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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
출 5: 1-9
하나님은 원대한 계획을 가지시고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살므로 애굽의 왕이 반할 정도로 정직하고 장래에 있을 일을 예언하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가지고 살던 야곱 가족이 더디어 가뭄이 시작되어 양식이 떨어졌고 그로 인하여 야곱은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양식을 구해 오도록 하는 과정속에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결국은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고센이란 지역에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무려 430년동안 살면서 히브리민족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결국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세계를 구속하시려는 뜻을 합당하게 시행하시려고 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음에서 건져내시어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이 지도자 모세와 형 아론을 불러서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의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일러 주신대로 장로들을 모으고 그 일을 고하고 그리고는 애굽의 바로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내 백성을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자신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도로 찾겠다고 하는데 누가 막겠습니다. 내 자식 내가 찾겠다는 데 누가 막겠습니다. 자기 자식을 찾아가겠다고 하는데 누가 감히 막겠습니까? 430년 동안 애굽에 두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고 이제는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 즉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 해석도 있고 영적인 해석도 있는데 성경에서의 애굽은 죄악된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과 같은 죄악된 세상속에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오늘 우리들은 이미 해방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쉽게 내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씨름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적어도 바로는 9가지 큰 재앙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내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곧 보낼 것 같으면서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항복하겠지 했는데 순간만 모면하면 곧바로 약속을 어기면서 내어 보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도할 때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어보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결국 장자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왔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보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도 전도할 때 함부로 달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준비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일을 해내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안된다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한번 거절당할 때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바로는 두 손을 들게 됩니다. 바로라는 것은 사단의 두목과도 같습니다. 사단의 두목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두손들고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그들을 이끌어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내 백성을 보내라"고 했습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애굽에 살아도 별로 불편함이 없이 살았는데 왜 불러내었습니까? 적어도 430년 살았으면 조상들의 생활습성과 문화는 이미 사라지거나 변질되고 애굽의 문화에 깊이 빠져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가나안에 가면 또 다른 문화속에 살아야 할 불편함이 있을텐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세상속에 살 때 어쩌면 더 편안하게 자유분방하게 살았는데 왜 불러내어 우리를 이 어렵고 힘든 길, 골고다 언덕길로 오게 하셨습니까? 별로 좋지도 않은 길 같은 곳에 왜 불렀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통령이 비서를 부를 때 왜 부르겠습니까? 목적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부장이 과장을 왜 부르겠습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선수를 왜 불렀겠습니까? 그를 주맴버 또는 교체선수로 뛰라는 명령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명령을 받은 선수는 감독에게 뭐라고 할까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라고 한 목적은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절기의 번역을 공동번역에서는 '축제'라고 했는데 축제는 예배를 뜻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사흘 길쯤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릴 수 있도록 보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희생은 바로 제사를 의미합니다. 제사는 곧 오늘의 예배를 뜻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킬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목적은 단순히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정치적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순히 삶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자유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죄에서 구속하시고 자유함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정결한 삶을 살고 죽어서 천국 가도록 하기 위함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해방시키신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귀환했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것이 성전이었고 그 성전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는 다시 재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해방을 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이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더 좋을텐데, 살아가는데 별 무리없이 살수 있을텐데 괜히 절기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해방하려고 했다가 해방은 고사하고 오히려 근로의 조건이 까다로웠고 힘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벽돌 구울 때 짚을 주어서 만들도록 했으나 바로가 화가 나서 이들이 일이 쉽고 한가하니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하여 짚을 주지 않고 그러면서도 하루의 의무량은 똑같이 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콩쥐팥쥐에 나오는 못된 팥쥐의 엄마처럼 자기가 낳은 딸을 데리고 놀러가면서 콩쥐에게는 밑빠진 독에다 물을 다 채워놓고 오라고 했으니 이런 심보가 바로 팥쥐 어머니의 심보가 아닙니까?
가끔 부모님이 예수 믿지 않은 가정에서 예수를 믿을 때 부모님들이 자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일감을 주면서 그 일을 다 해놓고 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다 보면 예배드리는 시간이 이미 지나고 그래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의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 중에 예배드리러 나오는데 이런 고퉁을 겪으며 어렵게 나오신 분 계십니까? 그런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것이며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일을 왜 허락하셨습니까? 일상적인 일에서 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일상적인 일에서 해방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날에 빠짐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도 우리를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가 가장 기본이요 가장 우선이요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귀히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셔서 예배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 찬양예배도 예배입니다. 수요예배도 예배입니다. 구역예배도 예배입니다. 가정예배도 예배입니다. 적어도 예배라는 이름으로 회집하는 회집에는 최선을 다해 참여하십시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윗과 야곱의 예를 들겠습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다가 큰일 만난 사람이 창세기 35장에 기록되어 있는 데 주인공은 야곱입니다. 34장에 보면 야곱의 하나뿐인 딸 디나가 세겜 사람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이때 누이동생이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빠들이 세겜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속이고 할례를 받도록 해놓고는 칼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멸절시켰습니다. 야곱은 걱정이 태산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인구가 많고 자신은 근근히 외삼촌집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올라가는데 기껏 해봐야 자기 아들들과 부인 그리고 종들 조금밖에 없는데 그들이 몰려오면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아 야곱아 벧엘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거기 가서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 네게 나타났던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이 말씀은 네가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라는 것입니다. 네가 세겜땅에서 돈 좀 번다고 살기 좋다고 그곳에 머물면서 예배를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 이런 화를 당합니다. 가정에 우환이 생깁니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도덕이 무너집니다. 도적이 무너지면 우상들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집에 어느 새 우상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이 이미 집을 떠날 때 자기 아버지 집의 드라빔을 안장에 숨겨왔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짓이라도 우상은 버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치 않음으로 야곱의 가정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곧바로 시행했습니다. 자녀들과 종들에게 선언합니다.
"너희 중에 우상을 버려라. 그리고 영적으로 자신들을 정결케 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가족들이 있습니까? 야곱처럼 강권적으로라도 벧엘로 올라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우상은 버리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있는 것 가운데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예배드리는데 방해되는 것, 여러분의 자녀들이 보아서는 안돼는 것 등은 다 불에 태우든지 없애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의 옷을 바꾸어 입으십시오. 야곱이 그동안 돈에 정신없었고 사랑에 빠져 정신없어 예배를 소홀히 여겼고 우상을 없애지 못한 결과가 가정의 도덕이 문란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 즉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예배를 드림으로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35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할렐루야! 예배하는 자가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을 지켜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무엘하24장에 보면 다윗이 순간적으로 교만에 빠집니다. 즉 그동안 자신 주위의 나라들, 특히 블레셋을 치고서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오, 반석이시오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방패시라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은 교만한 마음으로 신하들도 이상하게 여기는 전국 인구조사를 무려 9개월이 넘도록 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니 당장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무려 13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다윗이 인구조사를 끝내고 곧바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제가 미련하여 큰 죄를 저질렀나이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다윗과 직접 대면하지 아니하시고 아침에 일어나 선지자 갓에게 말씀하셔서 다윗에게 전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왕은 지은 죄에 대하여 대가를 치루어야 하오니 왕이 선택하소서. 7년 기근과 왕이 대적에게 석달동안 쫓겨다니든지, 아니면 3일동안 온역이 전국에 퍼지게 하든지 셋 중에 골라'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가장 짧은 기간인 3일동안 온역을 택했는데 무려 7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다윗이 생각하기를 이만한 군사면 겁낼 것이 없겠구나!. 어떤 대적도 우리 나라를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3일동안에 7만명이나 죽었으니 겁이 나지 않겠습니까? 이러다간 다 죽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백성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인구가 많다해도 사흘에 7만 명이나 죽는 일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임했는데도 벌써 7만 명이 죽었는데 말씀에 보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심판의 천사가 손을 벌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목욕탕에 가면 수도꼭지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뜨거운 물의 파이프와 연결되어 있고 하나는 냉수 파이프와 연결된 수도꼭지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을 트느냐에 따라 뜨거운 물을 나오기도 하고 냉수가 나오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이 부리시는 천사들이 있는데 백성들에게 복을 주는 천사가 있는가 하면 심판을 내리는 천사가 있습니다. 복을 주는 천사가 우리의 삶속에 머물면 우리가 복을 받고 심판의 천사가 우리에게 머물면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분의 손이 어디에 있는냐에 따라 우리가 복을 받을 수도 심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복의 사자를 향하도록 우리는 항상 예배를 귀히 여기고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항상 복을 가진 천사의 손이 여러분에게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성막
출 5: 1-9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교회가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재미로 교회다니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주는 장소, 감동을 주는 그런 일을 찾아다닙니다. 젊은이들은 감동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감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빠져나가 다른 것에 열광합니다. 춤과 노래에 열광하고 스포츠에 열광합니다. 어른들도 교회를 빠져나가 도박이나 마약, 음란한 죄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를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메말라가서 특별히 좋은 것도, 특별히 나쁜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한 것을 보아도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살인,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대단한 이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도 죽는 것을 많이 보아서 별로 자극이 안됩니다. 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사기를 쳤다, 누가 무슨 죄를 지었다’ 그러면 당연히 분노가 일어나야 되는데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어디에서 부흥회를 한다 그러면 기대감, 한번 가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것이겠지요라고 생각합니다.
전병욱 목사님의 “강점으로 일하라”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일교회안에 30이 넘은 노총각들이 매우 많아서 그들을 보면 참 안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30대 중반의 어느 청년들에게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으면 다리를 놓아줄테니까 한번 말해보라’고 물어 보았더니 어렵게 자기가 좋아하는 한 자매를 말하는데, 그 34살 먹은 노총각이 좋아하는 자매가 스무살의 어린 자매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가나서 ‘네가 변태냐? 원조교제 하려느냐?’라고 힐난했지만 그 노총각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어린 자매를 좋아하느냐하면 어린 자매일수록 잘 놀라고 감격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멋진 야외로 데리고 나가면 “와 멋지네요, 이런데 처음와봐요!” 라고 반응을 합니다. 또 맛있는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비싼 음식을 사주면 “와 놀랐어요 이런 음식 처음먹어 봤어요!”라고 놀랍니다. 데이트 하다가 손을 잡으면 ‘와 놀랐어요 남자손에 이렇게 큰지 몰랐어요!’ 라고 놀랍니다. 이래서 놀라고 저래서 놀라니까 ‘이 여자를 놀랍게 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왜 어린 자매에게 매력이 있습니까? 잘 놀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자매를 만나면 무슨 일에도 절대 놀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데 와 봤어?’라고 물어보면 ‘야 수십번도 더 와 봤다 이젠 지겹다 지겨워’ 음식을 사주고 ‘먹어봤어?’라고 물어보면 ‘이거 코스잖아. 내가 더 좋은데 알려줄까?’ 그러다가 손이라도 잡으면 ‘이제 슬슬 수작을 시작하는군 더러운 놈!’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에 감동하는 사람이다.
보십시오 누가 매력적인 사람입니까? 나이가 들었는데도 잘 놀라는 사람입니다. 누가 매력적인 성도입니까? 잘 놀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놀라서 찬양하고 감격해 하는 사람이 매력적인 성도입니다. 누가 매력없는 성도입니까? 반응이 없는 사람입니다. 찬송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어른들보다 휠신 더 놀라는 것이 많습니다. 꽃을 보고 놀라고, 새를 보고 놀라고 모든 것을 신기해 하고 경이로워합니다. 놀라움, 경이로움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앞에 서는 사람이 정말 매력적인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매력적인 믿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감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예배, 똑같은 찬송, 그리고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말씀이 선포되는데도 늘 감동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찬양할 때마다 가슴이 떨려옵니다. 이런 분은 그 영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영적인 상처를 받으면 영이 눌린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과 구원의 감격, 감동이 사라집니다. 여러분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감동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감동할 수 있는 것, 하나님에 대한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종교라는 영어 단어가 "religion"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의 ‘religio"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원래 ‘묶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종교란 하나님과 인간이 묶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묶이는 것이 바로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까?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어떤 성도가 매력적이고 건강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예배에 삶을 드리는 성도입니다. 삶에 많은 난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얽히고 설킨 문제들이 있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런 문제들을 풀어 나갑니까? 바로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예배로부터 출발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으로 무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를 진정 기뻐하는 성도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무슨 기념식에 참석한 것처럼 지겹지 않습니까? 묵도부터 시작해서 축도까지, 천편일률적으로 예배가 진행이 되고,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찬송을 부를 때, 생각은 따로 겉돌지는 않습니까? 반면에 요즘 영적으로 깨어나는 교회들을 보면 예배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무엇보다 예배에서부터 옵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이 즐거운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배가 즐거워지는 것이 부흥이 임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예배는 한마디로 감격적이어야 합니다. 흥분이 있고 탄성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저는 예배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보다는 전도나 제자훈련, 속회나 선교회 조직등으로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당시 예배는 제게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예배드릴 때도 머리 속에는 일에 대한 생각만 했습니다. 누구는 왔고 누구는 안 왔고 안내는 어떻고 마이크는 어떻고 성가대는 어떻고 예배 시간 내내 일만 생각합니다. 당연히 예배를 드려도 충만함이 없었습니다. 힘은 더 빠지는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 제단이 무너져 있었던 것입니다. 제 목회에 새로운 전환점을 이룬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예배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제가 설교자나 혹은 예배 인도자가 아니라 제 자신이 먼저 예배자가 되고나서부터 저의 예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며 고백하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를 통하여 모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힘을 얻기 되었습니다. 교회의 다른 사역의 부분, 전도와 제자훈련, 속회와 선교회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의 제단이 복구되자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사역의 출발선입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어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두가지를 손에 들고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언약의 표시로 그들에게 두가지 주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들고 온 것이 바로 성막의 설계도입니다. 율법과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두 기둥입니다. 그런데 이 때 만약 모세가 율법만 가지고 나왔다면 인류역사에는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달해야 할 높은 수준의 도덕율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야할 삶의 기준을 보여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를 보고 화가 난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율법이 깨어졌습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그 죄를 용서받고 여전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받는 장소, 상처받고 좌절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회복되는 장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장소가 바로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는 늘 감격이 있었습니다. 회복이 있고, 치료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광야의 성막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토록 성막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것일까요? 하나님은 일부러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불러 사십일동안 함께 있으면서 이 성막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십계명 직접 손을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은 성막을 식양, 설계도를 그려주었고 성막의 비밀을 모세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성막의 목적들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실 곳으로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본문 출25:8을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를 짓는다는 것은 아주 획기적인 개념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지은 건물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부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어디에나 계십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우주도 그 분의 임재를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성막 안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이 특별한 한 장소를 정하고,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인간을 위한 특별한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표현 한다면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면서 동시에 어떤 특정한 장소 안에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우주도 담을 수 없는 그 하나님, 너무나 광대하셔서 하늘조차 감당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 안에도 계실 수 있고, 또 어떤 특별한 장소를 택하여 그 곳에 임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내재하기 위해 택한 장소가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거한다’라는 말은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성막을 세우고 그 안에 거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중에 거하시면서 사람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중에 거했지만, 이제는 아예 하나님이 사람들 속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4:16-17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속에 계시겠음이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심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놀라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막의 위치가 참 의미심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가다가 어느 한 곳에 머무르게 될 때 진을 치게 됩니다. 동서남북으로 세지파씩 나누어서 진을 치는데, 민수기2:17에 보면 성막이 바로 그 진의 중앙에 위치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의 모형입니다. 진의 중심에 바로 성막이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 한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고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하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장막에서 나오면 제일 먼저 그들이 본 것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영광의 구름이 덮고 있는 성막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마18:20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그들 중에”라는 말은 “그들 가운데” 혹은 “그들 한복판에”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 한 복판에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성막이 그들 삶의 중심에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보이는 식양대로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직접 성막을 설계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십계명을 두 돌판에 직접 새겨주신 것처럼 성막의 모형, 성막의 기구 하나 하나를 하나님은 직접 설계하셨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라는 말입니다. 출25:40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또 다시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식양, 성막의 구조는 이러합니다. 성막은 크게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울타리는 흰 세마포 휘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동쪽 문을 열고 뜰 안으로 들어가면 첫 번째로 있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불로 제물을 태워 번제드리는 장소입니다. 그 다음에는 물두멍이 있습니다.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소안으로 들어가면 한쪽에는 금촛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떡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 바로 앞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분향단을 지나 휘장을 열고 지성소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를 덮은 판을 속죄소 혹은 속죄판이라고 말하는데 두 그룹이 조각되어 있고 대 제사장은 그 속죄소에 가지고간 어린양의 피를 붓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흐르는 그 속죄소를 우리는 흔히 “은혜의 보좌”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이 성막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성막에 대해 배울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내가 내게 보여준 식양대로” 성막을 세우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막의 구조, 성막의 기구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중요한 영적인 비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죄 용서받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성막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아무렇게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편리한대로 만들어 놓은 방법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구원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마음대로 이 사람이 메시야다. 저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막의 기구 하나 하나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네게 보이는 식양대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예물을 가지고 오라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집을 지어야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는 성막을 만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은 하늘재료로 지어야 할까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듯이 재료들을 내려주어서 짓도록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도록 하셔서 그것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분문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전에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미군 부대 안에서 먹고 잔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호와 접대를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미군부대에서는 모든 물자들을 미국에서 직접 가지고 와서 사용합니다. 좀 기분나쁘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이 거하실 성소를 당신 스스로 직접 세우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탁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실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자라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일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복되고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중요한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기 전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소유물을 가장 먼저 하나님이 거할 성막을 세우는데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가장 먼저 사용하십시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받을 품목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3-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금과 은, 놋, 청색 자색 홍색 실, 가는 베실, 염소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등등이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은 성막의 어디어디에 이런 품목이 쓰일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바친 것들이 어디에 쓰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막이 완성되어졌을 때 그들은 그들이 드린 보잘것 없는 물건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을 채운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낸 보석이 제사장의 가슴에 붙어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드린 베실이 성막의 휘장에 쓰여졌습니다. 내가 낸 금이 언약궤의 싼 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 하나를 보면 어디에 쓰일지 잘모르지만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상상할 수 없는 귀한 것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유, 우리의 재능이 이렇게 하나님께 사용되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고, 날고 기는 재능이 있어도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낸 재료로 성막을 건축한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자신들을 의미합니다. 성막따로 이스라엘 따로가 아닙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성막이 움직이면 이스라엘도 움직였습니다. 성막이 멈추면 이스라엘도 멈추어야 했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것을 드러내는 표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철저하게 성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을 귀하게 여겼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이 가장 어려운 때는 하나님의 성전을 멀리하고 신앙의 내리막길을 걸을 때였습니다. 성막 생활은 그들의 전 삶을 재는 온도계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 전체를 재는 온도계입니다. 얼마나 예배 중심이냐? 내가 드리는 예배가 살아있는가? 죽었는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드리는 예배라면 그것은 이미 죽은 예배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드리는 헌금, 찬양, 기도등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드리는 삶이 부요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인색한 자는 결국 빈털터리의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예배, 여러분들의 제단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예배의 감격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성막, 곧 우리 부산제일교회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예물로 성막을 세웠습니다. 우리교회는 저와 여러분의 기도와 땀과 눈물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예배에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주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연단 받는 사람
출 5: 1-9
여러분, 하늘을 한번 쳐다 보십시오. 새가 보입니까? 하늘을 날라다니는 새 가운데 왕이라고 하는 새가 뭐지요? 독수리예요. 독수리가 새 중의 왕입니다. 독수리는 독수리이기 때문에 왕이다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독수리 아버지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독수리고 새 중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 새끼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훈련을 받지 아니하면 절대로 새 중의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독수리 부모는 독수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 독수리를 떨어뜨린다 그래요. 그리고는 그것을 내려가다가 퍼득거리면서 올라오고 퍼득거리며 올라오고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새 중의 왕인 독수리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이 훈련을 감당치 못해서 죽는 독수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는 독수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자기의 새끼가 힘이 약하다고 해서 그 새끼를 참새로 키우지는 않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독수리로 살다가 독수리로 죽어라 그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신앙인으로 살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순교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훈 목사님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그래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배신한다고 하는 것은 비극이에요. 우리는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어느 교인의 말이 자기를 자판기에 가서 커피 뽑아먹는 즐거움이 있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날은 더 큰 즐거움이 있었다고 싱글벙글 하더라구요. 왜냐하면 자판기 앞에 갔더니 150원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뽑아먹었잖아요. 세상에 공짜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요.
막 기분이 좋아가지고 커피를 마시면서 몇 걸음 옮기다가 자기의 머리 속에 딱 떠오르는 게 있어 `아차` 돌아서서 가가지고는 200원을 도로 넣었대요. 그거는 고급 커피값입니다. 자기는 200원을 넣어놓고 돌아서서는 더 즐거워하는 거예요. 누가 와서 즐거워하겠지.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보든 안보든 자기의 길 가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멋있고 이런 사람이 신앙인이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선진국 사람들은 뭐가 다르다는 사실을 가끔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물들을 먹는데 지하수 끌어올려서 좋은 물 먹으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10미터와 20미터 사이에서 물을 뽑아먹는다고 그러더라구요. 100미터, 200미터에서 물을 뽑을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10미터, 20미터 그 밑으로 내려가서 먹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래요. 그게 뭐냐면 20미터까지는 우리들이 먹을 물이고 100미터 이상부터는 후손들이 먹을 물이다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선진국민이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멋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예수님이 멋있는 이유가 뭡니까? 인물이 좋아서요? 누구보다 오래사는 장수 때문예요? 아니면 그가 부자였습니까? 아니면 권력자였습니까?
그 예수님이 멋있다고 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살았지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멋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세계를 정복합니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날의 역사까지도 지배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야 됩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 살다가 죽어야 됩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그분은 참 예수였다` 그렇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수리가 독수리일 수 있었던 이유가 독수리가 훈련을 받았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신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에 바로 그 사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 말에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아요. 사람의 가치를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어려울 때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잖아요, 우리 나라도 출전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16강입니다. 아니 한번이라도 본선에서 승리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훈련하잖아요. 하체훈련, 체력훈련도 하고 전술훈련도 하고.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실력을 모르거든요. 그래서 평가전을 하는 거예요. 외국팀하고도 하고 외국의 골드컵에 나가서 출전하기도 하고. 그 이유는 실력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예요. 이런 실전의 과정을 통해서 이들의 실력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거예요. 그 첫째는 자체훈련입니다. 체력훈련, 전술훈련이지요.
하나님은 그래서 모세를 광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론 우리도 광야로 이끌어 내십니다. 그 광야는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고 질병의 고통일수도 있고 대학진학의 실패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할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루이스라고 하는 사람은 `광야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확성기와 같다` 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을 떠나서 정말 아무도 없는 공허한 자리에 있는 바로 그 실패의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인간의 약함을 깨닫고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 은혜받은 내용입니다.
오늘은 실전에의 투입입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갑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광야의 목자입니다. 애굽의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노예의 대표일군입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애굽의 바로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당시의 최고의 나라라고 하는 애굽의 임금을 만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이런 일 하라고 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남들이 볼 때는 변변치않는 신분이지만은 내 마음 속에는 민족을 품고 있어요,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마음을 갖게 만드는것이 하나님이세요.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잖아요. "세상으로 가라" 나 비록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 민족을 가슴에 품게 만드시는 거예요. 신앙만이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만이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런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런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갔지만은 바로라고 암초에 부딪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바로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하시요` 그랬더니 바로는 뭐라 그럽니까? `여호와가 누구냐? 나 모른다. 너희 일 안할려고 게을러서 그런 말 하는구나` 하고 큰 고역을 백성들에게 안겨줍니다.
이럴 때 백성과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20절, 21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보고 `왜 우리를 미움받게 하느냐 너희 잘못을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는 것 너희는 정말 잘못됐으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예요. `주여 이 백성이 왜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하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왜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느냐 하느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를 변화시키던지 아니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서 바로를 이기던지 왜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느냐 그런 얘깁니다.
지난 주일에 출애굽기 4장에 보게 되면 이 모세는 하나님께 얘기합니다. `저는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해요. 10절에 말씀에 `저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이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런 얘길해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렀습니다. `너를 지도자 삼겠다` 모세가 하는 말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로 가리이까` 그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어요. 수퍼맨이 될 줄 알았지요.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거예요. 나 못가겠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주신 다음에도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이 앞에 이렇게 얘기해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보낼 만한 자를 보내라 아니면 나를 보낼 만한 자로 만들어달라 그런 말이에요. 수퍼맨 만들어달라 그 말이에요.
그 전에는 말 못했는데 이젠 말 잘하고요, 그 전에는 극히 인간이었는데 이젠 좀 하나님처럼 능력있게 해달라 그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이런 요구했어요. 그것 때문에 선악과 따먹었어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해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내가 수퍼맨이 되기를 원해요. 목사님도 수퍼맨, 나도 수퍼맨 다 수퍼맨 되기를 원하거든요.
그러다 안되면 당신이라도 되야 될 것 아니냐 하고 이렇게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하나님의 사람을 수퍼맨으로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가 되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쓸만한 자가 되라는 겁니다. 내가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사람의 입은 지었느냐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 아니냐`
있는 모습 그대로 벙어리면 벙어리, 눈먼 자면 눈먼 자 그대로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에요. 문제는 내가 눈먼 자를 통해서 역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꾸 보낼만한 자를 얘기하고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게 뭐예요? 하나님 의지하는 겁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에요. 수퍼맨이 아닙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더 하나님 의지하고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더 드러내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교만하지 마세요. 겸손해야 되요.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같지만은 바로라는 암초에 그냥 부딪치는 거예요. 그저 하나님께서 다 아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 자신에겐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신앙이거든요.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 이 어려움 속에서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 어려움 속에 신앙 고백을 하십니까?
저는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어냐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 알렉산더 왕이 유대나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유대 왕이 하는 말이 "우리에게 은금보화 있는데 얼마나 드릴까요?" 그랬더니 알렉산더 왕이 하는 말이 "나 은금보화는 많다 그런데 너희가 지혜의 나라라, 민족이라 그러는데 너희가 생각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얘기해 봐라"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유대 왕이 정의를 설명을 해요.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폐품더미를 샀다는 거예요. 필요해서. 폐품더미를 싸게 사가지고 집에 와서 폐품더미를 풀려보는데 그 안에 커다란 금덩어리가 있었어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금덩어리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 이 사람이 깜짝 놀래가지고 그 장사꾼에게 찾아갔어요. "여보시오, 내가 폐품을 샀는데 이 안에 금덩어리가 있어요. 나는 폐품을 샀지, 금덩어리를 산 게 아니니까 이 금덩어리를 당신 겁니다" 줬다는 거예요.
장사꾼이 그래요 하고 받아드렸으면 얘기할 게 없는데 이 장사꾼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폐품더미를 팔 때 금덩어리까지 같이 팔았습니다. 그러니 이거 당신 겁니다."했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이만한 금덩어리를 놓고 니꺼다 니꺼다 이러고 다투다가 유대의 랍비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이거 해결해 주십시오. 해결이 되요, 안되요?
그러면 그거 내가 가질게 그러면 되는데 랍비가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당신에게는 결혼할 나이의 아들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결혼할 딸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 러면 이 두 젊은이를 결혼 시키십시다. 사돈 맺으십시다. 그리고 그 금덩어리를 결혼할 새 가정에 주십시다." 합의를 하고 줬다는 거예요.
유대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의 정의입니다. 알렉산더가 뭐라 그랬겠어요? "우리는 힘있는 사람이 정의인데 너희는 그게 정의이구나"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구원이에요. 예수 믿고 구원,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뭡니까? 주안에서 하나 되는 거거든요. 교회가 뭐예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잖아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 그랬잖아요. 그러므로 이 손과 발이 따로 놀면 안되거든요. 서로 협력하는 거거든요. 하나되는 거예요. 이게 신앙의 목표예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목표예요. 성도와 성도가 하나가 되고 성도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삶, 이것이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해요.
여러분 고린도교회는 은사를 참 많이 받은 교인들이 있어요. 그러나 시끄러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 은사를 가지고 내 은사가 크냐 네 은사가 크냐를 다투라고 주신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서로 한몸 되도록 힘쓰라는 거예요.
그래 믿음, 소망, 사람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은 연합, 서로 사랑으로써 내 제자인 줄을 알이라 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우린 그렇게 살아야 되요. 그러기 때문에 나와 성도간의 하나, 나와 하나님간의 하나 되기를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해롤드 쿠스노 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중에-최근에 쓴 책이에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쿠스노는 랍비에요. 자기 회당에 모이는 사람이 2,500명이 되거든요. 이 쿠스노에게 어떤 일이 생겼느냐 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병이 있는 거예요. 알아 보니까 빨리 늙는 조로증에 걸렸어요. 그래서 아이가 크면서 머리가 생기는 듯 하더니 다 빠지고, 왜 늙으니까. 주름이 생기고 그래 12살이 되던 해에 이 아이가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랬어요. "하나님, 내가 나쁜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나쁜 일이 생깁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책에 썼어요.
그 책에 결론은 이거 더라구요. `하나님은 선하시다` 욥의 고난을 보면서 욥의 말이 옳으냐, 욥의 친구들의 말이 옳으냐 이것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왜 우리가 부자가 선이고 반대로 거지가 되는 것은, 가난한 것은 저주예요? 건강한 사람은 축복이고 병약한 사람은 저주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합해 가지고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일 많이 있어요.
여러분 우린 물 없이는 못 살잖아요. 물은 산소와 수소가 합해 이루어져 있어요. 산소는 마시면 좋지요. 그러나 수소 먹으면 죽는 거예요. 그러나 산소와 수소가 합해 지니까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물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어떤 집이 좋은 말이 있었답니다. 아주 좋은 말이에요. 아주 자랑스런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어느 날 우리 문을 박차고 없어져 버렸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실종됐지요. 그래 이 말을 잃어버렸다 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집 정말 재수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웬걸요, 한 1년쯤 지났는데 이 말이 새끼 말을 데리고 돌아온 거예요. `야, 그 집 재수 좋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주인이 하는 말이 `두고 봐야지요`
그 집에는 외아들이 있었어요. 몇 대 손입니다. 몇 대 외아들이에요. 얼마나 귀하겠어요. 그런데 이 아들이 데리고 온 망아지를 타다가 떨어져 가지고 다리를 못쓰는 장애자가 되고 말았어요. `아하, 좋은 줄 알았더니 이게 재앙이구나` 하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은 했어요. 그런데 주인이 하는 말이 `두고 봐야지요`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전쟁이 일어났어요. 마을의 젊은 청년은 전쟁에 가서 다 죽었는데 이 집 아들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대를 이을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또 얘기했어요. `아, 저 집은 정말 복 받았다` 주인은 뭐라 그랬게요?
여러분, 당장 일어나는 일 가지고 좋다 나쁘다가 아니란 말이에요. 세상살이가 그래요. 저는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느껴지는 게 뭐냐면 두도 봐야 한다는 거예요. 더 이것이,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 망하지 않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꺼꾸러뜨림을 당해도요, 망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예요. 이게 사도 바울의 신앙이고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쳐라` 재앙이에요, 축복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은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를 않아요. 그냥 순종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냥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던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뭐라 그랬어요?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너희 민족을 창대케하고 자손대대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어요, 거절하셨어요? 거절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이에요. 그런데 거절을 해요.
우리도요, 주의 일 한다 할 적에 때론 거절당할 때도 있어요. 섭섭해요, 안해요? 어떤 사람은 교회도 떠나더라구요.
그런데 말이죠, 이 다윗은 아무 소리 안해요. `예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묻지 않아요. 왜? 하나님은 선하시니까.
우리는 내 생각대로 되고, 내 신념대로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야 축복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줄로 알지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절을 받아들일 줄 아는 신앙, 그건 딱 하나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렇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그 자손대대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어요. 두고 봐야되요.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연단과 시련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어요. 첫째는 기다림의 축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유안진이라고 하는 시인이 쓴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어요.
제목 :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나는 조금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지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얼마나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두면서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고
더 지긋이 채워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될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의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베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는 유안진 시인의 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다릴 줄을 몰라요. 좀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파란 신호등이 계속될 때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 대단하지요.
그런데 저는 요즘에 빨간 불에 서는 즐거움과 기쁨 속에도 삽니다. 얼마나 그 때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저는 자동차를 오래 타는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차를 바꾸자고 그래도 내가 거절을 몇 번씩이나 했습니다. 새차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차가 튼튼하기 때문에 그래요.
한 10년쯤 되면요, 차 엔진소리도 좀 이상해지거든요. 난 서있을 때 차 엔진소리를 듣습니다. 괜찮나? 엔진소리를 들으면 난 기술자는 아니지만, 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겠더라구요. 평소보다 다른 소리가 나면 빨리 병원에 가야지요. 또 그거 다 끝나면 주유소에서 준 휴지가지고 차 내부 청소도 못하는데 그 때 닦습니다. 라디오도 한번 보면서 점검도 해보고 또 테잎도 바꿀려고 한번 보기도 하고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말하는 것만 복이 아니고 가는 것만 복이 아니고 서는 것도 복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잖아요.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줄 아는 축복도 알고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돌아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는가 말씀 위에 서 있는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가 동역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란 말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잘 돌아가는 기계라고 할지라도 가끔 돌아봐야 해요. 이물질이 낀 것은 없는지, 이물질 하나만 끼어도 기계가 돌아가는데 문제가 생기잖아요.
오늘 우리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완벽하고 바르게 사는 것 같아도 사탄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요. 세상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깨끗함,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는 이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해석을 받아야 되요. 우린 다 성령의 사람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만나실 때 불붙는 가시떨기를 통해서 만나셨어요. 여러분 불붙는 가시떨기는 불이 붙지만 타지 않고 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것을 통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를 불붙는 가시떨기가 되게 하리라`
내게 성령의 불이 있지만 성령이 내게 불을 태우는 게 아니에요. 나를 그냥 불덩어리도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붙는 가시떨기처럼 재가 되지 않고 늘 항상 힘있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 좀 하다 보면 재가 되는 사람이 있어요. 일 좀 하다 보면 재가 되는 사람이 있다구요. 일을 했는데 뭔가 허탈해요. 누가 나 알아 주지고 않고 섭섭하지요. 그것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일을 했는데 성령의 힘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항상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힘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승리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면서 우리를 실전의 현장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실력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를 완전한 신앙인으로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기쁘게 여기세요.
여러분, 깨끗한 물이라도 모아두면 썩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 가지고 나간 물은 한 달이 되도 썩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가지이에요. 파도에 물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아무리 좋은 믿음이라고 하나님이 연단하지 않으면 우린 깨끗함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우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것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기억하고 원망, 불평, 우리가 실족하거나 실패하는 신앙인 되지 말고 주 의지하고 주 안에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의 유혹 세가지
출 5: 1-9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높으신 은혜로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허락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자아시죠? 저희 어머니는 피자를 보고 서양빈대떡이라고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젊은 사람들이 참 좋아하죠!! 그런데 세계에 3대 피자회사하면 피자헛, 도미노, 리틀시저스라고합니다. 저마다 특징이 있는데 피자헛은 “다양한 메뉴”, 도미노는 “남보다 빠른 배달”, 리틀 씨저스는 “싼가격”이라고 합니다. 이런 특징이 세계 1, 2, 3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파파존스라고하는 피자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36세의 젊은 사장 슈네트라는 사람이 파파존스라고하는 피자집을 만들었는데 그 매출이 매년 2배이상 오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파파존스가 기존 피자회사의 기대 이상으로 세계적인 피자회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파파존스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파파존스는 “피자의 본질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피자의 본질이 무엇인가? 두말 할 것없이 맛입니다. 맛으로 승부를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재료, 최고의 맛, 최고의 영양가, 재료나 맛이나 영양가에 있어서 최고를 외치는 것입니다. 피자의 본질의 승부가 소비자들을 감동시키고 미래의 소망이 있다고 얘기를 했어요.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생각해보았어요. 우리의 신앙생활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신앙생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 이제는 다양한 메뉴라던가 빠른 배달, 싼값이라는 것은 다 기본이 된거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교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일이 많이 있지만은 그 주변 것을 다 정리하고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무엇일까? 예배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을 지칭하는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은 높고 사람은 낮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예배 아닙니까? 여러분 예배가 교회의 본질이고 신앙생활의 기본이라는거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도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거에요.
이사야서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예배드리게 하려고 우리 사람을 만드셨어요. 이 예배에 대한 거부가 죄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만남을 거부한 이유가 마귀의 유혹, 그리고 “너 자신이 하나님이 되라”고하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거부한 겁니다. 이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리잖아요. 이 자체가 죽음입니다. 지옥입니다. 반대로 구원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이유가 뭐냐 말이에요. 여러분 천국은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데 있는 건 단하나 하나님을 믿게 하는 거에요. 천국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저 천국!!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거에요. 지옥은 예배가 없어요.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4장에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중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누구를 찾으시느냐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배는 창조의 회복이고 바로 천국의 역사다」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배다.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는 낮아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우리가 높아지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 반대로 하나님을 낮추는 것 바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 바로 예배에 대한 도전과 유혹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은 출애굽의 상황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소리와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애굽의 노예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됐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바로를 찾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보내달라.” 그 이유가 뭡니까? 자유를 달라! 빵을 달라! 아닙니다. 휴식을 달라 그것도 아닙니다. 뭡니까? 예배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내 백성들로 광야로 가서 예배하라.”예배하러 가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다는 거에요. 여러분 모세의 제안에 대해서 바로가 순순히 응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유혹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세마디를 합니다.
첫 번째는 '이 땅에서 제사하라’ 순종에 대한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마라’ 신앙계승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는 '제물없이 제사하라’ 헌신에 대한 유혹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속에는 순종과 신앙계승과 헌신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겁니다. 이것을 하나라도 뺄려고 하는 바로의 마음이었다는 겁니다. 오늘 바로가 예배를 예배답지 못하게 하는 그런 유혹 세 가지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 예배에 이 세 가지를 다시 한번 정립시키고 하나님 앞에 바로설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순종의 유혹입니다.
출애굽기 8장 25절로 27절까지 있는 말씀을 우리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아멘
여러분! 바로가 유혹합니다.
“제사를 꼭 광야에 가서 드려야 하냐 사흘길을 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냥 여기서 제사를 드려라.”
바로는 바로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니다. 그 말은 부당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광야에 가서 제사 드리라 했습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있습니다.
미국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이 예배당은 안오고 골프장에만 가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데요.
“왜 주일에 집사님이 예배당 안오고 골프장에 가시냐고 ”그랬더니 이 집사님이 말하길
“내가요.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골프장이 머릿속에서 그냥 왔다갔다하는데요, 볼을 치는 것, 퍼팅하는 것이 머리속을 왔다갔다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있지만은 마음은 골프장에 가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골프장에 가니까 몸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지만은 이 마음은 계속 예배당에 예배드리는 모습이 자꾸 상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깨달은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그래서 나는 골프장 가기로 했습니다. ”
말이 됩니까? 안됩니다. 얼마나 성경도 잘 들이 대는지..예배는 순종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만 순종이 예배속에 있습니다. 이미 순종에서 승리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울과 다윗, 이 두 임금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디에서 하나님이 복주시고 어디에서 하나님이 벌주셨어요? 예배입니다.
사울임금이 많은 이스라엘 가운데 높임을 받았어요. 왕이 됐어요. 얼마나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를 드려야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은혜받고 전쟁터에 나가야하는데 제사장이 안와요. 사무엘이 빨리안와요. 그러니까 사울임금이 그럽니다.
“자! 기다려도 안오니까 내가 제사드린다. 번제와 화목제 가져와”
자기가 제사장의 몫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분명히 드렸습니다. 사무엘이 이 사실을 알고는 책망을 합니다.
“이건 당신일이 아닙니다. 그건 내게 맡겨진 일입니다. 당신은 나라를 다스리고 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사명입니다. 근데 어떻게 그것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그 후에 아말렛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고 하셨어요. 순종하나 안하나.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는데 조건이 있다. 전리품을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라. 사울이 전쟁을 하다보니까 아말렛에 너무 좋은 제물들이 있어요. 아깝거든요. 그래가지고 좋은 소와 양을 가지고 왔어요. 그때 사무엘이 얘기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하기를 전리품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가져왔습니까?”
라고 하니 하는 말이
“이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려고 한다”
그때 사무엘이 얘기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제물이 없어서 배고파하십니까?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은 예배속에 순종을 보십니다. 순종을 보신다는 겁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살인죄를 범한사람입니다. 그전에는 간음죄도 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자기 아들에게까지 배척을 당해가지고 쫓겨나 피난갔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서 조롱을 합니다
“아이고 자식에게 쫓겨나고는 이 나쁜놈, 나쁜놈”
그중에 시무이라고 하는 얼마나 욕을 해 대는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잘못을 지적하면 “예! 잘못했습니다.” 밤을 세워가면서 회개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남이 돌을 던지면 그 돌을 던지는 것에 대해서 원수 삼을 수 있지만은
‘아니야!! 하나님이 저로 하여금 나에게 돌을 던지게 하시는 구나’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내놓고
‘아니 자식도 나를 버리는 데 남이 나한테 이럴 수도 있지...’
여러분 기독교의 영성 가운데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는 거에요. 어떠한 상황이 내게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속에서 내가 낮아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겁니다. 이게 예배에요. 순종이라는 거에요. 다윗이 그렇습니다. 성전건축 하겠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안된다. 피를 많이 흘려서.. ” 내가 헌신하겠다는데 하나님의 거절 앞에도 “예!! 알았습니다.”순종할 줄 압니다. 성전건축이 했다 안했다가 문제가 아니에요. 순종하는 마음이 있느냐...예배 속에는 순종이 있어요.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행할 때에 어떻게 합니까? 원수를 갚을 기회가 있다고 원수를 갚습니까? 왜? 부하들에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은 내가 어찌하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예배의 관계, 그중에서 순종이냐 아니냐로 구분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고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보는 것은 다윗 때문에 나온겁니다. 다윗의 마음은 언제나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복 받을 증거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복과 은혜를 주시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는 일요일을 일요일이라 하지 않고 주일이라고 하고 성일이라고 합니다. 성일이 뭡니까? 거룩한 날입니다. 거룩은 뭡니까?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날은 공휴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이다. 하나님의 날에 순종 할 줄 알면
“내가 성일에는 하나님 앞에 가야지..”
순종입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성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물건입니다. 하나님의 것!! 귀하죠. 귀하게 써야지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도 귀한 것 드려야 해요. 아주 좋은 것으로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순종이 그 마음에 있는 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았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교회학교 교사, 찬양대, 구역장, 권찰 하나님의 교회가 주신 직분은 성직이다. 왜? 하나님의 것이니까. 이거 귀하게 잘 감당해야죠. 순종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는지 하나님이 보시는 거에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성’자만 들어갔으면 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게 순종이에요.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말입니다.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직분- 하나님이 맡긴 직분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물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순종을 잘 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기적의 첫 번째는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도 순종하는 일꾼들이 있어서 그랬어요. 오병이어의 기적도 판단하는 빌립이 아니라 순종하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거에요. 예배속에는 순종이 있어요. 주일날 되면 성일이라. 하나님 전으로 찾으러 온 여러분에게 하나님 큰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승리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면 귀함 받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면 존귀함을 받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이 경멸하시고 주의 날 귀하게 성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 다시 한번 큰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신앙 계승의 유혹입니다
신앙계승의 유혹!! 바로는 말입니다.
“뭐 얘들까지 제사 하는데 데리고 가냐. 장정만, 어른들만 하나님한테 제사 드리게 하지 ”
이렇게 요구를 합니다. 그러면서요 참 재밌는 얘기는 어린애들까지 같이 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니까 안된다고 그러는 거에요. 출애굽기 10장 8절부터 11절까지 함께 보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뇨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찌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아 멘
어린아이들은 가지 말고 어른들만 가라는 것이 바로의 유혹이고 그것이 신앙의 도전입니다. 여러분 아이들도 예수믿고 아이들도 예배드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들 하시죠? 꼭 그렇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는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노령사회의 증거입니다. 사람나아 65세이상이 되면 노인이라고 일컸는데 노령화 사회는 전인구의 7%는 노령화사회입니다. 그런데 인구의 14%가 되면 노령사회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에 이미 노령화사회가 됐고 2020년에 가면 노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급속하게 노령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입니다. 프랑스는 115년, 스웨덴은 85년, 미국은 71년이 걸렸는데 우리나라는 20년이 안되는 시간안에 노령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노령사회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 소수의 생산인구가 엄청난 노인들의 생계문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연금문제 가지고 한참 얘기가 있잖아요.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으로 연급 지급 불능이라는 문제가 올거라는 겁니다. 불안하지요. 경제 생산성이 떨어지고 살길이 막막하다는 그러는 거에요.
대안이 뭐가 있냐?? 노인들의 사회의존도를 낮춰라 다시 말하면 연금, 이런 혜택같은 것들을 낮추라는 말입니다. 미국은 이런 것에 대한 대안을 연금으로 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라 그렇게 방향으로 나간다고 그러지 않아요. 두 번째는 더 많은 생산성 인구를 세대를 길러내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자식의 의무를 강조해라. 이게 대안입니다. 과연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미래의 불안은 기러기 아빠를 양성해서 조기유학을 시킵니다. 기러기는 암컷이 자식을 떠나면 수컷이 자식을 키웁니다. 그런 동물입니다. 우리나라에 엄마와 아이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아빠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유학비 생활비대고 보통 힘든게 아닙니다. 그런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뿐만 아니라 결혼 기피현상과 출산률 저하, 대안으로 내놓은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자꾸 떠나잖아요. 젊은이들이 말이에요. 농촌을 떠나듯이 나라를 계속 떠납니다. 여기는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애국자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어저께 조선일보를 보는데 책을 소개하는 코너가 토요일에는 꼭 있습니다. 그런데 책소개하는 곳에「인간은 기후를 지배 할 수 있는가 」윌리암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가 가뭄과 홍수와 폭설과 폭풍과 쓰나미 이런 모든 것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이 기후를 지배해야만 한다. 기후협약하는 교토협약사가 발간이 됐습니다만 이 책은 이겁니다. 인간이 기후를 지배할 수 있느냐 “없다”는 거에요. 대안이 뭐냐? 대안도 “없다”는 거에요. 이게 우리의 대안이냐? 없는게 우리의 대안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누가 이 나라의 삶을, 우리의 삶을 누가 이 지구의 기후를 책임지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대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안을 내 놓아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안은 딱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유럽이 한창 세계적으로 가장 잘 사는 나라, 아주 사회 복지가 참 잘되고 그러던 때가 있었습니다. 몇십년전 일이죠. 오슬로에서 청년대회가 열렸습니다. 정말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의 청년들은 무슨 고민이 있겠나. 그런데 이곳에 청년들도 고민이 있었어요. 너무 잘 먹고 잘 사니까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절망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자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복지정책이 잘된 나라일수록 그렇다는 거에요. 사람은 일을 성취하지 못해서도 절망을 하지만 성취하고 난 다음에도 절망하는게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잘 먹으니까 잘 입느니까 이들의 관심이 어디 가있습니까? 얼마나 잘 입고 얼마나 잘 먹겠어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자라면서 굶고 자란 세대속에는 지금은 젊은이들이 천국같겠지만 좀더 살기 힘들다는 거에요. 왜? 꿈이 없어요. 소망이 없어요. 대안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소망이 생깁니다.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소망입니다. 그런면 살수 있습니다.
여러분 에드워드 모추라고하는 케비넷 제조공이 있습니다.35살입니다. ‘내가 이 나이가 들도록 뭐했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원망, 불평하면서 망치나 두들겼다고 그래요. 그런다가 이분이 예수를 믿었어요. 과거에는 세상만 보고 살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사니까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케비넷을 만드는 망치소리가 달라졌다고 그래요. 뭘 만들었느냐? 과거에는 사람이 쓰는 물건을 만들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물건을 만들었어요.
“주여! 이 케비넷이 만들어져 쓰는 사람마다 예수 믿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받게 해주소서.”
예수를 믿으니까 사람이 달라져요. 인생의 목표.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예수님처럼 되야지 ”
과거에는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목표였지만은 이제는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게 목표가 됩니다. 과거에는
“언제쯤 저렇게 큰 집사나” “언제쯤 대우받나”
이것이 목표였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나라 언제쯤 건설해야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되고 내 직장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거에요. 그래서 이분이 찬송가도 짓고 하나님의 교회도 건축해서 하나님께 바쳤어요. 예수 믿으니까 달라지더라는 거에요. 찬송을 지어서 불렀어요.
이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주 예수 뿐일세
우리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 이시니 그위에 내가 서리라
그위에 내가 서리라
할렐루야!
아 멘
하나님의 꿈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습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있고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게 하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을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헌신에 대한 유혹입니다.
재물 없이 제사하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10장 24절을 보겠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룰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찌니라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화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면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 아멘
여러분 바로가 우리게게 요구하는 것은 제물없는 제사입니다. 헌신없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기차 여행중에 같이 앉은 사람들끼리 얘기를 하다보니까 서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아구 어느교회 나가느냐고 서로 인사를 하고 가는데 점심시간이 되가지고 한사람은 도시락을 준비해가지고 와서 먹고 있고 다른 한사람은 도시락을 준비를 못했어요. 도시락 갖은 사람이 도시락뚜껑을 여니까 그 안에 샌드위치가 있어요. 얼마나 맛있게 생겼는지... 정말 맛있게 먹더래요.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그리스도인이 혹시 샌드위치하나 안주나 기다리고 있는데 안주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를 썼어요.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 보니까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그랬다고 그러네요” 그랬어요. 그랬으면 하나 줘야 할 것 아니에요. 무슨뜻인줄 알고 정색을 하면서 하는말이
“선생님! 성경에 보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라고 하더라구요”
행함이 없은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주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므로 헌신을 해야 합니다. 크래머신학자는 교회의 본질은 봉사에 있으며 봉사하지 않으면 아웃사이더가 된다고 했습니다.
무디목사님은 설교를 했는데 배움이 적었기 때문에 언제나 문법이 많이 틀렸습니다. 하루는 문법학자가 찾아와서는 많은 사람이 있는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다음부터는 설교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연설입니까? 문법하나 제대로 맞지 않는 그런 연설 듣기 거북합니다.”무디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 예, 저는 배움이 적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해도 실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요 어떻게 해서라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는 헌신하는 마음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런데 박사님에게 교수님에게 한마디 묻습니다. 박사님은 그렇게 좋은 능력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십니까? ”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얼마나 주를 위해 헌신을 하느냐 하나님이 우리 예배속에서 보고 계십니다.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한데에는 교인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오늘보다 과거의 교회들이 얼마나 믿음생활하고 헌신생활하기가 힘들었겠습니까? 갖은것도 적도 배운것도 적었어요. 그러나 어떠한 모습이라든지 헌신하려고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렛다과부의 마음, 과부의 동정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사랑하셔서 이 나라, 이교회를 이렇게 축복하신게 아닙니까.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이런게 있었구나. 헌금을 못하니까 우리는 헌일을 하겠습니다. 날일 자에요. 무언가 자세히 봤더니“나는 돈이 없어서 하나님께 바칠게 없습니다. 대신 나는 시간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시간내서 전도하고 시간내서 교회와서 청소라도하고, 시간내서 심방을 하고, 시간내서 교회참석 못하는 사람 찾아가서 교회나오라고 하고..
여러분 한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당 나오실 때에 여러분 이외에 다른 사람한테 연락을 해서 같이 예배당가자고 말 한사람이 있습니까? 결혼식 할 때나 찾지 말고 주일마다 여러분들 구역에 있는 식구마다, 남선교회, 여선교회식구들한테 다 연락을 해가지고 예배당가자고 하세요. 그건 누가 하는 일입니까? 따지지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하나님이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복입니다. 그 속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신앙의 계승이 있습니다. 미래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헌신이 있습니다. 이런 진실된 예배속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