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100회 공연 서울서 피날레… 가수
이문세
글로 이름 날려라, 文世라 지었는데… 音世가 됐죠
한현우 기자/조선일보 : 2012.12.22.
객석 점유율 99% - 1년 8개월간 美 등 국내외 40곳 순회 당진 빼곤 전회 매진 내년 데뷔 30주년 - 잠실 주경기장서 일생일대의큰 공연 할 계획… 은퇴? 안합니다
4세 때 이미 동네 가수 - 대학 1학년 무교동 클럽서 학비 벌기 위해 노래 시작 개그맨 전유성과 만남덕에 대타로 라디오 출연까지해 당대 인기 MC도 됐죠
음악 인생의 반쪽 이영훈 - 신촌블루스 소개로 만나 소녀·이별 이야기 등 내놓는 앨범마다 대히트 대중음악 기록 새로 썼죠
1963년 네 살 꼬마 이문세는 유행가를 꽤 잘 따라불렀다. 그의 집 근처에 정릉(貞陵)이 있어, 저녁나절이면 동네 어른들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문세를 귀여워한 어른들이 "노래 한 곡 해보라" 하면 그가 부르기 시작했다.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고/ 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 위키리의 '눈물을 감추고'라는 노래였다. 어른들이 박장대소 하며 "앙코르"를 외치면 그가 2분의 2박자에 맞춰 '꽃마차'를 불렀다. "노래하자 꽃서울/ 춤추는 꽃서울…". 그때 이미 관객을 의식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던 셈이다.
이문세는 28~31일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지난 1년8개월간 전국을 돌며 해온 공연 '붉은 노을'을 끝맺는다. 작년 4월 1일 이화여대에서 시작한 공연이 미국과 캐나다·호주·일본까지 총 40개 도시에서 꼭 100회 만에 마무리된다. 1000~1500석짜리 중(中)극장을 위주로 무려 15만명이 그의 무대를 목격했다. 국내 어떤 뮤지션도 이렇게 장대한 투어를 한 적이 없어 그 기록이 각별하다. 내년 54세가 되는 이 가수는 음악 인생 30주년을 맞는다. 지난 19일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이전보다 좀 더 날씬해진 그는 "공연 때문에 살찔 틈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100회 공연'을 계획했습니까.
"처음엔 18회로 끝내려고 했던 거예요. 너무 큰 공연만 한 것 같아서 작은 규모로 해보자고 했죠. 18회 공연이 매진됐는데 관객이 총 1만명밖에 안 됐어요. 제작진이 '공연 완성도가 높아서 그만하기 아깝다'며 지방 몇개 도시만 더 하자고 하더군요.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천, 군포, 과천 같은 작은 도시까지 간 거죠. 당진은 평생 처음 가봤고요."
공연기획사에 따르면 100회 공연 동안 객석 점유율은 99%가량이라고 한다. 충남 당진 공연을 제외하고는 99회 공연이 모두 매진됐다. 100회 가운데 20회 이상을 보는 팬들도 있다. 17번이나 한국을 들락날락하면서 공연을 본 일본 팬도 있다.
―전국에서 가장 열광적인 관객은 어디에 있습니까.
"열광은 무조건 바닷가 쪽입니다. 거긴 파도소리를 이겨야 하니까 일단 사람들 목소리가 커요. 바닷가 도시에 가면 공연 전부터 난리가 나요. 그런데 진짜 공연을 즐기고 아낌없이 표현하는 건 전라도 관객들이에요. 아주 심도 있게 즐기고 속에서 열기가 끓는 사람들이죠. 광주, 전주 같은 곳에서 공연하면 정말 행복해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서울 관객은 참 깍쟁이예요. 내한공연을 비롯해서 이미 좋은 공연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래서 서울 무대에 설 때는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이 돼요. 서울 관객마저 완전히 녹여내고 나면, 지방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아우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깁니다. 그런 힘으로 100회나 끌어온 거죠."
―컨디션 조절도 무척 중요하겠군요.
"내일 공연을 위해서 오늘 좀 덜 하자, 그런 건 없어요. 매번 파김치가 되지만 공연 앞두고 '자, 스탠바이 5분 전입니다' 하면 갑자기 에너지가 와요. 저는 제 스태프들이 제 노래와 감성을 100% 전달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전쟁터에 나가는데 아군에 탱크도 있고 로켓포도 있고, 여차하면 원자폭탄도 터뜨릴 수 있다는 뿌듯함이 나를 힘 나게 하는 것 같아요."
―목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목에 좋지 않은 것은 절대 안 해요. 담배 안 피우고, 공연 때 절대 술 안 마시고. 가수가 춤 잘 추고 얘기 재미있게 해봐야 뭐해요. 다들 노래 들으러 온 건데. 잘못해서 감기라도 걸려봐요. 그러면 제가 무대에서 '감기에 걸려 죄송합니다' 하면 프로페셔널이 아니죠. 내 공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무조건 행복하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장기 공연을 하면서 방송을 그만뒀는데 섭섭하지 않습니까.
"라디오는 언젠가 복귀할 거예요. 나는 TV를 특별히 싫어하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TV는 내 진심과 인간성과 본질을 알릴 수 있는 매체가 아니에요. 그래서 거기 나가는 걸 주업(主業)으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공연에서도 비교적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죠.
"공연에서 가수가 말을 많이 하면 지루해져요. 재미있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면, 노래가 지루해져요. 어떨 때는 말을 해야 할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말을 많이 하면 공연 질이 떨어져요. 진짜 자신 있는 공연은 음악만으로 하는 거죠."
―1년8개월이나 같은 스태프와 공연하면 회사 같은 분위기겠군요.
"맞아요. 스태프 60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어요. 내 공연에 참여함으로써 2년간 생활이 보장되는 거거든요. 스태프 중에 누가 2년 만에 전세금을 마련했다거나 좀 더 나은 집으로 이사했다거나 하면 뿌듯해요."
―노래 잘한다고 처음 칭찬받은 게 네 살 때입니까.
"그건 귀엽다는 수준이었고, 경신중학교 시절 매년 학급대항 합창대회가 있었어요. 제가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우리 반 지휘를 했는데, 늘 지휘상을 받았어요. 그때 심사위원이 작곡가 나운영 선생이었죠. 저에게 '너는 독일로 음악 유학을 가는 게 좋겠다. 아버지께 뵙자고 해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그러셨죠. '얘는 외아들입니다. 제 사업을 물려줄 생각입니다.'"
―음악적 칭찬도 받고 좌절도 겪었군요.
“그래서 제가 ‘유학은 안 갈 테니 대학 전공은 제가 알아서 고르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고 1때부터 음악선생님 지도로 성악 공부를 했죠. 서울대 성악과가 제 목표였어요. 고 3때는 이대 성악과 교수한테서 레슨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때는 서울대 가려면 서울대 교수에게서 레슨을 받았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대에 갈 수도 없고…. 그해 10월쯤 서울대 교수를 소개받았는데 그분이 ‘1년 재수하면서 레슨을 받으라’고 하시기에 깨끗이 포기했죠.”
―왜 포기했나요.
“우리 집에 그럴만한 돈이 없었어요. 그때 무척 어려울 때였거든요.” 그의 선친(이충로·2000년 작고)은 철강·기계류를 다루는 무역업을 하면서 1남3녀를 두었다. 막내로 아들이 태어나자 ‘글로 세상에 나아가라’는 뜻을 담아 ‘文世’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 아들은 글보다 음악에 매료됐고, 음대행이 좌절되자 전자공학과(명지대)로 진학했다. 그리고 1학년 때부터 서울 무교동에 있던 클럽 ‘꽃잎’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노래를 시작했다.
―결국 부친의 뜻과 다른 길로 가게 됐군요.
“아버지는 ‘이문세’란 이름을 주셨는데, 나는 이음세(李音世)가 된 거죠. 하하하.”
―‘꽃잎’도 유명한 곳이었나요.
“그때 ‘쉘부르’와 ‘꽃잎’이 유명했어요. 요절한 가수 김정호씨가 거기 월급사장이었고 전유성씨가 연예부장이었어요. ‘쉘부르’는 DJ 이종환씨가 오디션 심사를 하는데, 텃세가 심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꽃잎’에 찾아간 거죠. 기타 하나 들고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Are You Lonesome Tonight’을 불렀는데 전유성씨가 그래요. ‘잘한다. 만오천원인데, 할래?’ 한 달 1만5000원이라는 거죠. 지금으로 따지면 한 100만원쯤 될까? 그때 ‘하사와 병장’, ‘어니언스’ 같은 사람들이 저녁 골든타임에 무대 섰는데, 아마 10만원 넘게 받았을 거예요. 거기서 제가 월급 3만원까지 받다가 그만뒀죠.”
그때까지만 해도 이문세의 장래 계획은 졸업 후 적당한 곳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결국 부친 사업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만 해도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문세가 ‘쉘부르’ 대신 ‘꽃잎’에 찾아간 것이 결국 그의 인생행로를 바꿨다. 노래 잘하고 활달하던 이문세가 개그맨 전유성을 만났으니 세상이 그를 평범하게 살도록 놔두지 않았다.
―우연히 라디오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죠.
“CBS 라디오에 ‘세븐틴’이란 프로그램에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한 팀이 펑크를 낸 거예요. 그 PD가 전유성씨한테 ‘아무나 대신 좀 보내라’고 했고, 전유성씨가 저더러 가보라고 한 거죠. 얼떨결에 방송국 가서 노래했더니 PD가 저한테 그래요. ‘이제 내가 전화하면 펑크 때문이 아니야.’ 그리고 그 다음 주에 바로 전화가 왔어요. 그때부터 주 1회씩 6개월을 고정 출연하면서 방송을 익힌 거죠.”
―그때 펑크 낸 가수가 누군가요.
“‘논두렁밭두렁’이란 듀엣이었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죠. 하하하. 하여튼 저를 고정 출연시켜준 분이 송관율 PD였어요. 6개월간 고정 출연시키면서 노래와 입담을 검증하고, 그다음 개편 때 저를 아예 DJ에 앉혔죠.”
송관율은 “이문세를 이택림 이상으로 키울 수 있다”며 DJ 자리에 앉혔다. 노래도 잘하고 말도 잘하는 이택림이 빅스타였던 시절이다. DJ 1년 후 육군에 입대했다가 ‘외아들’이란 사유로 1년 만에 의가사제대한 이문세는 임백천의 권유로 KBS 어린이 프로그램 ‘달려라 중계차’ 진행자 오디션을 봤다.
―임백천씨가 왜 소개를 했습니까.
“그때 임백천씨와 친하게 지냈어요. 백천이가 자기가 하던 프로그램을 못하게 됐다며 저를 소개한 거죠. 갓 제대해서 머리는 짧고 얼굴은 새카만 저를…. KBS에 갔더니 다들 저를 보고 ‘정말 저 사람이냐’ 하는 표정이더라고요. 여자 진행자도 ‘저렇게 말같이 생긴 사람하고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얼굴이고요. 그래서 약간 욱,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30분만 달라’고 한 다음에 대기실에 가서 원고를 달달 외웠어요. 오디션을 보는데 백천이는 ‘안녕, 어린이 여러분’ 이런 스타일이었지만 저는 거수경례를 딱 붙이면서 ‘아아 안녕하십니까! 어린이 여러분!’ 이런 식으로 한 거죠. 다들 저를 반대했는데 정관영 부장이란 분이 ‘저놈 물건이다. 시켜보라’ 해서 맡게 됐어요. 제 인생에는 그렇게 늘 누군가가 나타났어요. 제가 열심히 노력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늘 어떤 사람이 도와줬죠.”
이문세는 당시 KBS 최고 인기프로그램 ‘젊음의 행진’ 차기 진행자로 거론될 만큼 꽤 인정받는 진행자가 됐다. 그러나 그는 경쟁 프로그램이었던 MBC의 ‘영 11’ 진행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영 11’ 덕분에 음악의 꿈을 다시 키울 수 있었다”고 했다.
―‘영 11’이 어떻게 음악과 연결됩니까.
“그때는 사회자가 노래도 하고 코미디도 하던 시절이었어요. 노사연씨와 듀엣곡도 자주 불렀는데, 사람들이 ‘사회자가 노래도 잘하네’ 이렇게 된 거죠.”
그의 재능과 인기를 알아본 음반회사의 제안으로 그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담긴 데뷔 앨범을 냈다. 1983년이다. 이 앨범은 그러나 거의 팔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문세를 여전히 ‘노래 잘하는 MC’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파랑새’가 담긴 2집을 냈을 때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영훈씨를 만났군요.
“‘신촌블루스’의 엄인호형과 친했는데, 어느 날 ‘괜찮은 작곡가가 있다’며 영훈씨를 소개해줬어요. 영훈씨가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이미 써둔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죠. 그게 바로 ‘소녀’였어요. 멜로디가 좋은 데다가 거의 클래식이더라고요. 그때 이미 ‘휘파람’도 있었고 ‘광화문 연가’도 써놓은 상태였어요.”
그렇게 낸 이문세 3집(1985)은 ‘난 아직 모르잖아요’와 ‘휘파람’, ‘소녀’를 대히트시키며 150만장이 팔렸고, ‘이별 이야기’와 ‘깊은 밤을 날아서’가 수록된 4집(1987)은 무려 285만장이 팔려 이전 한국 대중음악의 기록을 경신했다. 이후 두 사람은 7집까지 함께 활동했고 9, 12, 13집에서도 함께 했다. 지난 2008년 2월 대장암으로 별세한 이영훈은 생전 인터뷰에서 “이문세는 ‘좀 건조해요’, ‘슬픈 감정 빼봐요’식으로 말해도 무슨 뜻인지 알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가수였다”고 했었다.
―이문세의 음악 인생에서 이영훈이란 존재는 무엇입니까.
“내가 N극이라면 이영훈이 S극이었던 거죠. 서로 성격은 완전히 달랐지만, 둘이 만나니까 불도 만들고 엄청난 에너지도 만들어 냈던 거예요. 나는 자연과 운동을 좋아해서 산에 가고 스키 타고 하는 쪽이었고, 영훈씨는 틈만 나면 소주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이었죠. 영훈씨의 가장 큰 불만도 내가 ‘별이 빛나는 밤에(MBC 라디오)’를 하는 거였어요.”
―왜 그걸 싫어했나요.
“음악 하는 사람이니까 음악만 했으면 했던 거죠. 녹음실에서 연습하고 연습해서 간신히 뭔가 뽑아내려고 하는데, 별밤 해야 한다고 가곤 했거든요. 그래도 나에게 직접 뭐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문세는 1985년부터 96년까지 ‘별밤’ DJ로 활동했다. 그는 “별밤은 내게 매우 소중한 기회였고 결국 오늘 나의 일부가 됐다”며 “그때는 우리 둘 다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문세와 이영훈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다만 서로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하려고 다른 작곡가와 가수를 찾아나섰던 거죠. 한 번도 ‘나쁜 놈’이라고 욕한 적은 없었어요.”
▲ 이영훈을 빼놓고 이문세를 얘기할 수는 없다. 여전히 공연 레퍼토리의 80%를 이영훈 곡으로 채운다. 그는 “내가 N극이라면 이영훈은 S극”이라며 “성격이 상극인 두 사람이 만나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 사진작가 김태환
이문세는 가족을 미디어에 노출시키지 않는다. 특히 그의 아내(이지현·46)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연예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노출되고 유명해져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진 촬영이나 집안 공개 같은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대단한 미인이던데요.
“나한테 시집와서 좀 예뻐졌죠. 흠흠. 내가 워낙 뒷바라지를 잘 해줬으니.”
“뒷바라지를 잘해줬다”는 건 허언(虛言)이 아니다. 1988년 후배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이내 불같이 사랑했고 금세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장인·장모가 반대했다. 이문세가 아니라 결혼 자체를 반대했다. 이화여대 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대에 유학 가기로 돼있던 딸을 선뜻 내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문세의 장인은 ‘한국 지질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상만(86) 전 서울대 명예교수, 장모는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불리는 육완순(79)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이다. 이문세는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결혼은 안 된다”고 버티던 두 사람을 설득해 결혼했고, 결국 아내가 박사를 딸 때까지 뒷바라지를 했다. 그의 아내는 현재 서울여대 교수다.
―장인 장모를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처음 뵈러 갔을 때도 면접을 세게 봤어요. 장인어른이 뭘 보시면서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차이는 뭔가’, ‘왜 그걸 택했나’ 이렇게 묻는데, 옆에 계시던 장모님이 툭툭 치면서 ‘7번, 7번’ 하시는 거예요. 7번 질문을 빼먹고 8번으로 넘어간 거죠. 그러니까 ‘아, 그렇지. 부모님은 뭘 하시나’ 이런 식이었죠. 아주 정중하게 ‘우리 딸을 사랑한다면 유학 가도록 놔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결국 아내는 유학을 갔는데 사람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왜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으니까요. 공부에 몰입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힘들어해서 뉴욕에 찾아갔더니, 못 알아볼 정도로 살이 불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폭식을 한 거죠. 그래서 ‘안 되겠다, 돌아가자’ 하고 챙겨서 데려왔죠. 그랬더니 난리가 났는데 ‘따님이 이렇게 됐습니다.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평생 공부 뒷바라지하겠습니다. 결혼시켜 주십시오’ 했어요. 그래도 허락을 안 하시기에, 그냥 가출을 시켰어요. 전국을 여행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우리 결혼한다’고 떠들고 다녔죠. 그랬더니 어느 날 집으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부모님께서 우리 둘의 손을 잡으시더니 축복 기도를 해주셨어요.”
―잊을 수 없는 팬도 있겠죠.
“너무 많아서…. 그런데 내 팬들이 부모 세대가 되고 사회적 지위가 생기니까, 이젠 선물로 내 공연에 광고를 해요. 병원에 가면 알아서 다 진료해주면서 ‘당신의 건강이 나의 행복이오’ 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 팬이 다 상담해주고요. 정말 팬들이 나에게 해주는 건 대통령 부럽지 않을 정도예요. 그 모든 것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성실하게 뿌려온 씨앗을 거두는 거라고 생각해요.”
―잊을 수 없는 선물이 있다면.
“그건 내 팬이 내 콘서트의 제작자가 된 거예요. 정말 의외의 선물인 거죠. 100회 공연을 한 기획사 사장이 내 팬이에요. 예전부터 내 공연을 보면서 꼼꼼하게 분석해왔어요. 그러다가 결국 내 공연을 제작하게 된 거죠.” 이문세 공연을 제작한 무붕기획 이재인(43) 대표는 “내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이문세 노래와 함께 했다”고 말했다.
―내년이 30주년인데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내 일생일대의 가장 큰 그림을 한 번 그려볼 생각이에요. 잠실 주경기장에서 5월 말쯤 한 번 공연을 할 계획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몇만명 동원’ 하면서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큰 공연장에서도 맨 뒤 객석까지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노하우를 그간 쌓아왔다고 생각해요.”
―음악 30년을 이끌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공연이었어요. 음반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진 게 벌써 10년이 넘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연을 준비하고 했더니 30년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서 관객을 놓치지 않는 게 가장 큰 숙제이고 목표예요. 나의 가장 중요한 것을 거기에 투자해야 하는 거죠.”
―은퇴는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은퇴 안 해요. 노래나 용모가 추해져서 관객들이 슬퍼질 것 같으면 공연을 그만두겠죠. 프랭크 시나트라가 멋있는 게, 마지막 공연을 친구들 앞에서 했어요. 은퇴는 안 했다고요. 나는 은퇴 안 할 거예요.”
―묘비명을 직접 쓴다면 뭐라고 쓰겠습니까.
“잘 떠들다 가네! 하하하!”
예전 어느 날 자정쯤 예고 없이 이문세의 공연 연습실에 찾아간 적이 있다. 그는 마침 댄스팀과 춤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완전히 몰두한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열기의 순도가 너무 높아서, 마치 수행자의 방에 들어간 것처럼 경건해졌다. 인생 ‘잘 떠들다가’ 가기 위해 흘리는 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