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과 엽전들(왼쪽부터 신중현, 권용남, 이남이)
100년 가요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절은 아마도 일제치하 36년간과 유신시절이 될듯하다. 일제시대는 나라를 빼앗기고 말과 글을 쓸수없는 울분을 노래로 표현할수 없었고 박정희정권하에서 유신시절에는 표현의 자유를 구속당해 움추리고 산 서러움이 있다.
1975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고 유신체제(박정희대통령이 시해를 당한 1979년10월26일까지 4년간을 말함)로 들어갔다. 사회 각분야에서 정풍운동이 일어나고 문화계에도 정화대책을 발표,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을 규제해 선정과 퇴폐문화를 강력하게 단속에 들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시절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고고클럽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고고(Go-Go)란 원래 1960년대 후반, 미국 헐리우드의 선셋 부르바드에 있는 음악클럽 '위스키 아 고고'(Wishky A Go-Go)에서 "원맨 비틀즈"(1인의 비틀즈)라고 칭하는 가수 자니 리버스가 춤추기 좋은 느린 템포의 음악을 만들어 연주한데서 유래한다.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은 1914년 개관된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로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해 왔다.
박정희대통령은 외화수입을 올린다는 이유로 1963년 광나루 언덕에 워커힐호텔을 개관했다. 이 호텔을 지은 이유는 주한미군이 휴가를 받으면 국내에 머무를 데가 없어 일본으로 관광을 떠나자 미군들을 유치해 달러를 벌자는 의도였다. 그래서 개관기념으로 루이 암스트롱의 공연무대도 펼쳤다.
이런 일환으로 조선호텔도 리모델링을 하고 1969년 웨스틴 조선호텔로 재출범하기에 이르는데 지하에 '클럽 투모로우'가 외국인만을 상대로 고고클럽을 최초로 오픈했다.
하지만 헛점이 있어 외국인과 동행한 내국인은 출입이 허용됐는데 일부 날나리(?) 젊은여성들이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미국장병을 붙잡고 온갖 아양을 떨어 함께 입장하는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당시 '투모로우'의 연주인은 주로 필리핀밴드가 도맡으면서 필리핀밴드가 줏가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1970년 퇴계로 오리엔탈호텔에 '닐바나'가 내국인을 위한 클럽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이곳은 당시 주간경향 기자이던 서병후(드렁큰 타이거의 아버지)가 연예부장을 맡아 무대 양쪽에 원형스테이지를 세워놓고 여성댄서가 춤을 췄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무희그룹인 와일드캐츠(여성그룹과 동명이인팀으로 리더 김모아는 드렁큰 타이거의 어머니)가 춤을 춰 장안에 인기몰이를 했다.
이어서 종로 세운상가와 맞닿은 을지로 풍전상가 4층에 '풍전나이트클럽'에는 김훈과 트리퍼스, 템페스트 등이 출연하고 명동성당 건너편에 1971년 개관한 '로얄호텔클럽'에는 윤수일 등 혼혈아가 결성한 이색적인 혼혈밴드 골든그레입스, 역시 혼혈그룹인 함중아와 양키스, 신중현과 엽전들, 라스트찬스 등이 출연했으며 남산타워호텔의 '타워나이트클럽', 을지로 6가의 '천지나이트클럽' 등이 뒤따랐다.
당시는 자정12시부터 새벽4시까지 통금이 실시되던 시절로 클럽밖에서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통금해제까지 영락없이 갇혀 있어야하는 신세였다.
이 와중에 홀안에서는 밤새 춤을 췄는데 블루스타임이라하여 남녀가 껴안고 몸을 비비거나 키스를 해대는 행위가 퇴폐로 간주됐는데 그러나 단속에 걸린 업소는 이상하게 한군데도 없었으니 유신 정점기에 퇴폐가 판을 친 기막힌 일이 있었다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다보니까 터진 사건이 1974년 11월3일 청량리역 앞에 있던 대왕코너 화재사건으로 이 건물 클럽에서 춤추던 72명과 호텔 투숙객 등 88명이 사망하고 31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당시 현장에서 연주하던 애드포의 창단멤버로 <빗속의 연인>을 부른 서정길이 희생당했다.
어째거나 고고클럽의 유행은 항간에 퇴폐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긴했지만 역설적으로 당시 고고클럽에서는 한 업소에 록밴드를 2-4개 팀을 운영하면서 생음악(라이브) 연주를 해 록밴드의 전성시대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며 이 시절이 록그룹 역사에 황금기였다는 사실이다.
선성원 대중음악 평론가
김훈과 트리퍼스