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는 아티스틱 웨이 서평을 적을 생각이었다. 몇 주간은 커리큘럼을 따라가 볼 생각이기도 했고, 워낙에 책이 좋게 읽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른 새벽 글쓰기의 벗으로 틀어놓은 한 시인의 클럽하우스 방송. 거기서 읽어주는 또 다른 시인이 자기 모친과 나눈 한 마디가 마음에 날아와 뿌려지고. 그리고 발효되고 움트어 글을 적고 싶다는 충동이 피어나 버렸다.
시인은 고학을 했다 한다. 실업계에서 전문대로, 전문대에서 4년제로, 그리고, 석사, 박사를... 남들 부러울 수 있지만, 힘겨운 과정과 여러번의 실패를 거쳐 졸업한 그는 3개 학교와 잡지기고까지 하게 되었단다. 교수가 되지 못한 박사로서는 괜찮아 보이건만, 월 수입이 200만원이 채 안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는 일을 찾았다. 제일 괜찮을 법한 알바자리야 과외이겠지만, 그래도 대학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사교육에 뛰어들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하게 된 것은 쿠팡의 배달아르바이트였다.
40만원짜리 중고 오토바이 하나 사서 알바를 나서는 그에게 어머니가 걱정스레 말을 건낸다.
“그렇게 많이 배우고서도 할 일이 그 것 밖에 없는 거니?”
사이 좋아 보이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이 말. 세상 나를 위할 이의 입으로부터 자신의 처량함이 선명해지는 말이 날아든다. 시인의 마음에는 어떻게 박혔을까? 말 문이 턱 막힐 만도 하건만, 짐짓 의연한 듯 말한다.
“배운 게 많아서 할 일이 이것밖에 없는 거야.”
내게 글쓰기 주제를 바꾸게 한 것이 이 문장이다. 시인 답게 한 문장 안에 중의를 담아 위기를 넘긴다. 듣는 이에 따라서 이는 블랙 코미디, 해학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실천적 영성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강사 시급 3만 5천 원. 사실 이 정도의 시급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훌륭한 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일이 충분할 때의 이야기이지, 시급은 높으나 일할 기회가 많지 않으면 시인처럼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분명 남들보다는 상황이 좋을 텐데도 말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처하게 되는 고학력 백수(프리랜서)들의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준 말)’한 상황. 이공계 계열만 선호할 수밖에 없는 우리 나라의 안쓰러운 현실이다.
그래, 돈을 벌려면, 아니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더라도 보통의 수입을 기대했다면 인문학을 해서는 안됐다. 이 모든 것은 인문학을 공부했던 시인의 잘못이었던 셈이다.
시인의 삶이 더 안쓰러워 지는 것은 그의 눈앞에는 쉬운 길이 있는 탓이다. 문학 과외 말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아마도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사교육을 하기에는 그는 너무 많이 배운 탓이다. 아마도 그에게 배움이란 학위만을 의미하지 않았나 보다.
돈은 없지만 과외를 하기에는 양심의 거리낌이 느껴지는 이 시인. 마음 속에 요순 시대 허유와 같이 살고자 하는 이상과 그래도 적당히 살기는 하겠기에 적은 봉급에 만족하지 못하고 택배 알바를 나서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그러나 거북하기보다 정감 있고 어딘가 안쓰럽기도 한 이율배반이다.
이 시인의 글을 읽어주던 클럽하우스 방장은 이 문장을 읽고서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아마도 지인의 상황과 진심에 작은 울림이 있었던 탓이리라. 어쩌면 안쓰러움에 눈물이 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나름의 고학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면서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썼다. 미션얼 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상담 공부에 눈을 돌릴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심리학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다니던 신학교의 상담석사과정을 밟을 생각이었다. 상담한 교수님이 미국을 가라고 하지만 않으셨다면 말이다. 지금도 그분이 왜 그러셨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순진했던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빈 손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겁도 없이 결혼 1년차에 저지른 일이었다. 심지어 아내의 뱃속에는 6개월된 아기도 있었다.
미국 학교에서 갑자기 박사과정이 없어졌을 때에도 아쉽기는 했지만 크게 마음두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교회사역이었기에 말이다. 한국에 박사할 학교를 알아보면서도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신학교에 상담학 박사가 새로 생긴다기에 인도하심인가보다 하였다. 어차피 나는 사역할 사람이었기에.
잠시 교회가 아닌 대학에서 월급을 받으며 가르칠 기회가 있었지만, 내가 진짜로 할 일은 사역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학교를 떠나 또 다시 사역을 했고, 또 다시 예기치 못하게 사역을 떠나게 되었다. 20대 중반부터 나름 20년간을 해 왔던 사역이다.
목회 시절 선배 목사님들에게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담임목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물었을 때, "조목사는 다른 건 다 괜찮으니 부임하는 교회에서 자기 편을 많이 만들어 두라."는 말을 들었다. 의외였다. 두 분의 목사님들께서 해주신 이야기였는데, 이분들 모두 정치적이거나 권력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시는 분들로 느꼈었기 때문이었다.
그 충고를 결국 따르지는 못하였다. 30대 목회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늘 진심으로 사역하면 누군가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정말로 그랬다. 부임하는 사역지에서는 늘 가시적, 비가시적 성과가 함께 있었다. 감사했다. 물론 그 목사님들의 말씀을 되새기게 되는 사건들이 있었지만 진부한 표현으로 늘 ‘인내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사역을 감당해 왔다.
그러다 40대에 부임한 사역지에서 사단이 났다. 담임목사님의 총애를 너무 많이 받았던 탓인지, 어린 사역자 친구들이 소위 ‘작업’을 걸었다. 이친구들의 여러 좋지 못한 행동들의 결과로 나의 목회는 어려움에 처했다. 헛소문도 돌았다. 그제서야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30대 때 겪었던 것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이상하게 세상보다도 가짜뉴스에 취약한 교회라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내가 진실하여도 작정하고 악하려는 친구들을 내편 없이 이겨낼 수는 없었다.
아마도 내가 조금만 더 ‘결단력 있’고 ‘지도력 있는’ 사역자라면, 이 어린 사역자 친구들의 문제를 나를 총애하시던 담임목사님께 소상히 오픈하고 그 친구들 편에 서서 내게 작업을 걸던 성도들에게도 이 친구들의 문제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것이다. 그것도 신앙의 이름으로 이들을 죄에서 구출해준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그렇다. 내게는 정의와 거룩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 대신 사임을 선택했다. 교회 사임뿐만 아니라 아예 사역을 그만두기로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유지해야 할 사역이라면 그냥 안하는게 낫겠다는 마음이어서 그랬다.
교회 바깥은 너무 오래 사역자모드로 살아온 나에게 여러 모로 편치 않다. 그래도 굳이 악하게 살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악하지 않아도 잘 사역하시는 분들이 꽤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또다시 운에 맡기면서 사역을 하기에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못했다. 허유는 되지 못했지만, 허유 닮은 삶을 놓지 못했던 클럽하우스 어느 시인의 소식처럼 나는 그리스도를 닮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 닮은 삶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래 공부까지 해놓고 굳이 사임까지 해야 했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가 해줄 수 대답도 그래서 그 시인과 닮을 수 밖에 없었나 보다.
“배운게 많아서 이렇게 밖에 못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