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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돈
고두현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고두현, [돈]({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랜덤하우스 중앙, 2005년) 전문
돈은 화폐의 순수한 우리 말이며, 그것은 이제 물물을 교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재산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돈은 우리 인간들의 물물교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며, 시대와 지역에따라서 초기에는 조가비, 곡물, 모피, 가축, 칼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화폐를 ‘물품화폐’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진정한 화폐는 금과 은과 동으로 만든 ‘주조화폐鑄造貨幣’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물품화폐, 또는 주조화폐는 그 자체가 소재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상품과 교환되기 위해서는 화폐 자체가 소재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물품화폐와 주조화폐의 불편함을 극복하고 출현한 것이 지폐와 신용화폐인데, 이 지폐와 신용화폐는 다만 명목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그 소재가치는 전혀 지닐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돈은 단지 종이조각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명목가치에 의하여, 부의 상징 자체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돈’이라는 기호가 그 대상(재화)을 압도하고, 돈 자체가 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 21세기는 돈이 돈을 낳고 돈 자체가 진리가 되고 있는 시대이며, 돈만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다 살 수가 있게 된다. 돈은 명예이고 권력이며, 이 돈 앞에서는 그 어떠한 악마도, 제왕도 벌벌 떨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우리 인간들은 돈을 소유하고 있을 때, 자기 자신이 자유롭고 선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돈이 없을 때, 자기 자신이 비천하고 부자유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돈이 인간과 신을 짓밟아버리고 돈 자체에 의해서 모든 진리가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의 기원으로서의 부는 먹고 살 걱정을 없애주기도 하고, 아름다운 옷과 훌륭한 선생 밑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문의 기원으로서의 부는 눈 앞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서 비굴한 굴종과 아첨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고,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거나 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돈은 시간과 여유와 좋은 영양과 멋진 건강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다른 한편, 제3세계인들의 특징인 감정의 열렬한 폭발과 험상궂은 인상, 그리고 어렵고 힘든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멋진 아내와 애인과 세계일주 여행, 무한히 맑고 푸른 바다와 호수에서의 수상스키와 보우트 놀이, 알프스의 설원과 로키산맥에서의 사냥과 스키놀이, 사르트르 대성당에서의 주말 예배와 푸른 초원에서의 승마와 골프, 이집트에서 남 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아프리카 대륙의 횡단여행과 멕시코공화국에서부터 안데스 산맥을 따라 고대 잉카 유적지의 답사 여행 등----, 돈의 위력은 무소불위이고, 그것의 영향력에 따라서 하늘의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의 힘이 증대되어 간다고 할 수가 있다. 돈은 가난한 학자의 길을 활짝 열어줄 수도 있고, 건강을 잃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노인들에게마저도 커다란 위로가 되어줄 수도 있다. 돈은 대 정치가의 꿈에도 나타나고, 돈이 돈을 낳고 돈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투덜대는 대 재벌들의 꿈에도 나타난다. 하루살이 술집 작부의 밑빠진 꿈에도 나타나고, 모든 꿈을 상실하고 악몽마저도 찾아오지 않는 수많은 채무자들의 상실된 꿈에도 나타난다. 제 아무리 청렴결백하고 황금 알기를 돌처럼 알고 있는 현자일지라도 가난 자체가 항상 좋을 리가 없고, 제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생계 자체를 위한 어렵고 힘든 육체 노동이 좋을 리가 없다.”
----반경환, [거짓에의 의지]({행복의 깊이 2}, 도서출판 애지) 에서
고두현 시인은 1963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고, 경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늦게 온 소포}와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가 있다. 그가 시골의 자그만 섬마을 출신으로서 지방의 국립대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곧바로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그만 땅 마지기의 소작농 출신의 자식이거나 자그만 어선 한 척을 소유한 어부의 자식이거나, 또, 그것도 아니라면 하급관리의 자식이거나 영세상인의 자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선 그는 돈에 대한 회한이 많고 그 돈 때문에 단 한 번도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춘문예로 겨우 등단을 하고, 그 즉시, 상경을 하여 살인적인 집값과 물가를 자랑하는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또한, 곧바로 고통 그 자체였을는지도 모른다. ‘돈은 바닷물과도 같고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의 쇼펜하우어가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욕망론은 자기 자신의 말도 아니고, 전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욕망을 배척하고 무소유의 기쁨에서 이 세상의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거꾸로 그 욕망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문제들이 내재해 있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의 대상과 그 주체자를 파괴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신뢰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만악의 근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욕망을 자제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선’이라고 부르고, 자기 자신 이외의 타인들의 욕망은 ‘악’이라고 부르는 너무나도 뻔뻔스러럽고 파렴치한 추태만을 연출해내게 된다. 그는 비교적 부유하고 먹고 살만 한데도 돈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투덜대고,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인이면서도 온갖 탈세와 편법 증여를 일삼는다. 그는 하룻밤의 도박으로 수억원을 날릴 수 있는 재력가이면서도 자선사업에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구두쇠이고, 그는 오직 돈에 대한 신앙만으로 살아가며, 그 뻔뻔스러운 고리대금업을 ‘최고의 사업’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그의 돈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업고, 그는 언제, 어느 때나 미다스왕의 후예로서 만지는 것마다 그 모든 것이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배가 고프고, 또다른 그도 배가 고프다. 부자도 배가 고프고, 가난한 자도 배가 고프고----, 모두들 이렇게 배가 고픈 자들이 모여서 현대사회의 자본의 문화를 형성해나게 된다.
고두현 시인은 돈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라고, 첫 연을 시작하고, 바로 그 다음, “한 세기가 지났다”라고 말한다. 첫 번째 연의 ‘이백 년 전’은 21세기에서 바라본 19세기----쇼펜하우어가 살았던----이며, ”한 세기가 지났다“라는 말은 새천년, 즉 21세기에서 바라본 2O세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따라서 ”한 세기가 지났다“라는 말은 대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은 커녕, 그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염세주의적인 허무와 자기 체념적인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직 새천년의 첨단에서 바라보면, 쇼펜하우어의 연장선상에서,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라는 ’투자의 대가‘,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말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인 것이다. 투자의 대가,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헝가리 태생의 프랑스인으로서 뛰어난 판단력과 소신으로 그야말로 ‘떼돈’을 번 인물이며, 10여 권이 넘는 투자관련서를 출간했던 유명한 컬럼니스트이기도 했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세계적인 투자의 대가로서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는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말은 어느 누구보다도 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면서도, 다른 한편, 돈을 투자할 때는 모든 세계의 주식시장의 특징과 전망을 제대로 읽어내고, 그 싸늘하고 냉정한 판단력으로 좀더 과감하고 대범하게 투자를 하라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라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외치면서도 배가 고팠던 것이고, 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도 그 돈에 대한 욕망을 버릴 줄을 몰랐던 것이다. 고두현 시인은 [돈]이라는 시를 쓰면서도 자기 자신의 돈에 대한 원한 맺힌 저주감정이나 그 욕망들을 사실 그대로 털어놓지 않는다. 그는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그 미학적--객관적 거리를 통해서 타인들의 사유로 자기 자신의 욕망을 슬그머니 대체해놓는다.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이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고두현 시인과 삼팔육 세대인 그의 친구는 다같이 돈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 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너무나도 허전하고 배가 고픈 사람들이기도 한 것이다. 삼팔육 세대란 나이는 30대이며,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1960년대에 출생한 자들을 일컬는 용어이지만, 바로 이 [돈]이라는 시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이라는 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두현 시인은 그의 미학적--객관적 거리를 접어두고, 그의 돈에 대한 욕망을 슬그머니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도 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배가 고팠던 것이고, 이십세기의 투자의 대가 앙드레 코스톨라니도 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배가 고팠던 것이고, 또한, 고두현 시인과 그의 친구 역시도 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배가 고픈 사람들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자본가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첫 번째는 제조업을 통해서 상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파는 것이며, 두 번째는 돈을 투자하거나 빌려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전자의 거래는 산업부문에서의 ‘재화 및 용역거래’이며, 후자의 거래는 ‘자본의 거래’이다. 상품을 사고 파는 행위에 의해서 돈이 오고 가는 것은 경상계정항목으로 계상되고, 자본거래에 의해서 돈이 오고 가는 것은 자본계정항목으로 계상된다. 이 재화 및 용역거래와 자본의 거래는 모두들 경제적 동기에 의해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모든 나라들의 국제수지로 나타나게 된다. 요컨대 국제수지가 적자인가, 아니면 흑자인가에 따라서 그 명암의 희비가 엇갈리게 되는 것이다.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하게 되면 순수한 채권국과 문화선진국이 될 수가 있고, 국제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게 되면 순수한 채무국과 문화후진국이 될 수가 있다. 문화선진국이 될 수가 있느냐, 아니냐의 싸움은 모든 나라들의 사활이 걸린 싸움이며, 요컨대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 앞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선진국들은 산업경제에 의한 제조업을 기피하고, 제3차 산업, 즉, 금융과 서비스 산업에 매달리게 된다. 금융산업은 자본주의의 꽃인데, 왜냐하면 돈이 돈을 낳고, 돈 자체가 진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기차익을 노리고 끊임없이 국제금융시장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헤지펀드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것도 보통이고, 영업의 이익에 의한 배당금과 주식가치의 상승을 노리며 우량기업에 투자하는 장기 자본이 춤을 추고 있는 것도 보통이다. 개, 개인들이 직접투자라는 번거로움과 그 위험부담을 피해서 투자신탁회사나 자산운용사를 통해서 투자하는 간접자본이 활개를 치는 것도 보통이고,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서 더욱 더 크나 큰 이익을 노리고 있는 기업사냥꾼들의 자본이 활개를 치는 것도 보통이다. 또한 기존의 경영권의 방어를 위해서 절치부심하는 자본가와 적대적 인수합병을 위해서 더욱 더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기업사냥꾼들 사이에서, 오로지 ‘백기사 역할’을 자임하면서 더욱 더 크나 큰 주식매매차익을 노리고 있는 자본이 춤을 추고 있는 것도 보통이고, 국제적인 금리와 환율의 흐름에 따라서 외국환을 사고 파는 환투기꾼들의 자본이 춤을 추고 있는 것도 보통이다. 이 모든 국제금융자본의 궁극적인 법칙은 최고 이윤의 법칙이며, 돈이 돈을 낳고 돈 자체가 진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돈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의 상징이며, 진리 그 자체이다. 돈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부른다. 돈은 대범한 사기꾼을 위대한 휴머니스트라고 부고, 모든 검은 것을 흰것이라고 부른다. 자본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인간이며,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이상형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전지전능한 신과 어진 현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교활한 자본가(악마)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좆도 자본가를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고두현시인의 [돈]이라는 시는 돈에 대한 그의 생각이나 주관적 감정을 배재한 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역사 철학적인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 돈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지만, 그러나 돈이 없으면 만인의 평등은 커녕, 오직 인간 차별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문화선진국과 문화후진국의 차이도 그 돈의 유무에 따라서 생겨나며, 문화선진국은 모든 특전과 특권을 향유하게 되지만, 문화후진국은 모든 특전과 특권은 커녕, 오직 가난과 배고픔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돈이 없으면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보다 넓고 깨끗하며 쾌적한 주거환경과 그리고 그 존재론적 근거를 잃어버리고 이 세상을 떠돌이--나그네처럼 표류하게 된다.
‘돈이 없으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오오, 깊고 깊은 단잠을 깨시오, 우리 한국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