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와 애니메이션의 조합. 도저히 현실적일래야 현실적이기 힘든 조합입니다. 그리고 이마이시 히로유키 특유의 트리거스러운 작법은 원래부터 매우 왜곡되고 과장되어있는데 <사이버펑크 : 엣지러너>에서는 더욱더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한게 야하게 느껴지지 않고, 폭력적인게 폭력적이다 못해 유쾌하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정말 강렬한 영상들의 연속입니다. <Sex & Violence with Machspeed>라는 스튜디오 트리거의 단편 제목이 <엣지러너>와 딱 맞는 형용사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보고나니 왜 사람들이 게임 본편보다 총 5시간짜리의 <엣지러너>가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를 더 잘 담아냈다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CDPR은 다다익선이라는 기조로 아직까지 다 소화가 안되었을 정도로 게임본편에 많은 요소들을 구겨넣으려고 했지만, 트리거는 <엣지러너>에서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이야기들을 제외하면 쓸데없는 트릭이나 극적 장치들은 그냥 다 쳐냈기 때문입니다(이마이시의 평소 스타일).
주어진 분량이 짧다는 이유도 있지만 트리거는 줄거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속터지는 고구마라던지 반전이라던지 은유라던지 그런거 없습니다. 그냥 '주인공이 자기 어머니뻘 인물을 죽였는데 하필 그 인물의 자식이 과거의 자신과 겹쳐보여서 괴로워한다.', '이러이러한 음모가 있는데 그냥 이러이러한 음모다', '인체개조를 많이 하면 결국 맛가서 죽는다' 등등이라고 그냥 말해줍니다.
중요한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건조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현실적일래야 현실적이기 힘든 조합들을 가지고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엮어내니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저항해보지만 늘 추레하게 발버둥치다 전락하곤 한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아끼게 만들지만 늘 어긋남을 만든다, 우리는 늘 타인을 기만하면서 산다 등등...
또한 <엣지러너>는 권선징악을 권장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허구한날 살인을 일삼는 사이버펑크들도 결국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심지어 사이버펑크들은 사는동안 한 일들이 아니라 어떻게 죽었느냐에 따라 유명해진다는 점에서 묘하게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실제 플레이는 사양문제로 못해봤지만 유튜브나 생방으로 본 게임본편에서 CDPR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담아내려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위쳐3에서도 보여주었듯이 CDPR은 오픈월드 세계를 잘 구현해낸 전력이 있었지만, 2077은 보다보면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나', '존윅이 나와서 머릿속으로 뭐라 이야기는 하는데 영 맥이 안잡힌다'라는 느낌이 들면서 지쳐버립니다. 스토리에서 무언가를 느끼기보다는 그저 자극-반응모델처럼 <퀘스트 입수 --> 퀘스트 해결>을 그저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버립니다.
개인적으로는 CDPR이 잠시라도 스토리 작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세지는 온갖 요소들을 동원하여 주입하는게 아니라 그냥 건조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요. 그리고 무엇보다 구현하는 스케일을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스토리 대본의 차원에서 한계를 명확히해야 기술팀도 한계를 명확히 할 수 있을겁니다.
그건 그렇고 저는 루시보다 레베카가 취향이네요.
첫댓글 스토리와 감독을 cdpr이 했습니다. 크게 보자면 본편과 엣지러너의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애매한 엔딩 그리고 나오는 주역들이 죄다 죽어버리고 전편인 위쳐 시리즈에서도 나오던 호평 많은 비극적인 내용까지 전형적인 cdpr식 스토리가 맞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스토리의 얼개는 CDPR측이 이미 주었기 때문에 트리거가 크게 개입하진 않았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CDPR과의 협업속에서 그 스토리라인에 연출을 가하여 시청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낸건 트리거입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신 스토리의 특징들은 엣지러너뿐만 아니라 트리거의 다른 작품속에서도 반복된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트리거에게 엣지러너는 단순한 하청 제작물일 뿐만 아니라 트리거 세계관의 연속으로 보고 있습니다.
겜 발매전에 홍보용으로 이것부터 공개했다간 지금의 10배 이상으로 욕을 더 먹었을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수작이란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