자로(요한 11장)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들은 부활에 관한 예언과 성서 말씀이 첫째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요한 20,9).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은 그들을 실망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부활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활의 체험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빈무덤을 발견했다는 체험만으로는 그들을 확신 시키는 데 부족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시체를 옮기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빈무덤 앞에서는 제자들 중에 요한만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입니다(요한 20,8).
주님의 부활은 우리 각자에게 야기되는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여 줍니다. 우리 신앙의 첫째 자리인 이 부활은 또한 우리의 희망의 토대이며 희망의 목표를 결정지어 줍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는 죽었을 지라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요한 11,25). 이런 부활의 근본적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실존을 결정합니다. 이 확신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원천입니다.
얼마전 뜻하지 않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의 참사로 희생된 고귀하고 소중한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말할 수 없는 충격과 비탄에 잠겨 있는 유가족과 친척 그리고 지인들이 하루 빨리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다시 일어 설 수 있기를 이 부활 대축일에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프랑스 작가 샤또브리앙의 첫영성체
그 솔직한 고해를 한 후에 저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어린아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의 선생님과 심지어 저의 동료학생들 조차도 저에 대해 놀라와했습니다. 뭔가 어떤 이상한 느낌이 그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었습니다. 저의 얼굴과 모든 행동으로부터 명랑하고 만족스러운 빛이 비쳐 나왔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성 교회에서 성체성사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에 저는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마음 속에 무엇을 느꼈는지는 하느님과 제 자신만이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의 입으로도 그것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더우기 저는 모든 동료들 중에서 가장 허름한 영성체복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슬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저는 기뻐했읍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겸손을 사랑의 주님께 바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빵과 포도주의 겸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 주시는 하늘과 땅의 왕이신 주님께 나 자신을 바쳤습니다. 성찬식 때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 것이 제게 있어서는 마치 저의 어머니가 옆에 같이 계신 것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을 벌려서 성체를 받았을 때 저는 저 자신이 축복을 받은 상태로 변한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감격과 경외심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저의 마음에 불을 붙여 주셨기 때문에 저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공경하기 위해 마치 순교자처럼 기꺼이, 즐겁게 저의 생명을 바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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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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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그렇다면,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혹 여러분도 그분이 어디에 모셔졌는지 모르십니까? 진정,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부활하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부활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지?’를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당연히 무덤에서 벌어집니다. 곧 죽음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 없이는 부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 삶 안에서 죽음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냥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으로 건너가는 죽음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대체 왜 죽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모든 죽음의 공통적이고 일차적인 이유는 ‘태어났음’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서는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탄생이 죽음의 제1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예외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바로 이 분에게서 드러납니다.
이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탄생의 결과라고 말하기보다,
그분이 죽을 수 있도록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탄생’이 발생했다는 것은 탄생이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분명 이 죽음에는 탄생이 있습니다. 곧 탄생에 죽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탄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죽음이 부활의 새로운 탄생이 됩니다.
여기서는 탄생, 죽음, 부활이 하나로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이 참 생명을 인간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이 얼마나 크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신비인지요!
이를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시고 잉태되셨다. 그리고 세상은 만들어졌다.”
그러니 ‘못 박힘’은 성령으로 날인되어 잉태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잉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무덤으로부터 부활한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합니다. 곧 우리는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41-42)
그러니 우리에게는 부활을 삶으로 증거 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 봅니다. ‘이 부활’, ‘이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러한 삶을 파스칼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까지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통과 죽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고통받고 죽으면 부활을 맛볼 것입니다. 고통 받기를, 죽지를 거부하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안에 사랑의 순교가 자리 잡으면, 곧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면 그 안에서 함께 죽으시면서 함께 살아계신 그분의 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지금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죽음 가운데 있고,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의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고통과 죽음의 삶 한가운데 모셔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 안에 살아계신 야훼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 동행하시며 저희와 함께 부활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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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도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충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에서 매 순간 다시 살아나길 희망하며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정을 은총과 평화로 감싸주시길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이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사람됨을 확인받게 됩니다. 창세기 말씀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피조물’로써의 존재 조건을 깨뜨렸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곧 물고기가 뭍으로 뛰어나온 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유를 왜곡, 남용하여 피조물의 존재성을 거부하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은 죄의 노예 상태로 살게 되었고 오히려 부자유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짓이나 악을 선택하면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후회하고 가슴을 치게 됩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면 자유가 아닌 속박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만, 영원히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 진리 안에 머물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이며 은총입니다.
매번 강론을 길게 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강론을 시작하면 아예 눈을 감고 쉬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깜박 졸고 있던 신자분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질립니다. 질리고 말고요!”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의 말씀은 결코 질릴 수가 없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5,42-44). 하고 말하였습니다. 부활한 몸과 육적인 몸의 차이는 바로 자유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몸은 제한에 묶여 있지만 영적인 몸은 경계, 한계, 속박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7,19-23). 하고 말합니다. 이만큼 자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선택해야 하고 또 누려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야말로 이미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입니다. 속은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속은 누구보다도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봐야 그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뿐 아니라 이웃과도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삶의 부활은 바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인들의 기쁨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충만성은 사랑으로 죽는 것입니다. 애덕과 사랑을 거느리는 곳, 그런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사랑이신 주님과 하나 되어야 그분과 함께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증오가 그대를 얽어매는가? 용서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기심이 그대를 속박하는가? 사랑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죄가 그대를 괴롭히는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재물이 그대를 집착하게 하는가? 나눠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음이 그대를 두려움에 가두는가? 부활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차동엽).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이 세상에 살던 아무개의 고유성과 인격 전체의 부활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인간성에 대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해묵은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 태어나려면 묵은 생각이나 낡은 틀은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여 무덤이 비었듯이 우리의 마음도 비워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부활을 희망하는 만큼 내려놓을 것은 과감히 내려놓고 삶의 부활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용기와 그리하여 얻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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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부활 축하드립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할까요?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주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일까요?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부활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살아서도 영원히 살고, 죽더라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좋은 추억과 기억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치유된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마귀 들렸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기쁨입니다. 세리, 창녀,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모님에게도 기쁨입니다. 죽었던 아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기쁨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놀라움이며, 기쁨입니다. 믿을 수 없는 꿈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023년 부활입니다. 부활은 축하해야 할 사건이고, 기뻐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희랍어로 부활은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 할까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 있을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삶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났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이야기를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셨던 곳입니다. 많은 이적과 표징을 보여주셨던 곳입니다.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가파르나움,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절름발이, 소경, 세리,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갈릴래아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절망, 아쉬움, 불평, 불만을 던져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편안하십니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 이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탐욕은 남아 있었습니다. 위선과 폭력도 남아 있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하지만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여인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거짓과 탐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위선과 폭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변해 있었습니다. 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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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탈리아 과학자 새무엘 마코라는 럭비 선수들을 대상으로 탈진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마음이 근육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최대 에너지의 80%에 해당하는 강도이자 평균 242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수준으로 약 10분간 사이클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탈진한 상태가 확인되면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즉, 완전히 탈진해서 도저히 사이클 페달을 밟지 못할 상태가 될 때까지 타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하나둘씩 포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연구진은 딱 5초만 더 힘껏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5초 동안 그들은 평균 731와트의 전력을 생산했습니다. 마코라 박사와 그의 연구진은 선수들이 포기한 이유가 근육이 물리적으로 운동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노력이 최대치에 이르렀다는 자각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연구 내용이었습니다. 최대로 노력했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나면 그때가 되어서야 여전히 더 노력할 힘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지요. 이처럼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노력해도 안 된다며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힘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셨고, 특히 당신의 부활을 통해 충분히 용기를 낼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포기를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고 다시 해 본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포기했을 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당신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커다란 슬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작용해서 사람을 피해 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무덤을 비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과 함께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힘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 부활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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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운명을 개선해 주지 않을 것이다(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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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사랑, 믿음, 희망-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한 아드님을 하느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우리는 평생 매일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더불어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 가사와 곡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비단 부활대축일뿐 아니라 평생 매일 불러도 좋겠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의 오늘이 이날이요 부활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부활 성야미사시 ‘파스카 찬송’에 이어 오늘 복음전 부속가는 또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수십년동안 마르코 수사님이 불러오다가 이번 부터는 라우렌시오 수사님이 부르게 된 것도 각별한 느낌입니다. 다음 부분이 더욱 파스카의 기쁨을 더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그의 무덤을 부활하신 분의 영광을
목격자 천사들을 수건과 옷을 내보았노라.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우리 각자 삶의 현장을 상징하는 갈릴래아가 바로 살아계신,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기쁨이 온누리에 가득합니다. 만발했던 봄꽃들이 봄비에 지자마자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나뭇잎들이 꿈꾸듯 펼쳐집니다.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꿈이 신록의 기쁨, 신록의 꿈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얼마전의 깨달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 좋은 분이 선물로 딸기를 사왔는데 순간 집무실을 딸기 열매 향기로 가득 채웠고 저절로 나온 사랑의 덕담입니다.
“어, 꽃만 향기가 있는게 아니라 열매도 향기가 있네요!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나뭇잎처럼, 꽃 향기보다 더 좋은 열매 향기가 자매님 사랑의 향기같습니다. 파스카 주님을 닮아 익어 갈수록 아름다운 삶의 열매 향기이겠습니다.”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드린 수녀님과 나눈 사랑의 덕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런 진정성 가득한 사랑의 덕담이 서로를 자유롭게하고 행복하게하고 향상시킵니다.
“신부님,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수녀님이 필요합니다!”
흡사 선문답같습니다. 달리 필요한 것이 없어 즉각 솟아 나온 답변입니다. 아주 예전 어느 수녀님과의 문답도 생각납니다.
“신부님,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수녀님을 좋아합니다!”
달리 먹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기에 얼떨결 대답했고 만족했습니다. 수녀님이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주님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느냐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주님 당신 하나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은, 단하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실 파스카의 주님뿐일 것입니다. 바로 저는 이것을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배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파스카의 주님과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대화입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말했다. 너는 무슨 상급을 받기를 원하느냐?
(You have spoken well of me, Thomas. What is your reward to be?)
“오직 당신뿐입니다. 주님!”
(Nothing but youself, Lord!)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답변이 정말 멋집니다. 이 대답 말고 무엇이 있겠는지요. 어제 어느 좋은 분이 수도원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초콜렛 작은 것 한갑씩 나눠주라 선물했고 둥그런 작은 종이에 영어 한마디, “For you(너희를 위하여)”가 한눈에 들어 왔고 즉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 “I AM”(나는 있다)”라는 불완전한 하느님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에 “For you(너희를 위하여)”를 붙여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또 하나 “With you(너희와 함께)”를 붙여,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를 붙여야 온전한 하느님의 이름이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있는 임마누엘 하느님은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날 자리는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이 아니라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 갈릴래아입니다. 어떻게 하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을 살아갈수 있을까요? 그 답을 알려드립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의 빈무덤 소식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간 제자는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여기 나온 세분 모두가 예수님 사랑에는 막상막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단연코 돋보이는 인물은 애제자 요한입니다. 저는 익명의 애제자를 요한이라 부르겠습니다. 그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빈무덤에까지 달릴 때 수제자 베드로보다 앞섰고, 도착한후 수제자 베드로 뒤에 따라 들어감으로 겸양의 사랑이 빛납니다. 다음 한마디가 애제자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입증합니다.
‘그제야 무덤에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전광석화, 빈무덤을 보는 순간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의 부활을 직감한 애제자 요한입니다.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폰토스 왕국 국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젤라 전투에서 간단히 이기고 나서 원로원에게 보낸 편지의 전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여기 애제자의 경우는 “왔노라, 보았노라, 알았노라”가 적절하겠습니다.
둘째,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증언이요 믿음의 선포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그 모범입니다. 예전의 유약했던 배반자 베드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난후 수제자의 위상을 완전히 회복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베드로가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한 설교로 베드로의 설교들 가운데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사건이 잘 요약되어 있고 루가의 신학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확신에 넘친 고백이 그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용사가 된 베드로요 우리의 믿음에도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만났다면 믿음의 선포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이래야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살 수 있겠습니다.
셋째 희망입니다.
희망의 샘에서 샘솟는 사랑이자 믿음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주님 사랑에, 주님 믿음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초연하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삶은 천상 희망을 향한 순례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인 애제자 요한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주인공인 베드로가 주님을 증언했다면, 오늘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가 파스카 주님께 희망을 둘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 파스카 예수님이 바로 우리 의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입니다. 바오로의 강론이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어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것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땅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말고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파스카 예수님께 희망을 둘 때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속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얼마나 놀랍고 새로운 충격적 고백인지요. 우리의 희망이자 우리의 생명이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바로 우리 생명의 열쇠이자 행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파스카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날로 깊어질수록 파스카의 생명과 기쁨 충만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다시 한번 고백하고 싶은 파스카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희망,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 희망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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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평안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전쟁이 없는 세상, 기아가 없는 세상, 폭력이 없는 세상, 불공평이 없는 세상…. 아마도 개인마다 그 평안함의 기준이 달라서 천차만별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이런 답도 나올 것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건강한 것, 권력과 재력을 가진 것, 아무 일 없이 평안하게 지내는 시간….
이런 내용을 ‘평안함’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여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라고 말입니다. 과연 우리 주님께서 여인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신 평안함은 무엇일까요?
분명 여인들은 마음은 그리 평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스승님이신 주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위로셨던 주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여인들은 더 이상 위안과 위로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의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그 어깨마다 힘겨운 짐들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평안하냐?”라고 물으십니다.
과연 주님의 ‘평안함’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함은 절망이 일어나지 않는 평안함이지만, 주님의 평안함은 절망 속에서도 다시 희망하는 평안함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함은 어둠이 없는, 늘 찬란한 평안함이지만, 주님의 평안함은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걸어 나가는 평안함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어오십니다. “평안하냐?”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빛이 되고, 부활의 새 생명이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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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십자가
이곳 갑곶 성지 성체조배실에는
부활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끊어진 묵주알과 십자가
버려진 작은 성상들을 모아
하나의 커다란 십자가로
다시 탄생시켰습니다.
저는 이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나 인생길 안에서 한 번은 꼭!
넘어집니다. 부서집니다. 쓰러집니다. 절망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은 우리에게 등 돌립니다.
어제까지 모든 것을 내어줄 양 살갑던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그렇게 버려집니다.
세상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니까요. 우리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서지고 버려진 우리를.
주님께서는 다시 하나의 커다란 십자가의 한 부분으로
쓰십니다. 다시 살리십니다. 다시 숨 쉬게 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십자가가 조배실에 있습니다.
갑곶 순교 성지의 조배실에 있습니다. 부활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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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9. 주님 부활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빈 무덤에서>
돌아가신 분께서
계시지 않는
빈 무덤은
끝 모를
절망이요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혼돈이지만
되살아나신 분께서
계시지 않는
빈 무덤에서
꺾을 수 없는
희망이 피어오르고
온 누리 되살리는
빛이 퍼져 나오고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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